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출애굽기 공부3 2014년 04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가만히 서서 구원을 보라

본문 / 출14:1-14


의도적 방황

애굽을 탈출한 공동체는 행군 경로를 변경해야 했습니다. 임의의 선택이 아니라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2)는 여호와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믹돌, 비하히롯이 어딘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알스본이라는 곳은 매우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바알'은 가나안의 최고신이었고, 스본은 바알 제의의 중심이었습니다. 탈출 공동체는 아직 가야 할 곳에 이르지 못했지만 바알스본 맞은편에 장막을 쳐야 했습니다. 또 다른 대결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이 원래의 행군 경로를 이탈하여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으면, 바로는 그들이 광야에 갇혔다고 판단하고 무모한 용기를 낼 것임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다시 한번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시면 바로가 군대를 이끌고 탈출 공동체를 추적할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을 물리치심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리라는 것입니다. 영광으로 번역된 단어의 원래 의미는 '무게'입니다. 하나님은 '헛것'에 불과한 우상들과는 달리 스스로 무게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추격자들

히브리인들이 탈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아차 싶었던 것 같습니다. 거듭되는 재앙이 야기했던 불편과 두려움이 사라지자 그들은 현실의 득실을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이 놓아보내는 것은 여러 면에서 손해라고 판단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애굽의 부를 만들어내던 노동력의 상실이 떠올랐을 겁니다. 게다가 바로의 체제가 밑바닥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차마 인정하기 싫었을 겁니다. 그래서 바로는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에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최강을 자랑하는 애굽의 병거 부대가 무장조차 하지 않은 탈출 공동체를 뒤쫓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8) 따랐다고 말합니다. 단순한듯 하지만 이 말은 강력합니다. 이 말은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 상황을 통제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보면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9)에 미쳤다는 말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바로는 여전히 자기 한계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인권을 유린당하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서 기자가 바로의 지시를 받던 군대의 위용을 저렇듯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은 그들의 허망한 패배를 암시하기 위한 극적인 장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허세가 심할수록 추락이 더 아찔한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의 결말을 알고 있기에 긴박함 속에서도 느긋하게 이 대목을 읽고 있지만 탈출 공동체는 그러지 못했을 겁니다. 바로가 보낸 추격자들의 모습이 보이고, 요란한 말발굽소리가 지축을 울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울부짖습니다. 느닷없이 닥쳐온 위협이 그들의 기억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 계시면서 자기들을 해방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까맣게 잊었던 것입니다.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은 비난할 대상을 찾게 마련입니다. 자기들 속에 들끓고 있는 분노와 공포를 타인에게 전가하려는 것은 약자들의 버릇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우리를 이끌어 내서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며 모세를 비난했습니다. 이렇게 허망하게 죽기보다는 차라리 애굽 사람을 섬기며 사는 것이 낫겠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들은 아직 자기 삶의 주체가 되지 못했습니다. 참된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그들의 마음을 위무慰撫하며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13).


'가만히 서서'라는 말은 동요하지 말라는 뜻일 겁니다. 백성들이 할 일은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신뢰는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사실 그 압도적인 애굽의 병거 부대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저항을 한다 해도 금방 궤멸될 게 뻔했습니다. 하지만 옛 말에도 있듯이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사는 법입니다. 정신을 차린다는 말을 신앙적 언어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한다'가 되지 않을까요? 모세는 그들이 믿기만 하면 전무후무한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임을 예고합니다. 그의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서 나온 확언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삶이 든든해집니다.























갈라진 바다

본문 / 출14:15-31


눈에 보이지 않아도

어느 신학자는 믿음을 일러 불가능의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이라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뿌리깊은 죄성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꿈과 지향이 없다면 인간 공동체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기어코 이루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어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눈이 좋아도 우리는 바다에 난 길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 길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있음과 없음의 경계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해야 할 일을 지시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15b-16)


넘실거리는 물을 향해 가라는 명령처럼 부당한 명령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세에게는 바로의 군병과 병거가 없었지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의 매개물인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손을 바다 위로 내밀면 바다가 갈라지리라는 것입니다. 전대미문의 사건이 예고되었지만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자칫하면 놀림감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합니다. 믿음이란 반지빠른 계산이 아닙니다. 모험입니다.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자 구름 기둥도 그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자연스레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경계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그어놓으신 그 경계는 누구도 철폐할 수 없습니다. 애굽 진영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었고, 이스라엘 진영에는 빛이 있었습니다. 마치 그들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 같습니다. 


