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기도할 용기 2014년 04월 02일
작성자 김기석

 기도할 용기


유럽의 몇 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다. 사람들은 인사 삼아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묻곤 한다. 대답하기 쉽지 않다. 아름다운 자연, 이국적인 풍경, 장엄한 건물을 떠올려본다. 묻는 이들의 기대대로 나는 어떤 장소 혹은 풍경을 그려보인다. 하지만 가슴에 깊이 새겨진 것은 정말 작고 사소할 수도 있는 어떤 순간들이다. 다리 쉼을 할겸 들렀던 파리의 어느 예배당, 관광객들도 찾지 않는 그 고요한 장소에서 나는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올리고 있는 블루진 차림의 중년남자를 보았다. 그는 어떤 사정을 가지고 그렇게 엎드려 있었던 것일까? 그 고요함을 차마 깨뜨릴 수 없어서 나는 숨을 죽인 채 고요 속에 침잠해야만 했다. 잘츠부르크의 어느 좁은 골목에 있던 작은 예배당 문고리를 잡아 당기다가 나는 제대 앞에 장궤(長跪) 자세로 앉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어느 수도자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가만히 문을 닫고 말았다. 로마 근교에 있는 바울 참수 교회, 아직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 하얀 수건으로 장의자를 닦고 또 닦으며 중얼중얼 기도를 올리는 봉사자를 보았다. 무엇보다도 거룩한 장면이었다.


사람은 왜 자꾸만 엎드리는가?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어느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숭고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런 공간에 머무는 동안 우리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가령 취리히의 프라우뮌스터에 있는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 앞에서 사람들이 깊은 침묵에 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속에 어떤 그리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뜻밖의 장소에서 예기치 않게 부딪히는 어떤 광경은 우리가 잊고 살던 어떤 세계를 떠올려주는 것이 아닐까?


에덴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에 공허함을 안고 산다.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해 보지만 마음의 헛헛함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기도를 한다. 엄마를 찾는 아기의 울음도 기도이고, 기막힌 재난을 당한 후 하늘만 바라보는 이들의 멍한 시선도 기도이고, 예배당에 엎드린 채 흑흑 흐느끼는 이들의 흔들리는 마음도 기도이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 까닭은 "현실의 가장자리에 살면서 그 중심에 닿는 길을 찾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비록 특정한 종교에 속하지 않았더라도, 형식을 갖추지 않았더라도 길을 찾는 이들은 누구나 기도자라 할 수 있다.


신앙인의 기도는 어떠한가? 신앙인에게 있어 기도는 호흡이다. 생명은 들숨과 날숨의 리듬 속에 터한다. 기도를 그치는 순간 신앙적 삶은 가뭇없이 스러지고 만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찬송을 부르며 눈물로 마룻바닥을 적시던 어머니들의 그 소박하고 뜨겁던 기도 소리가 그립다. 물론 지금도 눈물로 기도하는 이들이 있다. 자기 자신과 가족들과 교회를 위해, 그리고 나라를 위해. 어쩌면 그들의 기도가 이 세상을 향해 내리치려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이 이리 많은 데 왜 교회는 세상에서 추문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나? 우리의 믿음에, 기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기도는 우리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하는 수단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하고, 그 마음을 우리 속에 모셔들이는 것이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음 삼아 조율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삶의 한계상황을 만날 때만 엎드리지 않는다. 그는 생의 한 가운데에서 무릎을 꿇는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셔들이기 위해 엎드릴 때 하나님은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 속에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하늘 곡조를 연주하게 하신다. 기도자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한다. 그들에게 세상에 가득 찬 고통은 남의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 고통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엎드리지 않을 수 없다. 갈대 바다 앞에서 엎드렸던 모세처럼.


