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출애굽기 공부2 2014년 02월 26일
작성자 김기석

 나는 여호와이니라

출6:1-30


혹 떼러 갔다가 혹을 붙인 격이라는 말 그대로입니다. 백성의 해방을 요구하는 모세와 아론의 청에 대해 바로는 더욱 가혹한 노동조건으로 응답했습니다. 백성들을 인격적 주체가 아니라 지푸라기 강아지처럼 여기는 압제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손이 흰 자들은 몸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사불란과 총화단결을 지향하는 제국에서 '다른 소리'를 내는 이들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일이 더 악화되었다고 불퉁거리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더불어 강조되는 것이 하나님의 '강한 손'(6:1)인데, 그것은 역사 속에 역동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은유입니다.


전능의 하나님,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낙심한 모세를 격려하고 히브리인들에 대한 해방 계획은 어김없이 진행될 것이라는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나는 여호와이니라"(6:2, 6)라는 구절입니다. ''나는 여호와"라는 이 단호한 자기 표명 속에는 말할 수 없는 긴장이 깃들어 있습니다. 주어와 서술어 사이의 틈 없는 일치, 바로 그 속에서 구원 역사가 일어납니다. '나의 나됨은 나의 백성을 구원하는 데서 정위된다'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엘 샤따이(El-Shaddai) 곧 '전능의 하나님'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두고 어떤 이들은 '산山 신'의 이름일 거라고 말하기도 하고, 겹쳐 있는 산 모양에 착안하여 '어머니 젖가슴'에서 연유한 이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전능의 하나님은 어머니처럼 지키시고 품어주시는 분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당신을 여호와/야훼로 소개하고 계십니다. 이 이름은 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의 맥락 속에서 등장합니다. 여호와는 사람들을 비인간화시키는 모든 억압과 착취를 물리치기 위해 역사 속에 기꺼이 개입하시는 전사(warrior)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6:5). 하나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십니다. 땅에 배어든 모든 아벨의 핏소리는 하나님의 개입을 요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땅의 현실과 무관한 절대 타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치나 법칙 혹은 진리라는 말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와 탐욕과 갈등으로 인해 더러워진 세상에 개입하셔서 뒤집힌 질서를 바로 잡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6:6b-7)


연속되어 등장하는 세 개의 동사 '빼내다', '건지다', '속량하다'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얼마나 단호한 것인지를 인상깊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빼낼 뿐만 아니라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인도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삼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란 그 약속을 믿고 그곳을 향해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고통에 사로잡힌 이들의 비극입니다. 잇따른 거절에 낙심한 모세는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조차 수행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6:12). '입이 둔한 자'라는 말 속에서 소명을 완수하지 못한 사람의 자조가 배어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숨겨진 욕망도 담겨 있습니다.


느닷없이 등장하는 족보

소명 앞에서 다시금 뒤로 물러서려는 모세와 기어코 그를 바로 앞에 세우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순간, 성경은 느닷없이 모세와 아론의 조상들의 족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족보는 12지파의 맏이인 르우벤으로부터 시작하여 시므온 레위 가문 순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사실 이 족보의 중심은 레위 지파, 그중에서도 아론입니다. 물론 모세의 이름도 언급되고 있지만 다만 그 뿐입니다. 그는 마치 부차적인 인물로 보일 정도입니다. 이러한 족보가 이 자리에 끼어든 이유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그 뜻을 유추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모세의 머뭇거림과 관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무언 중에 표현되고 있습니다. 둘째, 모세가 중심 인물로 소개되지 않은 것은 해방과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지만 하나님은 뜻하신 바를 기어코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주 넘어지면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제국의 맨 얼굴

출7:1-25


광야에서 돌아와 바로 앞에 섰던 모세는 그의 냉담한 반응에 낙심했습니다. 동족들의 원망도 커졌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무기력함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망의 자리에 선 사람을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쫓겨나고 백성들에게 거절당해 의기소침해진 모세를 다시 부르십니다.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꿈은 지연될 수는 있어도 무화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다시 바로에게 보내시면서 모세는 신적인 대리자답게 위엄을 가지고 바로와 맞서고 아론은 그를 대신하여 말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새로운 세계는 저절로 오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 시인은 "개똥 같은 내일이야/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문익환)라고 노래했던 것이겠지요. 진주는 보드라운 살을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자라는 법입니다. 해산의 고통 없이는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히브리인의 해방이라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먼저 완악한 바로의 마음을 꺾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땅에 많은 표징과 이적을 행하시려 하십니다. '표징'과 '이적'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지향하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7:5)


1절에서 7절 사이에는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를 반영하듯 '내가' 혹은 '내 손', '내 백성'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출애굽 사건은 모세와 아론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역사를 갱신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 때문이었음을 상기시키는 대목입니다. 