예기치 않은 사건

마침내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자 동풍이 불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바람에 밀려 바닷물이 물러갔고, 바다가 마른 땅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좌우에 벽처럼 일어선 바다 사이를 걸었습니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종교는 미숙한 영혼들을 사로잡고 있는 거짓이라고 비웃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변하면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도 하나님께는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둘 사이의 접점은 없습니다. '벽처럼 일어선 물'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표현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 그들 속에 현존하시며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그런 구원 체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43:2)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벽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바다를 건널 때 추격자들도 그 뒤를 따라왔습니다. 그 위험한 순간 애굽 진을 내려다보시던 주님이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셨습니다. 병거 바퀴가 갯벌에 박혀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게 됩니다. 고대 세계의 가장 강력한 군대가 옴쭉달싹 못하는 상황에 빠진 겁니다. 갑작스러운 신적 공포가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들은 비로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황급히 도망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자 물의 힘이 회복되어 그들을 덮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은 '기적'이 아니라 '아이러니'입니다. 애굽이 자랑하던 무기와 장비가 한 순간에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제국의 군대가 무력하기 이를 데 없음이 드러났습니다. 강함과 약함이 뒤집혔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조롱하고 거스르는 세력들을 조롱거리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hubris)을 꺾으시는 분이십니다. 알랭 바디우는 '존재론적 단절'로서의 '사건' 개념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바다가 갈라지는 사건이야말로 세계의 운명을 바꿔놓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다가오면 불의는 정죄받고 정의가 회복됩니다.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도가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멸망당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진짜 어리석음은 자기가 지혜로운 줄 아는 것입니다. 진짜 무력함은 자기가 강한 줄 아는 것입니다.


바다의 저편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큰 능력을 몸으로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여호와를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으로 그들의 믿음이 반석처럼 든든해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합니다. 




















모세의 노래

본문 / 출15:1-18


찬양의 이유

사람들은 슬퍼도 노래를 부르고, 기뻐도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는 힘을 북돋기도 하고, 상처입은 마음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흩어졌던 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기도 합니다. 홀로 부르는 노래도 아름답지만 함께 부르는 노래는 더 아름답습니다. 굳이 화음을 이루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노래를 함께 부르는 이들은 기억과 정서를 공유하는 이들입니다. 찬양은 우리 삶을 하늘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도록 해줍니다.

바다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라는 일인칭으로 불리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모세의 노래라고 명명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세가 작사 작곡했다는 말이 아니라, 모세로 대표되는 구원받은 공동체의 노래라는 뜻일 겁니다. 일단 노래로 불리워지는 순간 그것은 한 개인이나 특정한 세대의 경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보편적 경험과 고백이 됩니다. 찬송의 이유는 단순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1)


높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은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신 분이십니다. 정지용의 시 가운데 "말아, 다락 같은 말아,/너는 점잖은 하다만은/너는 왜 그리 슬퍼 뵈니?"(<말> 부분) 하는 시구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면 말은 다락처럼 높아보일 겁니다. 억압 당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말을 탄 자는 사람들 속에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그런 이들을 하나님이 바다에 던져버리셨기에 찬양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다로부터 구출받기 위해 그들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은유를 사용합니다. '나의 힘', '노래',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 '용사'(2-3). 하나님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서술어'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은유가 탄생하게 된 삶의 절실함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력함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분을 '힘'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으며, 절망의 심연에서 말을 잃어버린 경험이 없다면 어떻게 그분을 '노래'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승리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을 찬양하던 노래는 하나님이 어떻게 원수를 물리치셨는지를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르는 자를 엎으십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억압받는 이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분노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십니다. 마음의 평정을 최고의 덕으로 여기는 스토아 철학자들이나 에피큐로스 학파 사람들이 보기에 격렬한 감정을 드러냄은 미성숙의 징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미성숙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의 분노는 그 백성들에 대한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화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노자는 '천지는 불인하다'(天地不仁)고 말했습니다. 하늘과 땅이 어질지 않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사람에 따라 두길보기를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꺼이 한편에 서십니다. 무너진 공의를 회복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십니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이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칼을 빼시는 분(9)이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래서 이렇게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11)


