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19 2014년 04월 22일
작성자 김기석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17:1)


'때가 왔다'는 말이 무슨 뜻인 줄 아는 데, 그 말을 저렇게도 담담하게 하실 수가 있다니.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영광을 받을 때는 죽음의 시간을 의미한다. 보내심을 받은 자는 임무를 완수하고 자신을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날>의 한 대목을 쓸쓸하게 읊조린다. "주여,/때가 왔습니다./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해시계 위에 당신의/그림자를 드리우시고/들판 위엔 바람을 놓아주십시오". 시인은 마지막 열매들이 영글도록 이틀만 더 남국의 따뜻한 날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한다. 그 마음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기도를 올리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도 무르익지 못한 제자들과 세상을 위해서이다. 가르침을 받고, 그의 길을 걷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세속적 욕망의 거리에서 바장이는 이들을 위해서 예수는 중보의 기도를 올린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17:11)


주님은 진리를 거스르는 세상,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아버지의 품에 맡긴다. 그리고 그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를 올린다. 아, 그런데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구절이 도무지 삼켜지지 않는다. 오늘의 교회 현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는 못난 제자들 때문에 주님은 피울음을 삼키고 계실 것이다. 예수를 통해 나타난 모든 권능과 사랑의 기적은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가 빚은 열매였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되기 위하여 자기를 비웠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충만하게 채우셨다.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라던 어느 분의 말이 참 적실하지 않은가. 사탄은 사람 사이를 버름하게 만들고 그 버름해진 틈에 쐐기를 박아 갈라지게 하는 힘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버름했던 사이에 사랑을 채워 기어코 일치를 이뤄내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 제자들을 위탁한다. 나뉜 상태로는 생명과 평화를 본질로 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없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17:14-16)


참 제자들은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 소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악하고 어두운 세상은 다름을 용납하지 않는다. 모두가 일사불란한 대오를 이루어 앞으로 나아가는 데, 힐끔힐끔 해찰하며 곁길로 나가는 이들은 불온시 되기 일쑤이다. 진리의 길을 걷는 이들의 운명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도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이 복이 있다 하지 않으셨던가. 참 이상한 복이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마5:11)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어떤가? 예수의 제자라 하여 미움을 받는가? 그렇다. 미움을 받기는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거짓과 위선과 탐욕을 폭로하기 때문에 미움을 받기보다는, 우리의 거짓과 위선과 탐욕 때문에 욕을 먹고 있다. 세상에 초월의 빛을 비춰 길 잃은 이들의 향도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비리척지근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다만 유구무언일 따름이다.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17:17-19) 


'진리'와 '거룩'과 '아버지의 말씀'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진리가 아니고는 거룩하게 될 수 없고, 아버지의 말씀이 아니고는 진리를 알 수 없으니 하는 말이다. 아버지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경험과 생각을 앞세우는 것은 분열의 씨를 심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오롯이 사로잡히기를 소망하지 않으면 이웃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할 수도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당신을 거룩하게 한다고 말씀하신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다'라는 뜻과 '봉헌하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구별되고 봉헌된 것이 곧 거룩한 것이다. 주님은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셨다. 우리를 그 거룩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 길은 세상을 거스르는 좁은 길이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스스로 지은 거룩의 옷을 입고 넓은 길을 걷고 있다. 왜곡된 거룩은 세상의 웃음거리일 뿐이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나는 이미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렸으며, 앞으로도 알리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17:24, 26)


24절의 말씀은 주님께서 당신을 찾아온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물음에 주님은 "와서 보아라." 하고 응대하셨다. 요한은 "그들이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와 함께 지냈다"(1:39)고 전한다. 제자가 있어야 할 곳은 스승이 계신 곳이다. 제자의 눈이 지향해야 할 곳은 스승의 눈이 머물고 있는 곳이다. 스승이신 주님은 다시 한번 제자들이 당신이 계신 곳에 머물고, 당신이 받으실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신다. 머지 않아 뿔뿔이 흩어질 그들의 모습을 보고 계셨기 때문일까. 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나는 이미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렸으며, 앞으로도 알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사랑은 낙심하지 않는 것이다. 주님의 이 사랑이 아니고는 참 제자가 될 사람이 없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는 동산이 하나 있었는데, 예수와 그 제자들이 거기에 들어가셨다. 예수가 그 제자들과 함께 거기서 여러 번 모이셨으므로, 예수를 넘겨줄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다.(18:1-2)


올리브산과 예루살렘 동쪽 성벽 사이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에는 무덤이 많다. 기드론은 '탁하다, 흐리다, 어두컴컴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그곳을 '여호사밧 골짜기'라고도 불렀다. 왕들이 우상들과 그 제단을 파괴하고 불태우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기드론 골짜기는 어쩌면 '거룩'과 '속됨'의 경계선으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르겠다. 골짜기 건너편에는 예수가 그 제자들과 함께 머물던 만남의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번잡한 일상에서 비껴난 곳, 톨스토이의 야스나야 폴랴나와 비슷한 곳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소란이 예기되는 상황에서 '그곳'을 찾는다. 은신처가 아니다. 유다도 그 장소를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곳'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를 나누던 자리였다. 