지팡이가 지팡이를 삼키다

마침내 모세와 아론은 바로 앞에 섰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바로에게 자기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아론이 모세의 지시를 받아 바로와 그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자 곧 뱀으로 변했습니다. 그러자 바로도 현인들과 마술사를 불러 같은 일을 하게 합니다. 그들이 보인 마술은 단순한 여흥거리가 아닙니다. 마술은 자연의 일상적 질서를 깨뜨립니다. 마술은 눈속임으로서의 요술일 수도 있고, 일반 백성들이 알지 못하는 기술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사람들은 그런 낯선 현상을 두려움으로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과학자들의 말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우리 현실 속에서도 고스란히 작동됩니다. 권력자들이 정보를 독점하려는 것은 거기에서 권력이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러니 고대세계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을 겁니다. 마술사는 언제든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왕은 그런 이들을 수하에 둠으로써 백성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권력의 아우라를 만들어냈습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나타난 변화의 이적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켰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애굽의 마술사들이나 바로가 쓰고 있던 특권의 가면을 찢어내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들의 권력이 얼마나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두려운 경고를 받고도 바로는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이 피가 되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침에 바로에게 가보라고 이르십니다. 바로가 나일 강가로 나올 터이니 거기서 그를 만나라는 것입니다. 아침 산책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인 애굽에서 나일강은 그야말로 생명의 젖줄이었습니다. 나일강이 없다면 그 땅은 죽음의 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나일강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나일강이 범람하는 때는 오시리스가 영광을 드러내는 때라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바로가 나일 강으로 나간 것은 그런 신들의 가호를 빌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모세는 나일강가에서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7:16)의 이름으로 히브리인들을 해방하라고 요구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나일강을 비롯한 애굽의 모든 물 근원을 지팡이로 치자 그 물은 모두 피로 변했습니다. 고기가 죽었고, 물에서는 악취가 났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물이 피로 변했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생명의 젖줄인 그 나일강물이 사실은 노예노동에 시달리던 이들이 흘린 피라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사건은 제국의 본질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바로는 그런 일을 겪고도 자기 궁으로 태연하게 돌아갑니다. 그 일에 관심을 갖지도 않습니다. 백성들이 겪는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국의 맨 얼굴입니다.




















재앙이 시작되다

출8:1-32


닥쳐올 일은 닥쳐오게 마련입니다. 애굽 땅에 내렸던 재앙에 관한 이야기는 아마도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지던 민담이었을 것입니다. 나라에 큰 위기가 닥쳐와 바로를 비롯한 관료들이 그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 채 허둥거리는 모습은 하층민들에게 묘한 쾌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불편함을 참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그들을 숨어서 비웃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어머니의 무릎을 벤 채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 이야기는 대개 삶 속에 닥쳐온 느닷없는 위기를 민중들이 지혜를 모아 슬기롭게 극복한다는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에토스를 구성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자라느냐에 따라 세상과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를 기록한 이는 민중들 사이에서 전승되고 있던 이야기 가운데서 애굽의 지도층을 통제 불능의 상태로 몰아넣었던 일들을 출애굽 이야기 속에 끌어들임으로서 그 사건을 극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개구리 재앙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메시지를 보내십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만일 그 요구를 거절하면 "내가 개구리로 온 땅을 치리라"는 경고도 함께 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 땅'은 물론 애굽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평범하지 않습니다. 애굽은 신격화된 바로의 성역이었습니다. 즉 바로의 의지가 지배하는 곳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개구리를 보내 그 땅을 치겠다는 말은 바로가 그 땅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친다는 것은 벌한다는 뜻입니다. 벌을 내리는 이는 벌 받는 이보다 우월적 지위에 있습니다. '온 땅을 치리라'는 말 속에 담긴 속뜻은 바로가 태양 신의 아들을 자처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는 물론 하나님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론이 애굽 물들 위에 손을 내밀자 무수한 개구리 떼가 나일 강에서 올라와 바로와 그 신하들과 백성들의 삶의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질서 있게 운행되던 창조질서가 일시에 뒤흔들린 것입니다. 애굽의 요술사들도 개구리를 끌어올리는 마술을 부리지만 결국 그들이 하는 일은 자기들의 곤경을 더 크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배층에 대한 민중들의 풍자를 봅니다. 결국 바로는 여호와라는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의 중보를 통해 개구리 재앙이 물러갔습니다.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된 바로는 다시 마음이 완고해져서 이스라엘의 해방을 거절합니다. 