사지에서 그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살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물론 그 길을 열어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세상에 퍼져나갑니다. 그 소문을 듣고 블레셋 주민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들이 떨림에 잡히고, 가나안 주민들이 다 낙담합니다(14-15). 그들은 출애굽 공동체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던 나라들입니다. 주민들도 놀라지만 '두령'과 '영웅'들이 더 놀랍니다. 그들은 지켜야 할 기득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주의 크신 팔 앞에서 그들은 돌 같은 침묵에 빠졌습니다(16). 시인은 놀람에 사로잡힌 이들, 낙담한 이들의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광물적 상상력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다에서 물벽 사이를 걸었던 것처럼 적들의 한복판을 걸어 약속의 땅에 이를 것입니다. 노래는 그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인도하셔서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꼭 성전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사는 땅을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으로 인식했습니다.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도 하나님이 머무시는 땅임을 잊지 마십시오.



















수르 광야에서

본문 / 출15:19-27


미리암의 노래

19절은 바다에서 구원받은 사건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맞은 운명과 이스라엘 자손들의 운명이 극단적으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런 후에 20-21절에 나오는 것이 미리암의 노래입니다. 미리암은 이 대목에서 처음으로 실명으로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2장에서는 '그의 누이'(4, 7) 혹은 '그 소녀'(8)로 지칭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미리암이 아론의 누이라고 소개될 뿐 모세와의 관계가 암시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학자들은 이 부분을 아주 오래된 전승층에 속한 것으로 봅니다. 오래된 전승에서는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의 관계가 아직 확실하게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미리암의 노래에서 모세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리암은 '여선지자'(neb-ee-yaw)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단어는 '노래 부르는 능력을 부여받은 여자'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게 좋겠습니다. 옛 사람들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선창하는 사람은 신과 접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도 신적인 능력에 사로잡힐 때 비로소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철학자가 다스리는 이상국가에는 시인의 자리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시는 자칫하면 광기와 결합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먼저 노래를 메기고 다른 사람들이 그 노래를 받는 형식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남자들을 춤과 노래로 맞이하던 고대 이스라엘 여인들의 관습을 반영합니다. 사사인 입다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버지를 맞아들였던 것도 그런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삿11:34). 그 노래는 매우 간결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21). 기억하기도 쉽고 함께 부르기도 쉽습니다. 이렇게 역사는 노래를 통해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됩니다.


역경의 시간이 지나면

홍해를 건넌 탈출 공동체는 구원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수르 광야에 접어들었습니다. 광야는 척박한 불모지입니다. 사람도 동물도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입니다. 이따금 서 있는 싯딤나무만이 그 단조로운 풍경을 견디게 해줍니다. 그들은 사흘 길을 걸었습니다. 광야가 주는 최초의 공포가 그들을 엄습했습니다. 물이 없어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물기를 향해 뿌리를 내리는 식물들처럼 그들은 허위단심으로 물을 찾는 데 진력했습니다. 마라('쓰다')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비로소 물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 물은 '마라'라는 뜻이 암시하듯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소금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느꼈을 좌절감이 느껴집니다. 백성들은 또 다시 모세를 원망합니다. 바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시련 끝, 행복 시작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또 다른 죽음의 공포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불평이 터져 나올 만합니다.


모세 역시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무 한 그루를 보여주셨습니다.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져넣자 물이 달게 되었습니다. 그 신비한 나무를 찾기 위해 광야로 달려갈 것 없습니다. 그 나무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성사聖事의 도구였으니 말입니다. 주님이 제정하신 성만찬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성찬에 사용되었던 빵과 포도주는 그들이 식탁에서 늘 대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자 그 빵과 포도주는 주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라'와 같은 위기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그 위기를 능히 넘어설 수 있습니다.


