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탈핵, 우리 시대의 소명 2014년 0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탈핵, 우리 시대의 소명

(2014/2/5, YWCA 총회 주제강연)


인류가 경험한 핵 재앙

이제 며칠 후(2월 9일)면 일본의 도쿄 도지사 보궐선거가 열립니다. 왜 남의 나라의 선거에 관심을 갖느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지만, 이번 선거는 인류 문명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총리인 아베가 내세우는 후보와 맞서기 위해 나선 이는 총리를 지냈던 호소카와 모리히로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를 돕기 위해 고이즈미 준이치로, 간 나오토 등 이미 총리를 지낸 이들이 나섰다는 사실입니다. 노욕이거나 권력욕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을 하나의 끈으로 묶은 정강정책은 '탈핵'입니다. 그들은 원전이 없이도 일본이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설득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의 붕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고도 일본 정부는 여전히 핵발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 돌아가는 사정을 소상히 알고 있는 이들이 나서서 핵 없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들의 행보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작년에 우리교회에서는 <한일생명평화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일본의 많은 음악가들이 후쿠시마의 참상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는 세상을 열기 위해 세계 각지를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비를 들여 핵의 무서움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고, 평화 감성을 고취시키기 위해 자기들의 재능을 바쳤습니다. 그들과 함께 왔던 사진작가 오가와 테츠시 씨의 사진을 보면서 저는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후쿠시마의 참상을 사진에 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곳에 살던 어린이들의 해맑은 모습, 그리고 주변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풀꽃을 찍었습니다. 그는 그런 아름다운 것들을 지켜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가 이론이나 원망사고(wishful thinking)가 아닌 삶으로 답할 차례입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이후 세 번의 큰 핵 재앙을 경험했습니다. 

첫째는 1979년 3월 28일 새벽 4시경 미국 펜실바니아에서 일어난 스리마일 원전 사고입니다. 핵 발전소 2호 원자로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고정 밸브에 이상이 생겨 냉각수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잠이 부족했던 직원들이 제때에 대응하지 못해 대형 사고가 되었습니다. 


둘째는 1986년 4월에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입니다. 그것은 직원들의 조작 실수가 빚어낸 참화였습니다. 안전 테스트를 시일 내에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던 직원들이 자동안전장치를 차단하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사고가 나자 직원들은 매뉴얼의 정반대로 행동했습니다. 비상 냉각 시스템을 꺼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체르노빌은 폭발했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2000 평방 마일이 넘는 범위에 방사능 물질이 퍼졌습니다. 다섯 살 이하의 어린이 250만 명을 포함해 1,700만 명의 사람들이 크고 작은 방사능 오염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사고 이후 5년 만에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평균수명은 74.5세에서 63.3세로 떨어졌고, 갑상선암은 700%나 증가했습니다. 


셋째가 바로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사고입니다. 당국자들은 지진이나 해일이 몰려와도 핵발전소는 안전하다고 선전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예측을 뛰어넘는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쓰나미의 충격으로 전력공급이 중단되었고, 냉각장치가 작동하지 않자 원자로가 가열되었고, 건물은 무너져 내리고,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유출되었습니다. 무색무취한 방사성 물질이 주변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서울보다 넓은 지역(반경 25km)이 유령 지대로 변했습니다. 사고 원전에서 핵연료를 회수하고 시설을 해체하는 데는 족히 30-40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그 복구비용은 무려 314조로 추산됩니다. 비용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머지 않은 장래에 태평양이 죽음의 바다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불행한 만남

인류와 핵의 만남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습니다.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주의 한 사막에서 최초의 핵폭탄 실험이 실시되었습니다. 상공 9km까지 거대한 버섯 모양의 구름이 피어올랐습니다. 그 광경을 참관하고 있던 한 육군 장군은 "투명하고 아름다운 빛깔이었으며, 장엄하고 두려웠다"고 증언했습니다. 그 실험을 주도했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이제 나는 죽음, 곧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과학 기술을 통해 죽음의 문을 열고 있음을 자각했던 것일까요? 