이 재앙, 파리 재앙

재앙은 계속됩니다. 아론이 지팡이로 땅의 티끌을 치자 애굽의 모든 티끌이 이가 되어 가축과 사람을 괴롭힙니다. '이'라고 번역되기는 했지만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것을 곤충 혹은 모기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지가 바로의 성역에서 제한없이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애굽의 요술사들이 이전처럼 자기들의 능력을 보이려 하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그들은 즉시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바로에게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8:19) 하고 말합니다. '권능'이라고 옮겨진 말은 사실은 '손가락'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이 일은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라 신의 손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일이 이쯤 되었는데도 바로는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자기의 권위가 흔들린다고 여겼기 때문일까요? 재앙은 어쩌면 우매한 자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히브리인들을 해방하라는 요구와 거절할 경우에 닥쳐올 재앙이 예고됩니다. 이번에는 파리 재앙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달라지는 점이 있습니다. 이전까지 일어났던 재앙은 애굽 온 땅에 무차별적으로 내렸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곳에는 그 재앙이 미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두 방향의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바로에게는 이 재앙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려는 것이고, 여전히 모세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는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바로도 손을 들고 맙니다. 그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애굽의 제신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자기들과 애굽인들 사이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갈등을 핑계로 그런 제안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기어코 광야로 나가서 예배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바로는 마침내 너무 멀리 가지는 말아달라는 단서 조항을 단 채 이들이 광야로 나가는 것에 동의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간구해달라는 부탁도 빼놓지 않습니다(8:28). 그의 부탁은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 빌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국과 바로의 안위를 위해 빌어달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하나님은 지금 제국과 바로의 체제를 뒤흔들고 계십니다. 그런데 바로가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그는 여전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재앙

출9:1-35


지금까지 애굽땅에 내린 재앙은 생활에 불편함을 가져오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재앙은 점차 생명에 대한 직간접적인 타격으로 전환됩니다. 여러 차례 표징을 통해 경고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자신의 완악한 마음을 꺾지 않습니다. '완악하다'는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하자크'는 '달라붙다'라는 뜻입니다. 집착하는 마음을 일컫는 말입니다. 집착이란 사로잡힌 상태이기도 합니다. 사로잡혔기에 부자유합니다. 마음이 완악하다는 말은 그렇기에 둔감하다는 말이고,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죄가 초래하는 가장 무서운 일 가운데 하나로 '굳어짐'을 들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 '내버려 두심'이야말로 심판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가축의 죽음, 악성 종기

다섯째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들에서 기르던 가축들에게 닥쳐옵니다. 말, 나귀, 낙타, 소, 양이 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네번째 재앙 때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별하십니다. 애굽 사람들의 가축은 죽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축은 죽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사람을 보내 이같은 사실을 확인할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예시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았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쉽게 굴복하고 싶지도 않았고, 또 굴복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굴복하는 순간 자신에게 덮씌워진 태양신의 대리자라는 가면이 벗겨지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는 오랫동안 가면을 쓰고 산 이들의 보편적 운명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섯째 재앙은 악성 종기 재앙입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모세는 화덕의 재 두 움큼을 가지고 바로 앞에 나아가 그 재를 하늘을 향하여 날렸습니다. 그 재가 온 땅의 티끌이 되었고, 그것이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악성 종기가 생겼습니다. 마침내 재앙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애굽의 요술사들의 몸에도 악성 종기가 돋아났습니다. 이것은 바로의 체제가 흔들리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애굽의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해도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혼란이 닥쳐온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는 여전히 고집을 부립니다. 우리는 바로에게서 고난받는 이의 대명사가 된 욥의 뒤집힌 이미지를 봅니다. 욥은 가축들이 죽고, 자기 몸에 악성 종기가 났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그런 일을 겪고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엎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우박 재앙