쓴 물을 마실 수 있는 물로 바꾸어주신 주님은 법도와 율례를 백성들에게 주시며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법도'(mishpat)는 공동체 구성원 누구나 지켜야 하는 공의로움을 일컫는 말이고, 율례는 자기 제한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전까지 하나님은 그들의 필요에 늘 응답해주셨습니다. 아직 미성숙한 어린아이 단계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을 조금씩 성숙의 길로 이끌고 계십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가르치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말씀에 순종하고, 의를 행하고,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규례를 지키면 애굽 사람들에게 내렸던 질병을 그들에게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당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로 새롭게 계시하십니다.


그들은 조금 더 진행하여 가다가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 오아시스 엘림에 이르러 물 곁에 장막을 쳤습니다. 마라와 엘림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가장 어두운 새벽 미명 속에 이미 빛이 숨어드는 법입니다. 지금 마라에 있다고 누구를 원망할 필요 없습니다. 그 시련의 시간은 지나갈 것입니다. 지금 엘림에 있다고 하여 자만할 필요 없습니다. 마라의 시간이 또 다가올 것입니다. 참 삶이란 그 두 가지 삶의 계기를 통합할 줄 아는 영혼의 능력에서 나옵니다. 




















신 광야에서

본문 / 출16:1-12


우리는 삶이 힘겹다고 느낄 때마다 '산 너머 산'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어려움은 종종 연이어 찾아와 쓰라림을 배가시키곤 합니다. 평안하고 한적한 길을 가든하게 걸을 때도 있지만, 그늘 한 점 없는 돌밭을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엘림에 장막을 친 채 머물던 탈출 공동체는 또 다시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곳은 잠시 쉬어 가는 곳이지 정착하여 살아갈 곳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술 광야를 벗어나면 이제 좀 편안해질까 싶은 순간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신 광야입니다.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광야,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면 몸을 숨길만한 곳조차 없는 그곳을 터벅터벅 걷는다는 것은 참 암담한 일이었을 겁니다.


성경은 그들이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들어선 때를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고 적시하고 있습니다(1). 굳이 여정과 시간을 명토박아 둔 것은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하려는 의도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들은 상당히 긴 시간을 광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광야 생활에 적응이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려움이 중첩되다 보면 사람들은 비전을 붙들기보다는 현실의 어려움에 사로잡히게 마련입니다. 어려움은 그래서 부자유입니다. 


반복되는 원망

술 광야에서 탈출 공동체가 직면했던 어려움이 목마름이었다면 신 광야에서 마주친 어려움은 굶주림이었습니다. 애굽을 벗어나면서 가지고 나왔던 음식이 동나기 시작하자 불안감이 고조되었습니다. 딱히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멀쩡하게 잘 있는 자기들을 그런 사지로 끌어들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심리학에서 이런 것을 일러 투사(投射, projection)라 합니다. 자기의 불안이나 불만의 원인을 해소시키기 위해 그 원인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지요. '남 탓하기'라고 요약할 수도 있겠습니다. 


투사의 버릇이 있는 이들은 일쑤 퇴행(退行, regression) 현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퇴행이란 살아가면서 큰 위험이나 갈등 상황에 놓이게 될 때 거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안전하고 즐거웠던 이전 단계로 물러섬으로써 불안을 완화시키려는 태도를 이르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종살이하던 자기들의 과거를 미화합니다. 기억의 왜곡인 셈입니다. '채찍'과 '할당량'으로 상징될 수 있었던 삶이 '고기 가마'와 '떡'으로 치환되고 있습니다. 자기 삶의 주체로 서지 못한 이들은 언제나 이런 환상의 집을 만들어 거기에 머물려 합니다. 신앙은 '일어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독립적인 주체로 설 준비가 되지 못했습니다. 