마침내 그 날이 다가왔습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 '리틀보이'(꼬마)라는 암호명의 핵폭탄이 떨어졌고 16만명이 죽었습니다. 며칠 후 나가사키에 '팻맨'(뚱보)이라는 이름의 핵폭탄이 떨어졌고 8만명이 죽었습니다. 피폭을 당하고도 죽지 않은 이들은 죽은 이들보다 더 큰 고통 속에 살다가 죽어갔습니다. 수십 만 명을 순식간에 죽일 수 있는 무기는 어떤 이들에게는 매혹적일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이들에게 그것은 마지막 천사의 나팔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후에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등이 앞다퉈 핵무기 경쟁에 돌입했고, 인류 문명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위에 집을 지은 격이 되었습니다.


냉전이 계속되자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핵폭탄을 제조하기 위해 만든 원자로를 상업용 원자로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세계 도처에 핵 발전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스리마일섬 사고와 체르노빌 대참사로 인해 핵발전이 한때 위축되기도 했지만, 에너지 위기가 가시화되고, 지구온난화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핵발전은 마치 화석연료시대가 종언을 고하는 시대의 유일한 대안인양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핵발전을 선전하는 이들은 마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두 짐승처럼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면서 핵의 신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그 거짓 신화의 가면을 찢어야 합니다.


거짓 신화의 가면을 찢다

첫째, 핵무기는 군사적 의미를 갖지만 핵발전은 평화를 위한 것이라는 신화는 거짓입니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결합된 것입니다. 이 둘이 흩어지지 않도록 꼭 붙들고 있는 힘을 핵력이라 합니다. 핵발전의 원리를 저는 잘 모르지만 간단히 설명해보겠습니다.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원자핵이 불안정해지면서 핵분열이 일어납니다. 양성자와 중성자를 결합시키고 있던 핵력이 에너지로 방출되는 동시에 2-3개의 중성자가 다시 발생하여 연쇄 분열을 일으킵니다. 거기에서 발생하는 열 에너지를 냉각수로 식히면 수증기가 만들어지고 그 수증기의 힘으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면 괜찮은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핵분열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이 문제입니다. 핵분열 과정에서 플루토늄, 요오드 131, 스트론튬 90, 세슘 137을 포함해 생명체에 치명적인 200종류 이상의 방사성 물질이 생성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욱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원자로란 본래 우라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라늄238을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239로 변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장치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핵발전을 강변하는 이들의 머릿속에는 핵무기에 대한 은근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북한의 경우가 그 예입니다. 압도적인 미국과 맞서기 위해서 그들은 비대칭적 무기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핵무기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로 분류해야 할 것입니다. 핵발전소의 존재는 그러니까 적대적인 진영에는 한편으로는 위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력적인 표적입니다. 군사적 공격과 테러의 표적으로 삼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핵발전소 하나가 공격을 받으면 이 좁은 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겁니다.


둘째, 핵발전을 통해 얻는 에너지는 온실가스를 방출하지 않는 저탄소 청정에너지라는 말은 거짓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라늄이 고갈되어 간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업자들은 우라늄을 채굴하기 위해 막대한 에너지를 들입니다. 채굴, 가공, 농축 과정에 들어가는 에너지만 생각해보아도 핵발전이 청정에너지를 얻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말의 허구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핵분열에서 방출되는 에너지 가운데 전력으로 전환되는 것은 1/3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30도가 넘는 온배수의 형태로 바다에 버려져 주변 생태계를 심각하게 파괴합니다. 깨끗하게 정화해서 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장기간의 검증을 거치지 않았기에 믿을 수 없는 주장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핵발전소는 한번 가동을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력 수요에 맞추어 출력을 조정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핵발전소는 언제나 최고 소비 시점에 맞추어 전기를 생산하기에 '남는 전기'가 늘 문제가 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부가 나서서 '심야 전기'를 사용하도록 권장했던 것은 그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것은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삶의 구조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의 악순환에 빠지면 헤어나오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의 일인당 전력소비량 증가율은 거의 세계 최고 수준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입니다.