일곱번째 재앙은 우박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돌림병으로 바로와 그 백성들을 치지 않으신 까닭을 밝히십니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9:16)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혹은 재앙 자체를 위해 재앙을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재앙은 마치 통 속에 든 감자껍질을 벗기듯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벗겨내는 역할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재앙이나 시련을 겪으면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유한함을 절감합니다. 바로는 자신을 우주의 중심 혹은 균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듭되는 재앙을 통해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은 경외심을 잃어버린 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계속해서 경고를 하신 까닭은 그도 또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자기 권력이 누구로부터 주어진 것인지를 알아차리고 돌이키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박 재앙을 예고하시면서 그 재앙이 '내일 이맘때'에 시작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바로의 신하들 가운데는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종들과 가축을 집으로 이끌어들인 이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로가 의지하고 있던 관료체제가 내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기약된 시간이 이르자 모세는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듭니다. 그러자 우렛소리와 우박, 그리고 번갯불이 애굽 땅 위를 가득 채웠습니다. 애굽 온 땅에서 우박이 사람과 짐승은 물론이고 밭에 있는 모든 채소를 치고 들에 있는 모든 나무를 꺾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고 있던 고센 땅만은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비로소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여호와의 의로우심을 인정합니다(9:27).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약속합니다. 모세가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펴자 우렛소리와 우박과 비가 그쳤습니다. 결정적 위기가 지나가자 바로는 또다시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립니다.


기득권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권력에의 탐닉도 일종의 중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와 주변을 피폐하게 만들기 전까지는 그 중독상태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직 바로가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은 다 비워지지 않았습니다.





















온 땅에 내린 흑암

출10:1-29


고집은 타고난 무지입니다. 혹은 자신의 입장 혹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심리입니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사람들은 신념으로 포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는 여러 가지 재앙을 겪으며 혼돈스러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영어로 '불합리하다' 혹은 '어리석다'는 뜻의 'absurd'에는 '귀머거리'를 뜻하는 'sardus'가 들어 있습니다. 어리석음이란 들으려 하지 않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표징적 사건을 보면서도 그는 애써 눈을 감곤 합니다. 춘추시대의 현인인 노자는 부드러운 것이 능히 굳센 것을 이긴다(柔能制剛)고 말했습니다. 부드러움은 생명의 친구이고, 딱딱함은 죽음의 친구입니다. 


메뚜기 재앙

지금까지의 재앙은 바로로 하여금 여호와를 알고 온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인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여덟째 재앙의 동기는 이스라엘 후손들이 대대로 여호와의 업적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10:2). 바로 앞에 선 모세와 아론은 바로의 교만함을 중히 꾸짖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메뚜기 떼가 온 땅을 뒤덮고 우박을 면하고 남은 모든 것을 먹어치울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앞서 우박 재앙 이야기는 밀과 쌀보리는 아직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여운을 남겨두었습니다. 희망의 조짐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재앙의 서곡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바로의 태도에 달린 문제였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이었던 밀과 쌀보리는 결국 메뚜기떼를 불러들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메뚜기 떼의 공포를 잘 알고 있던 신하들은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10:7) 하고 말하며 바로에게 압력을 가합니다. 결국 바로와 신하들은 히브리들이 자기들의 신에게 예배를 드리기 위해 애굽을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 범위 때문에 회담은 또 결렬되고 맙니다. 바로는 장정들만 가라고 했고, 모세는 남녀 노소와 양과 소를 모두 데리고 가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격앙된 바로는 모세를 쫓아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은 양보와 타협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옛 세계가 무너지고 새 세계가 도래할 때는 언제나 큰 혼란과 고통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메뚜기가 온 땅을 덮어 땅이 어둡게 되었으며 메뚜기가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애굽 온 땅에서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아니하였더라."(10:15)


시인 천상병은 하나님이 초록색을 좋아하시는 것 같다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녹음이 우거진 세상은 생명의 기운이 충일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푸른 것이 사라진 세상'을 보여줍니다. 죽음의 세상입니다. 메뚜기로 인해 땅이 어둡게 되었다는 말은 다음에 나올 흑암 재앙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후회는 언제나 뒤늦게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바로는 비로소 모세와 아론을 불러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올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하고…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10:17) '이번만'이라는 말이 참 구차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강력한 서풍을 불게 하셔서 메뚜기 떼를 몰아내십니다. 그러자 바로는 또 다시 고집을 부립니다. 