신뢰로의 초대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역정을 내시기보다는 그들을 곤경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백성이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들이 날마다 나가서 그날 그날 먹을 만큼 거두어들이게 하라고 이르십니다. 먹을 것을 준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그것을 거두어들이는 책임은 각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 지시는 중요합니다. 그 지시를 수행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배우고, 어려움에 맞서는 영혼의 근육도 키우게 될 것입니다.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는 안쓰럽다 하여 자식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지 않습니다. 시행착오를 겪고,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해야 할 일을 해보는 경험이 축적되지 않으면 성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하늘에서 내린 음식을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그런 리듬이 몸에 밸 때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신뢰도 깊어질 것입니다. 여섯째 날에는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될 것(5)이라는 말씀은 아직 정식화되지 않은 형태의 안식일 규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일러주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6b-7a). 창조 이야기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5b). 이 두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볼 수는 없지만, 간접적인 연관은 있습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마치 창조 사건처럼 표현하고 싶은 것입니다. 창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곧 저녁에는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몸과 마음으로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올 먹을거리는 그 백성들의 곤경을 모른 체 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징표입니다. 신산스런 광야 생활로 인해 '원망'하던 백성들은 광야 저 편 구름 속에서 나타나는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10).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러합니다.























광야의 경제 원리

본문 / 출16:13-36


만 후? 만나 

적막한 광야 위로 후두둑 비가 내리듯 메추라기가 날아옵니다. 그리고 해가 떠올라 아침 이슬이 잦아들 무렵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눈에 띕니다. 광야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그것은 예기치 않은 낯선 풍경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이것이 무엇이냐?"(man hu)고 묻자 모세가 대신하여 대답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15) 나중에 사람들은 그 양식을 만나(manna)라고 지칭했습니다. '만 후'와 '만나'는 한 뿌리에서 나온 단어임이 분명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두 단어는 질문과 대답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만나를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 일으키신 초자연적인 기적이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만나는 광야생활을 하는 이들은 익히 알고 있던 자연현상이었습니다.


"만나라는 것은 위성류(渭城柳),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해서, 만나 위성류(tamarix mannifera)라는 사막에서 자라는 나무 내지 관목의 잎사귀에 맺히는 이슬 모양의 형성물인데, 이것은 연지벌레의 針을 통하여 나오는 분비물에서부터 생성되어 나뭇잎에 맺혔다가 땅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밤에 기온이 내려가면 비교적 단단하게 굳어져서 사람들이 주워 모를 수 있게 된다."(국제성서주석2,  M. Noth, <출애굽기>, 한국신학연구소, 1981, P.157)


만나가 특별할 것 없는 자연 현상이라고 하여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탈출 공동체가 그것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삶의 곤경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것도 우연히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곤 합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을 떠 바라보면 하나님의 숨결이 머물지 않은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은 것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대지를 딛고 걷는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기적이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기적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경탄을 잊고 삽니다. 경탄을 잊은 이들의 헛헛한 마음을 채우는 것은 원망과 탄식입니다.


먹을 만큼만 거두라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만나'라는 대상물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나를 통해 그 백성들에게 가르치시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되 한 사람에 한 오멜씩만 거두라고 말합니다. 한 오멜은 약 2리터에 해당됩니다. 그 정도면 한 사람의 일용할 양식으로 넉넉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광야를 걸으며 그 하얀 결정체를 거두어 들였습니다. 가족 수에 따라서 더 많이 거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무슨 마술적 사건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출애굽 공동체가 하나의 나라로 지어져가는 단초가 숨어 있습니다. 더 많이 거두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두어도 모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이 자기들의 욕망에 충실하기보다는 다른 이들을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으로 보고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피차 나누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욕망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불화와 갈등이 일어나고, 나눔과 공감의 원리가 작동되는 곳에서는 공동체가 세워집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불공평한 세상입니다. 세상의 20%의 사람들이 세계 자원의 80%를 누리고, 80%의 사람들이 20%의 자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현재 세계에는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절대빈곤층이 약 20억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유엔 특별식량조사관을 지낸 장 지글러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영양 결핍과 기아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수백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21세기 최대의 비극이다. 이는 그 어떤 이유나 정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부조리와 파렴치의 극치다. 나아가 이는 끝없이 되풀이되어온 반인류 범죄에 해당한다."(장 지글러, <탐욕의 시대>, 갈라파고스, 2008, p. 115)


