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팽목항의 피에타 2014년 05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팽목항의 피에타


미켈란젤로(1475-1564)는 여러 개의 '피에타' 작품을 남겼다. 가장 유명한 것은 로마의 산 피에트로 성당(San Pietro Basilica)에 있는 작품이다. 미켈란젤로가 24살 때 제작한 그 작품에서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 예수의 시신을 무릎에 올려놓고 비탄에 잠겨 있다. 하지만 그 작품 속의 마리아는 감정적인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균형과 비례가 돋보이는 그 작품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한 한 어머니의 숭엄한 고요가 서려 있다. 그 고요함은 사소한 일에도 흔들리곤 하는 우리 삶에 부끄러움을 안겨준다. 아름답지만 섣불리 다가서기 어렵다.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피에타는 전혀 다른 형상을 하고 있다.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Sforzesco Castello) 박물관에 있는 '론다니니의 피에타'(La Pieta Rondanini)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죽기 며칠 전까지 손을 댔던 미완성의 작품이라 한다. 그 작품에서 어머니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뒤에서 부축하고 있다. 중력에 이끌리듯 아래로 아래로 무너지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있는 어머니. 그런데 자세히 보면 호흡이 멎은 예수가 살아있는 마리아를 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런 무늬도 들어있지 않은 하얀색 대리석, 그것도 미완에 그친 '론다니니의 피에타' 앞에 서는 순간 그 자리를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부축하고, 죽은 자가 산 자를 업고 있는 듯한 그 형태 속에서 나는 고통받고 있는 인류를 보았다. 그 인류의 아픔을 지고 서 있는 예수를 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또 다른 피에타를 보고 있다. 그 피에타는 저 무심한 진도 앞바다를 품고 있는 팽목항에 있다. 돌아올, 아니 돌아와야만 할 자식의 젖은 몸을 덮어주려고 담요를 든 채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그런데 그 피에타의 품에는 자식이 없다. 이보다 더 큰 슬픔이 어디 있을까? 돈 귀신에 들린 기업가, 관리 감독 책임을 방기한 관료들, 생명을 살리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기보다는 책임 회피에 급급했던 해경, 그리고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정부, 그리고 이런 세상을 만들어 놓고도 '별 일 없겠지' 하며 무사안일하게 살아온 우리가 공모하여 죽인 이들이 지금은 거울이 되어 우리 양심을 돌아보라고 다그친다. 팽목항 앞의 피에타 앞에서 우리는 눈물을 그칠 수 없다.


그리스 비극작가인 아이스퀼로스는 <코에포로이>에서 아버지의 무덤가에 앉아 엘렉트라가 한 탄식을 들려준다. "사람이 죽는다 하더라도 자식들은 기억의 목소리가 되어 망각으로부터 그를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은 그물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것을 막아 주는 부표(浮漂)와도 같습니다." 그래, 이게 순리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순리가 뒤집힌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부모가 자식의 '기억의 목소리'가 되어야 하는 세상, 그들이 가라앉지 않도록 '부표' 역할을 해야 하는 세상은 참혹하다.


교회가 그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들이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배경이 되어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겪고 있는 기막힌 고통의 의미를 성급하게 제시하려는 욕망은 버려야 한다. 그것은 교만일 뿐이다. 고통은 사람들 각자가 서 있던 삶의 토대를 흔들어 기원을 알 수 없는 혼돈 속으로 이끌어간다. 지금까지 작동해왔던 삶의 문법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참혹한 시련을 겪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 불원천리하고 찾아온 세 친구들은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욥이 자기 속에 깃든 고통과 무의미성을 견딜 수 없어, 왈칵왈칵 쏟아내는 말이 신에 대한 원망처럼 들리자, 그들은 욥의 곁을 떠나 신의 곁으로 옮겨간다. 그들은 마치 신의 대리인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욥을 공박한다. 그들의 말이 다 그른 것은 아니다. 귀담아 들어야 할 말도 많다. 하지만 발화된 말의 의미는 발설되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고통 속에 있는 이에게 던져지는 '옳은 말'은 살리는 말이 아니라 죽이는 말이다. 그 말은 듣는 이를 위한 말이 아니라 말하는 이를 위한 말이다. 그렇기에 폭력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남겨두고, 혼돈을 혼돈으로 인식하는 정직함이다. 다만 우리가 철저히 물어야 할 것은 '누가 이 일에 책임이 있는가?'이다. 그렇지 않다면 팽목항의 피에타는 위로받기를 거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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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청자(14 05-06 09:05)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이 땅의 라헬들의 눈물을 누가 닦아줄 것인가? 우리 모두가 공범자들이어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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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14 05-07 11:05)
입을 닫고 눈물 흘리며 모두가 돌아서야 할 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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