셋째, 핵발전이 싸고 안전하다는 주장은 거짓입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핵연료 획득 과정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천연 우라늄 채굴, 정련, 농축, 분열, 재처리하는 데만 해도 막대한 에너지가 들어가고, 그 설비를 만들기 위해서도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런 투자금이 향하는 곳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토건회사 뿐입니다. 여기에 기술개발 비용, 에너지 변환의 저효율, 방사능에 대한 방호, 방사성 폐기물 처리, 온배수로 인한 환경 부담, 핵발전소 해체 비용(1기 해체에 대략 6,000억 원 가량이 든다고 합니다), 만에 하나 일어날 수도 있는 사고 복구비용까지 계산하면 이게 결코 값싼 에너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고가 나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고확률은 1/100만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사람들을 안심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그 확률은 거짓입니다. 모든 것이 완전하게 돌아갈 때나 나올 수 있는 수치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실수나 유한함이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 전 원전 비리 사태를 경험했습니다. 그 동안은 전문가들이 모든 것을 용의주도하게 잘 처리할 거라는 낙관론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원전을 둘러싼 비리의 커넥션을 보고 놀랐습니다. 불량품, 검증서 위조 부품, 시험 성적 위조 부품이 사용되었습니다. 어제 보도(2014/2/4, 저녁) 되었습니다만 신고리 원전 1호기에서 방사성 물질이 들어있는 냉각수가 유출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곳이 위조부품 사용으로 적발되었던 곳입니다. 냉각수 유출은 스리마일 섬 사고의 단초였습니다. 이미 수명이 다 된 원자로를 재사용하는 문제 또한 심각합니다. 문제가 드러날 때마다 정부, 재벌, 관료, 학자들은 진실을 은폐하고 호도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인류가 경험한 몇 번의 핵 재앙이 말해주는 것은, 인류가 핵에 의존하는 한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문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단 벌어지면 그 피해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넷째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인류는 아직 핵폐기물의 안전한 처리 방법을 모릅니다. 지금까지는 대개 세 가지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지하 암반이나 바다 속에 묻어버리는 영구처분, 우라늄을 다시 뽑아내 핵연료로 재사용하는 방법인 재처리, 격납용기에 담아 지하 깊숙한 곳에 저장하는 방법인 중간저장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묻어버린다고 하여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핵폐기물은 대략 100만년 동안이나 방사선을 내뿜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격납용기인 드럼의 수명은 고작 40년입니다. 폐기물 문제는 정말 심각합니다. 전세계적으로는 약 27만 톤, 한국에는 약 1만 톤의 폐연료봉이 핵발전소 내에 임시로 보관 중이라고 합니다. 한국은 2016년이면 그 보관용량이 한계에 이르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경주에 저준위[핵발전소에서 사용된 작업복, 장갑, 교체된 기기 부품 등 대상] 핵폐기물 처리장을 건설하고 있는데, 학자들은 그곳의 지질학적 조건이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수맥이 흐르는 곳이어서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2005년에 우리 정부가 핵폐기장 입지조건으로 내세운 것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핵발전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누구를 희생시키는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첫째 대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을 것, 둘째 학력수준이 낮을 것, 셋째 경제적 생활수준이 낮을 것 등입니다. 이것은 인권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지가 올 때 산업 폐기물을 몰래 방류하는 것만큼이나 비윤리적입니다. 안면도, 굴업도, 부안에 세우려던 방폐장은 사회적 갈등만 드러낸 채 철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아주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밀양 송전탑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희생자로 만드는 발전은 하나님의 뜻에 적합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섯째, 핵발전이 아니면 증가하는 전기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주장도 거짓입니다. 사실 우리는 엄청난 에너지 과소비국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핵발전소가 9기이던 1991년에 2,312kwh이던 1인당 전력소비량은 2005년에 7,403kwh로 3배나 증가했고, 2010년에는 9,493kwh로 증가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가정의 소비 증가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요인이 있습니다. 무한 경제성장과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산업 구조가 이런 에너지 과소비의 한 요인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핵발전소를 많이 짓는 것이 곧 문제의 해결일 수는 없습니다. 