모세는 거두어 들인 것을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을 어기고 음식을 여퉈뒀던 이들은 낭패스런 일을 만났습니다. 남겨 둔 것에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풍겼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절제하여 남겨 두는 것을 꾸짖기 위해 이런 구절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의 불안감이었습니다. 남겨둔 만나는 불확실한 삶에 대한 그들의 불안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몹시 화를 냈습니다. 여섯째 날에는 먹을거리를 두 배씩 거두어들였다가 안식일에 먹으라는 권고를 따르지 않고, 안식일에도 음식을 구하러 나갔던 사람도 엄중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져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법입니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통해 배울 수만 있다면 그래도 다행입니다. 



르비딤에서 만난 위기(1)

본문 / 출17:1-7


인간의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

탈출 공동체는 이런저런 역경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대신하는 것은 '여호와의 명령'(1)입니다. 가시적인 징표가 아니라 말씀을 따랐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내면화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믿음이 성숙해진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쓰라림과 감격을 동시에 맛보았던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이르렀습니다. 르비딤이라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특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출애굽기 본문에 따라 시내산 가는 길에 있다는 이도 있고, 실제로는 가데스 바네아 가까운 곳에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곳 역시 척박한 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마실 물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고질병인 '불평'이 다시 돋아나왔습니다. 그들은 다짜고짜 모세에게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2a)고 다그칩니다. 고난과 시련은 여러 번 반복되어도 익숙해지기 어렵습니다. 고난을 피할 수 없다면 고난을 통해 배우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세는 깨달음이 없는 백성들로 인해 많이 실망한 것 같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2b). '다투다'와 '시험하다'라는 단어는 이 단락의 마지막 대목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될 것입니다. 


믿음없는 백성들을 꾸짖기는 했지만 모세로서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마라의 쓴 물은 단물로 변화될 가능성이라도 있었지만 물기운조차 느낄 수 없는 그곳에서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의 부르짖음은 절박합니다. 그 척박한 땅에서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할는지도 모른다는 백성들의 공포가 그 부르짖음 속에 담겨 있었을 겁니다. 그는 또 백성들의 눈빛에서 광기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광기는 표적을 찾게 마련이고, 그 첫번째 표적이 자신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기에 그는 하나님께 더욱 절박하게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음은 미성숙한 영혼의 특색이라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모세는 인간의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을 기다립니다. 자신이 넘어진 자리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므리바, 그리고 맛사

부르짖음이 절박한 만큼 하나님의 개입도 신속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5)고 이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백성의 장로들을 호명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증언할 사람들로 택함 받았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의지를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의무를 모세 홀로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은 일단의 사람들을 주체화시켜 모세와 동역하게 하려 하십니다. 이 일단의 지도자들은 장차 모세가 위임한 일을 처리하는 임무를 맡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일 강을 쳐서 피로 변하게 하던 지팡이를 일어 '네 지팡이'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 지팡이의 소유자가 모세라는 지당한 사실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모세의 하나님 체험을 암시합니다. 모세는 그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에 내밀어 바다를 가르기도 했습니다. 지팡이는 역경 속에서도 그들을 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크신 능력을 환기시키는 매개물입니다. 모세는 일단의 장로들과 더불어 백성보다 앞서서 호렙산으로 갑니다. 그 산은 모세가 처음 하나님과 만났던 곳입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임재하신 하나님 앞에 신을 벗고 엎드린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6)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보는 데서 지시받은 대로 행합니다.


결과는 어땠습니까? 과연 물이 터져나오고 백성들의 목마름이 해갈되었나요? 우리는 반석에서 터져나온 물을 보고 기뻐하는 장로들의 모습과, 그들이 달려가 백성들을 인도해오는 광경, 그리고 마른 목을 축이며 흔감해 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그려보지만 성경은 과감하게 그 이후의 이야기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묘사가 생략되었기에 울림이 더욱 깊습니다. 