흑암 재앙

아홉 번째 재앙은 사전경고도 없이 즉시 시행됩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자 애굽 땅 위에 흑암이 내립니다. 이것은 창조 이야기를 정확히 거꾸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 찬 세상에서 빛을 이끌어내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하나님은 마치 장막을 펼치듯 애굽 온 땅에 어둠을 내리셨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머물고 있던 곳에는 빛이 있었습니다(10:23).


사흘 동안 계속된 어둠은 단순한 어둠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어둠 때문이기보다는 공포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해는 최고신(Re, Ra 혹은 Amon Re)이었습니다. 아멘호테프4세는 태양신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면서 태양을 찬양하는 노래를 짓기도 했습니다. 태양신은 인간과 소떼, 새의 무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미물마저도 모두 창조했고, 푸른 초목과 물고기 그리고 새들까지도 한결같이 돌보신다는 내용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그 땅에 내린 흑암을 태양신의 사라짐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흑암은 그들의 내면을 떠받쳐주고 있던 세계가 덧없이 스러진 것과 같은 공포를 그들에게 안겨주었습니다. 그 어둠은 '사흘'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 사흘이 사람들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사흘은 언제나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입니다.


바로는 모세를 불러서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양과 소는 남겨 두고 장정들과 어린 아이들만 함께 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전혀 타협할 생각이 없습니다. 가축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로는 대노하여 다시 자기 앞에 나타나면 죽이겠다고 위협하고는 모세를 쫓아냅니다. 길고 긴 협상이 최종적으로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바로가 내뱉은 '죽이겠다'는 위협은 역설적으로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간주곡

출11:1-10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에서부터 흑암 재앙에 이르기까지 숨가쁘게 이어지던 이야기가 잠시 중단됩니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피날레를 앞두고 돌연 뚝 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 멈춤의 순간 깊은 고요 속에서 청중들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는 마지막 소리를 기다립니다. 요한계시록도 비슷한 정황을 보여줍니다. 어린 양이 봉인을 하나하나 뗄 때마다 땅에 대한 심판이 즉각 시행되곤 했는데, 일곱째 봉인을 뗄 때는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했다고 합니다(계8:1). 그 짧은 휴지부는 최후의 타격이 찾아오기 전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인 동시에, 성찰과 돌이킴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출애굽을 앞둔 공동체에게는 먼 길을 떠날 채비를 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탈출 준비

하나님은 모세에게 마지막 재앙이 내리면 바로는 즉시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내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보낸다는 말이 부족하다고 여기셨는지 쫓아낼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고 이르십니다. 과연 애굽 사람들이 그런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지시하실 때는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시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길 없는 곳에서 '가라' 하실 때는 이미 길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본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11:3)


애굽 사람들이 관대하고 푼푼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신적 공포에 질려 있었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신하와 백성에게 위대하게 보였다는 말은 찬탄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을 자아내는 인물이었다는 뜻일 겁니다.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인들이 자기들의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연이은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오직 한 사람, 바로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을 요구했다는 것은 나중에 나온 신명기 법전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브리 남자나 여자를 종으로 삼았다면 일곱째 해에는 그를 자유인으로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그 때 주인은 그를 빈 손으로 돌려보내면 안 됩니다. 그가 또다시 종으로 전락하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하게 주어야 합니다(신15:12-15). 하나님은 출애굽 공동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맏이 혹은 맏배의 죽음 예고

이제 모세는 바로에게 나아가 최후의 통첩을 합니다. 부탁도 협상도 아닙니다. 단호한 선언입니다. 미구에 벌어질 일을 모세는 순차적으로 언급합니다. 하나님이 한 밤중에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실 터인데, 그러면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이 다 죽으리라는 것입니다. '바로의 장자'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에 이르기까지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면 애굽 역사상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재앙의 날 어머니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합니다. 출애굽의 서장에서 우리는 보았습니다. 아들을 낳은 히브리 여인들은 그 아기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굽 땅에는 한맺힌 여인들의 피울음이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서 또 다른 피울음이 터져나오려 합니다. 비극은 이렇게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바로와 제국의 강고한 태도는 결국 애굽 땅을 장례식장으로 만들고 맙니다.