두 가지 방향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대체 에너지 산업을 일으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에너지 과다 소비적 삶의 방식을 바꿔나가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의 총 생산 전력 중 핵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34.1%입니다. 정부는 2030년까지는 59%로 확대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습니다. 발전 설비의 비중은 조금 다릅니다. 2014년 1월 14일에 열린 국무회의는 '제2차 에너지 기본계획'을 심의 확정했는데, 전력설비에서 차지하는 원전 비중을 현재 26.4%에서 2035년까지는 29%로 늘리기로 했습니다. 이를 위해 현재 보유하고 있는 원전 23기 외에 건설 중이거나 건설 계획에 나와있는 11기를 더 짓고도 추가로 5기의 신규 원전 건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후쿠시마 핵재앙 이후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는 점진적 폐쇄를 결정한 데 비하면 정말 놀라운 결정입니다(러시아, 미국, 프랑스는 핵발전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원전 수출 계획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니 말문이 막힐 뿐입니다. 우리는 인류 문명사에서 죽음의 공포를 세계 곳곳에 심은 나라로 기록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핵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과 인접해 있어, 핵 밀집도에 있어서는 세계 1위인 나라입니다. 멸절적 재앙이 벌어질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인의 소명

그러면 신앙인들은 어떤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저는 이화여자대학교의 장윤재 박사의 견해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는 핵보유국의 눈이 아니라 피폭자의 눈으로 핵 문제를 보아야 한다. 과학기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생명의 관점에서, 우리 세대만이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수많은 세대의 눈으로, 나아가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을 포괄하는 전 우주 생명공동체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장윤재,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신학'을 위하여>, 신학사상 159호, 2012년 겨울호, p. 94)


핵문제를 피폭자의 눈으로 보는 것은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제국주의의 밑바닥에서 신음하던 이들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던 야훼 하나님의 시선과 오롯이 일치됩니다. 생명의 관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발전신화에 사로잡힌 이들은 생명이 넘실거리는 세상을 보고 '보기에 참 좋다' 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알 리 없습니다. 앞으로 태어날 세대의 눈과 자연의 눈으로 보면 답이 분명히 보입니다. 결국 핵 문제는 세계관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탈핵 세상은 불가능한 꿈일까요? 물론 일시에 탈핵 세상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가동중인 핵발전소도 폐쇄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수명이 다 된 원자로를 재사용하거나 새롭게 건설하지 않아야 합니다. 필요한 에너지는 재생 에너지(태양, 바람, 지열, 바이오)를 통해 확충해야 합니다. 독일의 경우 2009년 현재 재생 에너지 분야에서 이미 30만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핵산업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은 수 만 명에 불과합니다. 탈핵을 위한 여론 조성의 물적 토대가 마련된 셈입니다. 독일 총리 메르켈이 보수정당에 속해 있으면서도 에너지 정책을 탈핵으로 선회한 것은 시민들의 자각이 그만큼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전력 소비를 줄이는 지속적인 노력입니다. 지난 10년간 독일은 전력 소비 증가율이 5%에 그쳤고 같은 기간 재생에너지 비중은 세 배로 증가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한국의 전력 소비는 급증한데 비해 재생에너지 비중(2.8%; OECD 평균은 12.8%)은 크게 늘지 않았습니다. 에너지 낭비를 불이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핵발전소 증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에 힘이 실릴 것입니다.


탈핵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 핵발전의 위험을 자각한 이들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돌들이 일어나 외치면 정치인들도 깨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탈핵 정강정책을 가진 정당이 늘어나야 하고, 그들을 돕는 이들도 늘어나야 합니다. YWCA가 이런 주제를 잡았다는 사실 자체가 참 고무적입니다. 신앙인들은 경제논리나 강자들의 논리로 세상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척도로 삼아야 합니다. 창세기 첫 머리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의 심연을 꿰뚫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유야말로 아름다운 관계맺음의 전제입니다. 자유가 없다면 진실한 사랑도 불가능합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것은 그를 귀한 존재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 한계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셨습니다(선악과). 할 수 있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일 말입니다. 그것이 사람다움의 보루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너희가 신처럼 되리라'는 뱀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자기 한계를 지키려 하지 않음이 죄이고 타락입니다. 오늘의 과학 기술은 금지된 선악과를 따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전공학의 발전이나 핵과학의 발전 등이 특히 그러합니다. 현대인들에게 과학 기술은 은연 중에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과학적'이라는 말은 일종의 권력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과학기술의 오남용입니다. 칼을 뺀 자는 무엇이라도 찔러 보고 싶어한다지요? 사람들은 그것이 설사 해로운 것으로 판명난다 해도 일단 획득한 지식과 기술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날로 첨단화되는 무기를 생각해보면 되겠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증대될수록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일'에 경고의 나팔소리가 울려야 합니다. 그것이 종교의 역할입니다.