성서 기자들은 마치 서두르듯 이야기의 결론으로 내달립니다. 앞에서 모세가 백성들을 책망하면서 사용한 '다투다', '시험하다'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7절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그 단어들이 의도적으로 선택된 단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 놀라운 일이 벌어진 곳을 '므리바'(다툼)라고도 하고 '맛사'(시험)라고도 했습니다. 그들은 어쩌자고 그러한 지명 속에 자기들의 부끄러운 기억을 새겨놓은 것일까요? 성서기자들은 자기들의 과거를 미화할 생각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입니다. 그 지명과 마주할 때마다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고 하나님을 시험하였던 사실을 상기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할 것입니다. 






















르비딤의 위기(2)

본문 / 출17:8-16


그 동안 탈출 공동체가 겪어온 시련은 이루 말로 다 하기 어려을 정도였습니다. 추격하던 바로의 군대가 바다에 수장된 후, 그들은 술 광야와 신 광야에서 목마름과 배고픔이라는 원초적 위기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 위기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르비딤에서 '타자의 위협'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남부 지역과 시나이 반도를 중심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아말렉이 그들의 공격해 온 것입니다. 유목민이었던 그들은 소중한 샘과 오아시스와 목초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난데없이 등장한 다수의 무리가 자기들의 생존에 위협이 된다고 느끼자 그들은 사생결단의 마음으로 나섰던 것입니다. 아말렉 족은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와 첩 딤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말렉(창36:12)의 후손들입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들은 한 뿌리에서 나온 이들이라 할 수 있지만, 생존을 걸고 싸우는 겁니다. 돌이켜보면 역사는 형제간의 갈등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삭과 이스마엘, 에서와 야곱, 요셉과 형제들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그나마 가장 이상적인 형제관계를 보여줍니다. 


낯선 타자와의 만남

아말렉의 침공으로 이스라엘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여호수아가 등장합니다. 모세는 그에게 장정들을 선발하여 아말렉과 맞서 싸우라고 이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설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앞서의 물 기적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네 지팡이'를 가지고 가라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세는 그 동일한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라 말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백성을 사지에서 구원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는 동안,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손을 높이 들어올렸습니다. 이 장면에서 훌이라고 하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나중에 아론과 더불어 백성들을 돌보는 사명을 위임받기도 합니다(출24:14). 그러니까 그는 백성들 사이에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가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들어올려진 모세의 팔이 반드시 기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법률집인 미슈나는 모세의 팔이 그저 위를 가리키고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백성들의 눈과 마음이 모세의 팔이 가리키고 있는 저 '위'를 향할 때 내적인 힘과 희망 그리고 용기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전투에 대한 기록은 싱겁습니다. 어떤 스텍터클한 장면도 없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11). 이야기는 우리 시선을 저 산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 장면이 아니라, 마치 펄럭이는 깃발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있는 모세에게 집중되게 만듭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해 내려올 즈음이면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거기 앉히고, 각각 모세의 좌우편에 서서 그 손이 내려오지 않게 했다고 합니다. 전투 장면은 단 한 줄로 갈무리될 뿐입니다.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13) 다른 전쟁 이야기였다면 여호수가가 주인공이 될 법도 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조연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호와 닛시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서 기자는 아말렉의 침공을 매우 무덤덤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전 같으면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이 먼저 서술되고, 이어 여호와께 부르짖는 모세의 모습이 나왔을 겁니다. 그런데 아말렉과의 전투 이야기에는 백성들의 원망도 모세의 부르짖음도 없습니다. 아무런 기적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싸우고,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둡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을 연상케 하는 것은 들어올려진 모세의 팔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여전히 어린 아이의 상태로 머물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들이 독립적인 주체로 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직접적인 행위자가 아니라 그들 속에 능력을 부여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분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믿음을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 했습니다.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한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곧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신뢰하면서 자기 문제를 스스로 풀어가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칭얼대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숙의 길로 이끄십니다.