기도를 통해 문제가 해결되거나 외적인 상황이 바뀔 때도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도의 응답이라 한다. 하지만 기도의 보람은 문제 해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절박한 마음을 그분 앞에 내놓는 순간,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우리를 얽매고 있던 속박이 느슨해진다. 문제가 문제 아닌 게 될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기도는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붙들려 있던 우리 시선을 해방시켜 더 큰 세계를 보게 한다. 기도자는 나의 고통을 넘어 타자의 고통과 대면하게 되고, 그 고통의 연대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된다. 세상이 이 모양이 된 것은 사람들이 기도의 언저리만 맴돌뿐 더 깊은 기도의 세계 속에 들어갈 용기를 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기도의 마음으로 살 때 우리는 일상의 모든 순간 하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다. 분주한 생활은 우리에게서 경탄의 능력을 앗아갔다. 경탄의 능력이 회복될 때 욕망의 잡아당기는 힘은 줄어든다.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 하늘의 달과 별, 흘러가는 조각 구름, 흰 눈을 이고 있는 산봉우리, 흘러가는 강물, 봄 되어 돋아나는 새싹, 수줍게 피어나는 꽃들, 새들의 지저귐,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모습, 일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 사랑스레 마주보고 있는 연인들, 시린 가슴을 부여안은 채 울고 있는 이들…. 철학자인 칼 야스퍼스의 표현을 빌자면 이 모든 삶의 계기가 '초월자의 암호'가 아니겠는가. 어떤 시인은 이웃이 흘리는 눈물방울을 통해 하늘을 보았다고 말했다. 볼 마음만 있으면 우리는 어디에서나 하늘을 볼 수 있다. 감탄하는 것보다 깊은 기도가 또 있을까?


기도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상투어가 될 때 그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가 닿기 어렵다. 그리움조차 없이 발설되는 하나님의 이름, 진정한 참회없는 죄책 고백, 욕망에만 충실한 청원이 넘친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 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각자의 절실한 사정이 있지만 그 사정에 갇히면 안 된다. 기도의 지평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언어가 확장되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기도를 배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위대한 기도의 인물들이 구한 것과 오늘 우리가 구하는 것은 얼마나 다른가? 기도에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기도의 방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기도문을 읽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시편이나 좋은 기도문을 반복하여 읽다보면 우리가 정말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하루 하루 기도문을 적는 것도 아주 좋은 기도 훈련의 방법이 된다. 기도문은 우리가 하나님께 쓰는 편지이다. 이 책에 나오는 기도는 바로 그런 마음으로 기록된 것들이다. 히스기야가 바벨론 왕의 편지를 펼쳐놓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것처럼, 세상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사건과 사고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때 우리는 그 사건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물론 기도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시간을 정해놓고 골방에서 드리는 기도는 우리 영혼의 근육을 키워준다. 그것이 발성기도건 묵상기도건 관상기도건 상관없다. 문제는 지속이다. 하루에 다섯번씩 기도를 올리는 무슬림들의 성실함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길을 걷거나 공원을 산택하면서도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주기도문을 드리거나 예수기도를 드리며 걷다 보면 분산되었던 마음이 가지런해지고,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다. 어느 농사짓는 목사는 밭고랑에 앉아 작물들을 북돋는 그 시간이야말로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깊어지기 위해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자리가 있다. 그것은 고통받는 이들의 삶의 자리이다. 불편함이 싫어서 혹은 연루될까 두려워 사람들이 한사코 피하는 그 자리야말로 하나님이 머무시는 자리가 아니던가?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이들의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신다. 그 절박한 삶의 자리를 외면하는 한 우리 기도는 확장되거나 심화되기 어렵다.


헬리 나우웬은 기도란 "평화를 미워하는 자들의 거처를 떠나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기도는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이고 불의한 현실을 사랑으로 극복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세속화가 심화되는 이 때야말로 기도할 용기를 내야 할 때이다. 이 작은 책이 기도의 문을 열기 위한 문고리 구실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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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타(14 04-04 08:04)
아직은 소소한 사도행전을 가고 있는 저에게 목사님 말씀은 큰 문고리 구실을 하고 계십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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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연정(14 04-07 10:04)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금 고백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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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진(14 04-13 06:04)
영혼의 근육을 키워주는 기도.......평화를 미워하는 자들의 거처를 떠나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힘들어도 넘어지거나 쓰러지지 않기 위하여 때로는 힘찬 걸음을 옮기기 위하여 영혼의 근육은 필요하리라 봅니다. 시끄러운 세상, 서로 잘났다고 서로 믿음이 좋다고 떠들어대는 화평하지 않은 세상을 뒤로하고 고요한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 쉼을 얻으며 평화의 도구로 쓰임받을 준비를 하는 시간...기도의 골방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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