유다는 로마 군대 병정들과,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고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닥쳐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18:3-4)


비무장일 뿐 아니라 비폭력을 삶의 원리로 삼고 있는 예수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 참 많기도 하다. 게다가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로마 군대 병정들'이 무대에 등장한다. 그것도 맨 앞에. 요한은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한사코 외면하려고 했던 현실을 직시한다. 예수의 죽음은 유대교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이 세상'의 지배자인 로마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임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등불', '횃불'은 그 시기가 어둠의 때임을 보여주는 상징이고, '무기'는 불의한 세계가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무장한 그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위협적이다. 하지만 예수는 조금도 위축된 기색이 없다. 이미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예수는 제자들을 안전한 곳에 머물게 한 후, 그들 앞으로 나서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다. 그들이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대답하자 "내가 그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제자들 뒤로 숨지 않으신다. 당신의 운명을 향해 당당히 나아가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뒤로 물러나서 땅에 쓰러졌다. 다시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 사람이라고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다. 너희가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전에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나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신 그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었다."(18:6-9)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나사렛 사람 예수요." "내가 그 사람이다." 긴박한 문답이 두 번씩 반복된다. "내가 그 사람이다"라는 선언은 문답과 문답 사이에 한 번 더 등장한다. 이 선언의 원어인 '에고 에이미(ego eimi)'를 영어로 번역하면 'I am'이 된다. 당신들이 찾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평범한 대답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대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사이에 현현하신 하나님께서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신 대답을 알고 있다. "나는 곧 나다."(출3:14) 세상의 어떤 서술어로도 형용할 수 없는 분,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있게' 하시고, 그것들을 돌보고 지탱하시는 분의 이름이 바로 '나는 나다'이다. 세 번씩이나 반복된 "내가 그 사람이다"라는 말은 그렇기에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예수를 잡으려고 왔던 이들이 뒤로 물러나서 땅에 쓰려졌다는 말은 그런 배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여라." 선한 목자는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해 이리들이 몰려올 때 양들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예수는 죽음을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아직 여물지 않은 제자들을 지켜내고 싶으신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고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18:10-11)


역시 베드로다. 다른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그는 스승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결기 있는 사나이답다. 그가 휘두른 칼에 말고의 귀가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예수는 베드로의 행동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아직도 베드로는 예수의 길을 알지 못한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더 강한 자들의 에고를 강화해 줄 뿐이다. 예수의 길은 비폭력 저항의 길이다. 예수의 싸움은 칼을 든 적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쓴 잔'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과의 싸움이요, 살기 위해 남을 해치려는 마음과의 싸움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미 죽었다. 그렇기에 그 잔을 기꺼이 마시려 한다. 예수는 체포되었고, 잡아 묶인 채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에게로 끌려 갔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라서,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안뜰에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베드로는 대문 밖에 서 있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인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문지기 하녀에게 말하고,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 때에 문지기 하녀가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도 이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베드로는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날이 추워서, 종들과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18:15-18)


예비 심문 자리이다. '다른 제자'가 대제사장과 어떤 사이였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다만 문지기 하녀의 추궁하는 듯한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아플 뿐이다. '내가 그 사람'이라 하셨던 예수와 '나는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베드로의 이 엇갈림. 죽음으로 사는 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이다. 요한은 날이 추웠다고 말하지만 정작 추운 것은 베드로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결기 많던 사나이 베드로가 경비병들과 함께 곁불을 쬐고 있다. 