전투가 끝나자 이윽고 하나님이 다시 등장하십니다. 모세에게 일러 그 전투에 대한 기록을 남겨 후세에게 전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는 아말렉을 아주 없애겠다는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를 재확인시켜 주라 하십니다. 살기 위해 나름의 자구책을 찾았던 아말렉의 죄가 그렇게 중하다는 것입니까? 자유의 도상에 있는 약자들을 품어주지는 못할 망정 그들을 괴롭히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그렇게 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모세는 제단을 쌓고 그 제단을 여호와 닛시라 이릅니다.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적 리더십

본문 / 출18:1-27


반가운 방문자

아말렉과의 전투가 끝나고 잠시 숨을 고를 만한 시간에 반가운 이들이 모세를 찾아옵니다. 장인 이드로와 아내 십보라 그리고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입니다. '나그네'라는 뜻의 게르솜과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뜻의 엘리에셀은 모세가 경험한 삶의 양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외롭고 힘겨웠지만 그래도 은총을 누렸기에 감사한 나날. 마음의 눈을 뜨고 돌아보면 우리 삶도 이런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모세는 장인과 가족들을 장막으로 영접한 후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다 고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일들과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신 일들을 하나하나 톺아가며 이야기했습니다. 감사(thanks)는 생각(think)에서 나오고 생각은 기억을 더듬으며 시작됩니다. 기억은 망각에 대한 저항입니다. 모세는 경험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더 깊이 새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거듭 이드로가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다고 밝힙니다. 그가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광야를 떠돌며 살던 미디안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모시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유일신론이 등장하지 않았던 때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드로는 열린 마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도망자인 모세를 사위로 맞아들인 것만 보아도 그의 눈은 현상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증언을 들은 이드로는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11). 이드로는 기꺼이 하나님께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쳤고, 아론과 모든 이스라엘 장로들이 와서 함께 하나님의 떡을 나눠 먹었습니다.


책임 나눔

이튿날 이드로는 모세가 백성들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온 종일 애쓰는 모습을 지켜본 후에, 왜 그렇게 애면글면하느냐고 묻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여쭙기 위해 찾아오고, 또 이웃 간의 갈등이 생겼을 때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가르침으로 불화를 극복하도록 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드로는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17)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옳지 못하도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로 토브 lo tov'는 토라에서 여기 말고 딱 한 번 더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나오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옳지 않음' 혹은 '좋지 않음'은 '홀로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히브리 성경이 한결같이 가르치는 바는 사람은 홀로 살 수 없고, 홀로 이끌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뜻하는 히브리어 '하임hayim'은 그 자체로 복수형입니다. 사람 '인人' 자도 두 사람이 비스듬히 기댄 모습을 형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드로는 모세에게 홀로 책임을 지려는 태도는 장하기는 하지만 스스로를 탈진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지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 합니다. 진정한 지도력은 책임과 권한을 자기에게만 집중시키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드로는 경험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사위에게 적절한 충고를 해줍니다. 모세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백성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분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언제나 외적인 권위에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미성숙 상태에 머물게 하지 말고, 그들을 가르쳐 자기 삶의 주체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독재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백성들이 자기 입장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체계적인 인식과 비판적인 판단력을 심어주려는 이들에게 불온의 찌지를 붙여 박해합니다. 대신 대중들에게 달콤한 보상물을 줌으로써 그들을 길들이려 합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긴 여정은 외올실 위를 걷는 것처럼 늘 위태롭습니다. 그 길은 '의식화'와 '우민화'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가르친 후에 해야 할 일은 백성들 가운데서 좋은 지도자를 뽑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조건으로 이드로가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21)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유무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주님을 우리 삶을 규제하고 심판하는 외적 대상으로 여긴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하고 존경하기에 그 뜻에 기꺼이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진실하다는 말은 안팎이 일치한다는 말입니다. 두길보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도자의 자격으로 맨 끝에 언급된 것은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다'라는 강력한 단어를 쓴 까닭은 인간이 얼마나 사적 욕망에 휘둘리는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드로의 충언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백성들과 권한과 책임을 나눴습니다. 광야 공동체는 비로소 평등 공동체를 향한 초보적인 조직을 갖게 된 것입니다. 뽑힌 지도자들은 자기들에게 위임된 권한을 가지고 백성들을 재판했고, 판단하기 어려운 일은 모세에게 가져왔습니다. 성경은 이처럼 어떤 개인도 공동체나 나라를 이끄는 데 필요한 모든 능력 혹은 덕을 다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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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14 04-20 06:04)
좋은공부하고갑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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