모세는 그 재앙이 이스라엘 자손은 물론이고 그들에게 속한 가축들도 해를 입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런 재앙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에서 비롯된 일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모세는 장자의 죽음이라는 마지막 재앙이 그 땅에 내린 후에 일어날 일들도 예견하고 있습니다.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11:8). 관계의 역전이 일어납니다. 히브리인들을 도구적 존재로만 대하던 사람들이 이제 모세 앞에 내려와 절을 할 것이고, 한사코 그들을 붙잡으려 하던 이들이 이제는 제발 나가달라고 부탁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장자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경험한 후에나 나타날 일들입니다. 후회는 언제나 너무 늦게 찾아옵니다. 심연으로 추락하기 전에 돌이키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애집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불신앙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그런데 가장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유월절, 무교절

출12:1-20


하나님의 시간은 다가옵니다. 더딘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그 날은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의 시간이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심판의 시간입니다. 아홉 번의 재앙을 겪고도 바로는 그것을 표징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한 위기로 무너질 제국이 아니라는 자신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수천 년을 이어온 나라 아닙니까? 그 동안 위기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때마다 그들은 위기를 해결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바로는 이번에도 그 위기를 결국 돌파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격려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근거없는 자신감인지 곧 드러날 것입니다. 돌이킬 시간을 주기 위해 유보되었던 마지막 재앙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애굽을 탈출할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 의식 말입니다. 


유월절

하나님은 결정적 사건, 곧 이스라엘의 해방이 벌어질 그 달을 달의 시작, 한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 이르십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됨을 상징합니다. 이 달은 이스라엘력으로 아빕월인데 태양력으로 환산하면 3-4월 경이 됩니다. 애굽 혹은 팔레스타인 땅과 위도가 비슷한 나라에서는 봄철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만물이 생장하는 계절을 한 해의 시작으로 잡는다는 생각이 근사합니다. 하나님은 유월절 규례를 상세히 일러주십니다. 이것은 출애굽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기보다는 유월절 의식이 완전한 형태를 이룬 후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이들은 시간적 순차에 따라서 정확하게 쓰는 것보다 그 의미를 드러내는 데 관심을 기울일 때가 많습니다.


아빕월 열흘째 되는 날 이스라엘의 모든 가족들은 어린 양이나 염소 한 마리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은 흠이 없어야 하고 일년 된 수컷이어야 합니다. 굳이 수컷이어야 한다고 적시한 까닭은 애굽땅에 닥쳐올 장자의 죽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겁니다. 암컷은 봄이 되면 새끼를 낳아야 했으니까요. 식구가 적어 그 제물을 다 먹기 어려운 이들은 이웃들과 상의해서 적절한 분량을 계산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나눔은 공동체의 일치와 화합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린 양은 바로 잡는 것이 아니라 잘 간직해 두었다가 열 나흗날 해질 무렵에 잡아야 했습니다. 선택에서 도살에 이르기까지 나흘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있습니다. 유목민들에게 가축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였을 텐데 오며가며 자기들을 위해 도살당할 짐승을 바라보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나의 생명은 다른 생명의 희생 덕분에 유지된다는 것을 절감했을까요? 여하튼 그들은 어린 양을 잡아서 피는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야 했고, 고기는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했습니다. 무교병은 누룩을 넣어 반죽을 부풀게 할 수 없을 정도의 급박한 정황을 상기시키는 것이고, 쓴 나물은 애굽에서 그들이 겪었던 극심한 고통을 상기시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월절 공동식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상기시키는 기억의 매체였습니다. 유월절 음식은 그날 저녁에 다 먹어야 했고,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아야 했습니다. 부득이 남은 것은 아침에 태워 없애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밤에 애굽 땅을 두루 다니면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심판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다만 문설주와 상인방에 피가 묻어 있는 집은 그냥 '넘어갈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넘을 유逾' 자와 '넘을 월越'자가 결합된 유월절이라는 절기 이름은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처럼 시간 속에 마디(節)를 만들어 자기들이 경험한 구원 체험을 상기하곤 했습니다.