대제사장은 예수께 그의 제자들과 그의 가르침에 관하여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소. 나는 언제나 모든 유대 사람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으며, 아무것도 숨어서 말한 것이 없소. 그런데 어찌하여 나에게 묻소?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를,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시오.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소."(18:19-21)


물음이 없으면 답도 없다. 똑같은 텍스트라도 묻는 방식이 달라지면 답도 달라진다. 질문은 능력이다.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면 질문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순한 질문도 있다. 말꼬투리를 잡기 위한 질문이 그렇고,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질문이 그렇다. 대제사장의 질문이 전형적인 불순한 질문이다. 예수는 그의 음모를 꿰뚫어보고 계셨기에 그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나는…아무것도 숨어서 말한 것이 없소"라고 대답하심으로써 질문자의 숨은 동기를 역설적으로 폭로하신다. 예수는 아무에게도 당신의 가르침을 숨기시지 않았다. 자기 속내를 숨기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일수록 다른 이들의 진실을 못미더워한다. 예수의 대답이 불순하다 하여 경비병 한 사람이 그를 때렸다. 서 있는 삶의 자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기 쉽다. 그 경비병에게 성찰은 없다.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인식되고 싶은 욕망만 있을 뿐이다. 


시몬 베드로는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베드로가 부인하여 "나는 아니오!"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으로서, 대제사장의 종 가운데 한 사람이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동산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는데 그러시오?" 베드로가 다시 부인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18:25-27)


예수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보내졌다. 시몬 베드로도 사람들 틈에 섞여 가야바의 집에 들어갔다. 그는 짐짓 구경꾼인 것처럼 불을 쬐며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희생양 만들기에 능동적으로 동참한 이들은 그를 알아보고는 묻는다. "당신도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베드로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나는 아니오!"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요13:37) 장담하던 베드로는 어디로 갔는가? 이게 인간의 슬픈 자화상이다. 거듭되는 부인否認은 "내가 그 사람이다" (18:5,6,8) 하셨던 스승의 대답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그러자'라는 접속 부사가 참 공교롭다. 그 단어를 굳이 확대해석하자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가 될 것이다. 깨달음은 언제나 너무 늦게 오는 법이다.


사람들이 가야바의 집에서 총독 관저로 예수를 끌고 갔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그들은 몸을 더럽히지 않고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하여 관저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18:28)


안나스의 집에서 가야바의 집으로, 가야바의 집에서 총독의 관저로, 예수는 밤새 조리돌림을 당했다. 아침은 희뿌옇게 밝아오지만 여전히 어둠의 세상이었다. 예수를 고발하는 이들은 관저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부정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결예법은 이렇게 철저하게 지키는 이들이 한 무고한 생명을 거두는 일에는 어찌 이리 집요하단 말인가? 회칠한 무덤이 따로 없다. 예수는 일찍이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이 가득한 위선자들을 책망하셨다(마23:25). 잘 믿는다 하는 이들 가운데는 이처럼 본本은 버리고 말末은 붙드는 이들이 참 많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나와서 "당신들은 이 사람을 무슨 일로 고발하는 거요?" 하고 물었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대답하였다. "이 사람이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가 총독님께 넘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를 데리고 가서, 당신들의 법대로 재판하시오." 유대 사람들이 "우리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18:29-31)


밖으로 나온 빌라도는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체 하며 고발의 사유를 묻는다. 그러나 우리는 빌라도가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이미 내통하고 있었음을 안다. 그는 수하의 군인들을 보내 예수의 체포를 돕도록 하지 않았던가?(18:3) 불의한 공모자인 그가 마치 공정한 재판관인 것처럼 행세를 하고 있다. 지도자들은 죄를 특정하기보다는 예수가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적반하장이다. 언어는 누가 부리느냐에 따라 진실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거짓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의 입장에서 예수는 악하다. 자기들의 어둠을 폭로하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선과 악은 이렇게 쉽게 뒤집힌다. 그들은 비루한 자기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빌라도를 칼로 사용하려 한다. 비열하기 이를 데 없다. 


빌라도가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를 불러내서 물었다.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 …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18:33, 36)


이제 빌라도는 예수에게 묻는다.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 예수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빌라도가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넌지시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라는 질문에 대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답하신다. 예수가 일컫는 '이 세상'은 강압에 의한 통치가 정당화되는 세계질서이다. 하지만 예수의 나라는 폭력이 아니라 사랑을, 착취가 아니라 나눔을, 지배가 아니라 섬김을 원리로 하는 나라이다.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왕이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빌라도가 예수께 "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18:37-38a)


당신이 왕이냐는 질문에 예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진리의 왕이라는 말이다. 오로지 진리를 위해 살고, 진리를 위해 죽는 사람이 바로 왕이 아니겠는가? 무력하게 포박당한 사람, 모욕당하고 있는 사람의 담담한 대답이 낯설기 이를 데 없다.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느꼈던 것일까? 그는 놀라서 묻는다. "진리가 무엇이오?" 진리가 바로 눈 앞에 있건만 그는 진리를 볼 수 없는 청맹과니였다.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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