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국민이 행복한 나라 2014년 01월 27일
작성자 김기석

 국민이 행복한 나라


어두운 대지에 그루박힌 채 스러져가던 희망을 애써 소환한다. 새해 아닌가? 하지만 새해 덕담을 나누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미사일과 박격포로 신년인사를 나눴고, 남수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테러와 폭력이 세상의 현실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새해가 되어도 새 세상의 동살이 잡히지 않는다. 세계-내-존재인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


며칠 전 청와대에서는 입법·사법·행정부의 주요 공직자들이 참석한 정부 신년 인사회가 열렸다. 새해 덕담을 나누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일년을 돌아보며 국정운영은 2인3각 혹은 3인4각 경주와 같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당연한 말이다. 마음이 급하다고 혼자 내달리다보면 결국은 함께 넘어질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말이 자신의 정책에 협력하지 않는 세력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국정운영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신년 인사회의 주제는 '희망과 변화로 국민이 행복한 나라'였다고 한다. 그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어떤 희망을, 그리고 어떤 변화를 그리고 있을까 궁금하다. 또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는 것일까? 이런 외람된 질문을 던지는 까닭은 오랫동안 정치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뿌리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소득과 같이 숫자로 환원된 희망이나 특정한 계층에게만 희망이고 다른 이들에게는 절망인 그런 희망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인 세상을 그들은 정말 꿈꾸는 것일까?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는 이들은 많지만, 정작 변화되어야 하는 대상 중에 자기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미성숙이다. 자기 선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순간 두 진영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변화라는 말 속에 상대를 굴복시키겠다는 속뜻이 숨겨져 있지 않은지 되짚어볼 일이다.


희망과 변화의 지향점은 '국민이 행복한 나라'이다. 문제는 '국민'으로 지칭되고 있는 대상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이다. '이대로'를 외치며 현상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이들인지, 아니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하는 이들인지가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편을 가르자는 말이 아니다. 세상의 어떤 선택도 불편부당할 수는 없다. 선택은 가급적 공평해야 하지만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편에 서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예수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남겨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효율을 따지는 이들에게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하나를 애타게 찾는 목자의 마음은 나머지 모든 양들에게도 하나의 표징일 수 있다. '아, 내가 언젠가 길을 잃더라도 목자는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겠구나!' 이런 믿음이야말로 신뢰 사회의 토대이다.


국민이 행복한 나라는 어떤 것일까? 불평등이 차츰 해소되는 나라, 사회적 약자들이 잉여 인간 취급을 받지 않는 나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적인 이익을 기꺼이 유보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나라, 사람들이 지역·계층·성·종교·취향의 차이를 넘어 서로 환대할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이 확보되는 나라가 아닐까? 유대교 철학자인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1963년 6월 16일에  흑백 인종 차별 문제로 내홍을 겪고 있던 미국 사회를 정화해야 할 역사적 책임을 지고 있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흑인들을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할 자격을 잃는 것이라면서, 지금은 도덕적 비상사태를 선언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영적인 담대함(spiritual audacity)을 요구했다. '희망과 변화로 국민이 행복한 나라'라는 꿈이 헛꿈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절망의 벽을 넘는 담쟁이의 마음을 가진 이들이 나타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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