무교절

사실 유월절이나 무교절은 농경문화 축제와 관련된 절기였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적 경험과 결합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유월절은 아빕월에 행하는 절기인데 '아빕'이라는 단어는 '보리의 풋이삭'을 일컫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맘때가 되면 새해 소출이 많아지기를 빌면서 잡귀들이 틈 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어떤 의례를 행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해방 경험과 결합되어 주님의 구원을 상기하는 절기로 지켜졌습니다.


무교절은 아빕월 십오일부터 칠일간 지내는 축제였습니다. 이 절기에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마짜matsah)를 먹어야 합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누룩은 밀이나 보리 옥수수 등의 곡물을 찐 후 누룩곰팡이를 번식시킨 것입니다. 누룩은 반죽 속에 들어가 뭔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에는 누룩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누룩은 살림살이에 사용될 때는 유용한 것이지만, 상징으로 사용될 때는 부패와 타락의 대명사처럼 여겨졌습니다. 신약에서도 누룩은 인간이 경계해야 할 악덕을 상징할 때가 많습니다(마16:6, 고전5:8).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이레 동안 먹으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곤 했을 겁니다. 일상적인 식사가 종교적 의례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찾아온 해방

출12:21-51


출애굽 사건이 막 벌어지려는 순간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소집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요? 유월절 규례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에 대해 세세히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억압의 쇠사슬을 끊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면서 함께 인내하자고 말하려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자유에 이르는 길은 멀고 험하지만 그 길의 끝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대인들은 물론이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세대에게 전해야 할 기억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정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기억을 전승하는 중대한 매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월절 예식에서 가장은 사제가 되어 의례를 집행할 뿐 아니라 교사가 되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려줍니다. 의례를 통해 각인된 구원의 기억은 삶이 아무리 힘겨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을 것입니다. 구원의 기억은 어떤 유형적인 자산보다도 귀한 유산입니다.


처음 난 것들의 죽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모든 것을 다 행한 후에 마침내 그 무서운 마지막 재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모세나 아론을 통해 나타난 것도 아니었고, 자연질서의 파괴를 통해 나타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밤에 애굽 땅에서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처음 난 것은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필이면 왜 처음 난 것이었을까요? 고대인들은 땅에서 돋아난 식물이나 과일의 맏물과 가축의 맏배와 마찬가지로 여인에게서 태어난 맏이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지금도 불교권에서는 이런 전통을 지키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맏배와 맏이의 죽음은 생명의 하나님이 은총을 거두어들이셨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거역한 나라와 체제, 백성들을 잘 보살피기는커녕 그들을 수단으로 삼는 문명의 죽음을 선언하셨습니다. 체제 안정을 명분삼아 영아 학살을 획책하고, 하층민들의 정당한 삶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세계, 죽임 당한 자들의 피가 땅에서 소리를 지르고 고역에 시달리는 이들의 신음소리가 하늘을 울리는 그런 세상을 하나님은 더 이상 두고 보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주어졌지만 바로는 고집스럽게 그 기회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땅은 죽음을 애도하는 곡성이 가득 찬 곳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떠나라'고 말합니다. 허락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부탁입니다. 제발 빨리 떠나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 발효되지도 않은 반죽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고 황급히 그 땅을 떠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나기 전에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의 무보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 것일 수도 있고, 전쟁에서 승리한 이들이 거두어들이는 전리품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을 통해 애굽 사람들은 별다른 저항없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향한 행진

해방을 위한 길고 긴 싸움 끝에 마침내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해방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라암셋을 떠나 숙곳에 이르자 출애굽의 행렬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만 육십만 명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잡족'(erev rah)이란 해방 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을 일컫는 말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애굽 공동체는 애굽의 전제정치 하에서 신음하던 그들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의 연대가 일어난 것입니다. 출애굽이라는 과실은 누군가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새로운 역사는 가장 연약한 이들까지 품고 가려는 마음을 통해 나타납니다.