생명을 택하는 용기

요한계시록 9장은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아비소스를 여는 열쇠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땅에 떨어진 별'은 물론 후기 유대교에서 타락한 천사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입니다. 아비소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곧 혼돈의 세계입니다. 땅에 떨어진 별이 아비소스의 문을 열자 그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해와 하늘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메뚜기들이 쏟아져 나와 땅에 퍼졌습니다. 메뚜기 떼는 풀이나 푸성귀나 나무는 놔두고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만 해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메뚜기들이 활동하는 기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다섯 달입니다. 


너무 즉물적 상상력이라 하실지 모르겠지만 아비소스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생각하는 데 문득 스멀스멀 퍼져나가 사람들을 황폐하게 만드는 방사능이 연상되었습니다. 무색무취하지만 치명적인 방사능이 지금 대기 중에 퍼지고 있고, 그 결과는 메뚜기떼의 습격보다 무섭습니다. 메뚜기들의 활동 기간은 다섯 달로 한정되었지만 방사능의 폐해는 거의 무한정합니다. 어쩌면 미래 세대는 우리 시대를 '무분별한 탐욕으로 지구 멸절을 초래한 세대'로 기록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이제 확고하게 하나님의 세계를 파괴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혼돈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세계에 멈춤 신호를 보내야 합니다. '더 많이, 더 편리하게'라는 소비사회의 구호에 현혹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덜 소비하면서도, 더 많이 기뻐할 수 있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창조 때 극복된 혼돈이 언제든 돌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그 예입니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혼돈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유대교 랍비들은 성전이 있는 시온산은 혼돈의 물을 덮고 있는 덮개(capstone)라고 가르쳤습니다. 성전이 태곳적 혼돈의 세력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에 창조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이 [성전의] 토대를 닦기 위해 땅을 파 들어갔을 때, 심연의 물[‘테호마’]은 땅으로 올라와 세상을 삼켜 버리려 하였다. 그때 다윗은 열다섯 개의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를[시120-135편] 불러 그들을 잠재웠다."(존 D. 레벤슨, <시내산과 시온>, 홍국평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155쪽)신화적인 이야기이지만 저는 가슴 찡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혼돈의 물, 아비소스의 문을 억제하는 덮개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노래가 넘치는 세상을 이길 힘은 생명을 노래하는 이들로부터 나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제 새로운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덜 소유하고 덜 쓰면서도 행복한 삶 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아비소스의 문을 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새로운 시작을 격려해 주실 것입니다. 후쿠시마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고 싶었던 오가와 테츠시의 소박한 꿈은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꿈입니다.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비소스의 문을 닫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가 말하듯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생명을 택해야 합니다(신30:19-20). 이 거룩한 일에 기쁨으로 동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문헌)


야마모토 요시타카, <후쿠시마 일본 핵발전의 진실>, 동아시아

장윤재,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신학'을 향하여", 신학사상 159호, (2012년 겨울)

조현철, "후쿠시마, 그 이후: 핵발전에 대한 신학적 성찰", 신학전망 180호, (2013년 봄)

김현우, "탈핵의 이론과 현실", 문화과학 70호, (2012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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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남(14 02-07 09:02)
불안하고 힘든 처지에있는 자신을, 극복하려는 "힘" 을 내기에만 급급했든 자신을 반성합니다 ,더 넓은폭으로 세상을 보고, 배우고,행동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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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회순(14 02-19 09:02)
자유야말로 아름다운 관계맺음의 전제입니다.
자유가 없다면 진실한 사랑도 불가능합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것은 그를 귀한 존재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 한계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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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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