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상상력을 허락하라 2014년 04월 02일
작성자 김기석

 

 상상력을 허락하라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노아>에 대해 논란이 뜨겁다. 성경의 충실한 재현을 기대했던 이들은 적잖이 당황한 것 같다. 영화 속에 그려진 노아의 모습이 도무지 그들이 그려왔던 노아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일정한 서사구조를 만들기 위해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키고, 설정을 도입하고, 각자에게 성격을 부여하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인물이 낯설어진 것이다. 낯섦은 내면에 경계심을 발동시키게 마련이고, 경계심은 타자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성경을 사실의 언어로만 이해하는 이들은 이 영화를 반기독교적인 뉴에이지 영화라고 비판함으로 자기 신념을 강화하고 있다.


그들의 사유 속에 상상력의 자리는 없다. 칸트는 상상력을 일컬어 감각적 자료들을 능동적으로 종합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상상력은 현실 경험과 사유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상상의 능력이 소거되면 현실과 사유는 겉돌고, 자기 불화와 소외감은 깊어간다. 사람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이들이 제일 먼저 거둬가는 것이 상상력이다. 새로운 삶을 상상하는 능력이 사라질 때 사람들은 현실에 순응하거나 동화되는 길을 찾는다. 추위에 얼어죽어가는 이들의 행복한 꿈처럼 그들은 현실이라는 매트릭스를 벗어나지 못한다. 버나드 브랜든 스캇은 예수의 비유에 관한 책의 부제를 '세계를 다시 상상하기'라고 붙였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비유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 아니라, 우리가 꿈꾸어야 할 세계로의 초대장이라는 것이다.


영화 <노아>를 불쾌하게 바라보는 이들은 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이 들려주는 노아 이야기에도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카렌은 홍수 심판 이후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쓰러진 것은 다른 생명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괴로움 때문이 아니냐고 묻고 있다. 나찌의 절멸 수용소에서 살아난 이들이 겪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그런 것일까? 카렌은 자신의 성경 해석을 정답이라 여기지 않는다. 사실 어느 누구도 성경 해석을 독점할 수는 없다. 유대교 랍비들은 만일 모세나 천사가 자기들의 성경해석에 이의를 제기한다 해도 자기들의 자유로운 해석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성경은 매끈한 텍스트가 아니다. 주름이 많은 텍스트라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거쳐 전승되는 동안 이런저런 경험과 감정과 해석이 추가되고, 그것이 온축되는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이다. 언표된 이야기의 행간에는 드러난 것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가 서려 있다. 성경은 개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진실을 전달하고 있다. 영연방 유대교 최고 랍비인 조너선 색스는 유다인들은 역사 자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바라보았던 최초의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역사라는 말 대신 그들이 사용한 것은 '기억하라'는 말이었다. 기억은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다 이야기를 기억하는 순간 그 이야기가 나와 무관할 수 없다. 유월절 저녁에 가장이 아이들에게 출애굽 사건을 들려주는 순간 출애굽 사건은 현재화된다. 이야기의 생명은 그 이야기 속에 자기 삶의 이야기를 버무리는 이들을 통해서 심화된다.


상상력을 통해 이야기 속에 감춰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 삶은 든든한 뿌리를 얻게 된다. 성경의 인물들을 전형성의 감옥에 가두는 것이야말로 불경한 일이다. 영화 속에서 표현되고 있는 이야기가 불경한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성경의 행간에서 감독이 읽어내려 한 것이 무엇이며, 그 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가를 살피면 된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였던 렘브란트의 성서화는 언제 보아도 깊은 감동을 준다. 그의 그림은 성경을 모티프로 하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자기 상상력을 포기하는 법이 없다. 그는 <이삭의 번제>를 다룬 그림과 판화를 여러 점 남겼는데, 어느 하나도 동일하지 않다. 어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은 거의 광기에 사로잡힌 듯 신념에 차있고, 어떤 그림 속에서는 인간적 고뇌로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삭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압도당한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수긍할 수 없다는 듯 잔뜩 찌푸린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다소곳이 무릎을 꿇은 채 섭리에 순응하는 자세로 그려지기도 한다. 어느 아브라함이, 어느 이삭이 성경적인가? 성경에 대한 일의적인 해석에 의해 상상력이 난폭하게 제거될 때 성경은 깊은 침묵 속에 잠긴다. 그리고 교조주의적인 이들은 득의의 미소를 띤 채 자기들의 특권을 누릴 것이다.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능력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현실에 포박당한 수인으로 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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