430년 전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일족이 70명이었다는 데, 그 사이에 인구가 그렇게 불어날 수 있겠느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고대 세계의 인구 증가 추세를 살피건대 그런 문제제기는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숫자의 사실성에만 매이다 보면 출애굽 사건의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람 숫자가 아니라, 사람들을 자유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육십만 명이 탈출하면 대단한 사건이고, 수 천명이 탈출하면 사소한 사건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회로로 인도하시다

출13:1-22


기억 투쟁

탈출 공동체를 향해 여호와의 명령이 주어집니다. 태에서 난 모든 것은 거룩히 구별하여 바치라는 것입니다. '거룩', '구별', '바침'은 사실상 같은 의미 계열을 가진 말들입니다. 거룩한 것은 구별된 것이고, 바치는 것은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실 수 있도록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1-16절은 1-2절의 확장입니다. 탈출 공동체가 들어가 살게 될 땅에 이르면 그곳에서 태어난 모든 맏이나 맏배를 하나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수컷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본문에서는 맏이를 대속하라는 말만 있을 뿐 어떻게 하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만 민수기는 성전 세겔 다섯을 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민18:16). 대속代贖이란 대신 값을 치뤘다는 뜻입니다. 왜 이런 대속이 필요한 것일까요? 애굽에서 일어났던 맏배와 맏이의 죽음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기억'이 중요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 것이 인간의 우매함입니다. 망각은 애써 극복했던 과거를 다시 불러옵니다. 시간은 모든 기억을 퇴색시킵니다. 어떤 이는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억 투쟁'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투쟁이라는 말이 다소 호전적으로 들립니다만, 망각과의 싸움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지시하는 말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 투쟁으로서의 의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여호와의 구원 역사입니다.


12장에서도 언급되었던 무교절 규정이 13장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것 역시 기억 투쟁을 위한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거든 아빕월의 정해진 날에 무교병을 먹는 의식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7절에 "네 땅에서 누룩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라"는 명령을 생각해 보십시오. 행여라도 묵은 누룩이 집안에 남아 있을까 싶어 곳곳을 뒤지는 가족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번거롭고 성가신 일이었을지는 몰라도 몸으로 기억을 되새기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과 함께 누룩을 찾으며 출애굽을 선물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쳐야 했습니다. 무교절기를 지키라는 명령과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바치라는 명령을 마무리하는 구절은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이것이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가 되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13:16, 참조 13:9-10).


구름 기둥과 불 기둥

하나님은 탈출 공동체를 지중해 해변인 블레셋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십니다. 블레셋 길은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최단거리입니다. 도보로 4-5일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길은 대상들이 오가는 국제 교역로였습니다. 애굽 왕들이 북쪽의 적들을 정벌하기 위해 사용하던 작전도로이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 길은 북쪽의 적들이 애굽을 공격할 때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애굽은 이 길을 지키기 위해 수에즈 지협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해놓았습니다. 애굽의 문헌은 이 방어선을 '호루스의 장벽'이라고 불렀습니다. 애굽 신화에 따르면 호루스는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로 매의 형태로 표현되었습니다. 고대 애굽의 주신이었던 호루스는 바로의 왕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자임했습니다. 호루스의 장벽이라 불리는 곳에는 도처에 애굽의 군사요새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탈출 공동체를 우회로로 인도하신 것은 예기되는 전투가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릴까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시련과 고난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우회로는 먼 길이지만 때로는 가장 가까운 길일 수도 있습니다. 정치적 변화는 빠를 수 있지만 사람의 변화는 시간이 걸립니다. 급하다고 해서 바늘을 실에 매어 쓸 수는 없는 법입니다. 지향만 분명하다면 더디고 빠른 것에 너무 예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출애굽이라는 그 긴박한 순간에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수습합니다. 굳이 그 이야기를 기록한 것은 출애굽 이야기를 성조(聖祖)들의 이야기와 연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요셉은 임종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그 백성들을 인도하실 것이라고 확언한 후에 자기 해골을 메고 올라가 달라고 부탁합니다(창50:22-26). 요셉의 유골은 그러니까 출애굽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난 일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탈출 공동체는 숙곳을 떠나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쳤습니다. 여호와께서 앞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밝혀주셨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당신의 백성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사시적으로 묘사한 하나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어떤 의미에서 시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세계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시104:2-3).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들과 동행하시고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라는 멋진 은유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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