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18 2014년 01월 01일
작성자 김기석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여 있다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으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아냈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15:18-19)


세상은 예수의 제자를 미워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둠은 빛을 싫어한다. 아니, 싫어한다기보다는 두려워한다. 빛은 어둠을 어둠으로 폭로하기 때문이다. 어둠은 스스로 빛으로 가장하며 살기에 진짜 빛을 견디지 못한다. 문제는 소속이다. 그 어둠의 세상에 속한 자로 살아간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세상은 자기 자식을 사랑으로 대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떤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고백하고 주일이면 착실하게 교회에 가는 데도 세상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가끔 조롱하기는 해도 박해하지는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세상은 우리가 예수의 사람들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자기들에게 속해 있음을 용케도 알아본다. 어둠을 어둠으로 폭로하지 않을 뿐더러 스스로 어둠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말하며 우리는 자신의 비겁과 불의와 탐욕에 대해 스스로 면죄부를 발행한다. 산다는 일의 무거움과 그 무거움에서 비롯된 상처를 내보이며 '힐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둠은 자기 상처를 들여다보고 있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아냈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은 회초리가 되어 우리 종아리를 치고 있다. 돈과 명예와 권세에 맛 들여 세상과 대결하지 않는 교회는 박해 받지 않는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를 넘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네가 하는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므로 그런 일들을 할 것이다."(16:1-3)


예수님은 대책없이 정직하다. 달콤한 말로 어르고 달래도 추종자를 얻기 어려운 판에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평안과 행복이 아니라 박해와 고통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설사 진실이라 해도 굳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예기치 않은 일을 겪을 때 사람들은 한 순간에 꺾일 수 있다. 그러나 두렵더라도 미구에 닥쳐올지도 모를 일을 내다보며 그 현실과 자꾸 맞대면하다보면 그 일의 규정력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불세출의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는 조지 포먼이라는 강자와의 대결을 앞두고 불안했다. 포먼의 묵직한 주먹은 공포 그 자체였다. 시합 전날 저녁 알리는 경기가 열리는 체육관에 들어가 링 위에 섰다. 그리고 내일 벌어질 경기를 머리에 그려 보았다. 상대방의 주먹을 맞고 쓰러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링 바닥에 한 동안 누워있었다. 그리고는 일어나 쉐도 복싱을 했다. 미리 그런 상황을 경험해보니 마음이 고요해졌다. 다음 날 그는 상대를 압도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준비시킨다. 박해의 현실을 현실로 수용할 수 있는 견결함을 가지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회당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상황을 예시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주후 70년 성전이 무너진 후 회당이 유다인들의 종교생활의 중심지가 되었을 때,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다. 회당 공동체에서 축출된다는 것은 유대의 사회적 세계에서 외부자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외부자들은 언제나 폭력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박해자들이 자기들이 하는 일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바른 인식과 결합되지 않은 종교적 열정은 파괴적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신념과 지식을 혼동한다. 자기들이 절대적 확실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에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믿는 이들을 견디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는 폭력과 손을 잡는다. 세상의 모든 근본주의는 다 위험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므로, 그런 일들을 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은 안타깝게도 그들의 가슴에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폐쇄적인 자기 확신은 누구도 통과할 수 없는 장벽이기 때문이다. 그 장벽이 영혼의 감옥이라는 사실은 당사자만 모른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16:7)


예수님은 이제 보내신 분에게로 갈 때가 되었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혼돈 가운데 있다. 박해와 수난에 대한 이야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떠나가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신다. 스승이 곁에 있는 한 그들은 자기 삶의 주체로 서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신앙을 '절대적 의존의 감정'이라고 말한 신학자가 있다. 그것은 종교 체험의 깊이를 맛본 이의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믿는다는 것은 그저 의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은 우리를 당당한 주체로 세운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에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스승의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은 보혜사이다.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다가오셔서 우리의 공허한 가슴에 하늘 숨결을 불어넣는 이 말이다.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죄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 의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 이상 못 볼 것이기 때문이요, 심판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16:8-11)


보혜사가 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깨우쳐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흔히 죄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저지르는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죄는 불신앙에 있다. 불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의존하려는 영혼의 완고함이다. 불안이라는 숙명을 타고난 인간은 뭔가 확실한 것을 붙들고 싶어한다. 모세가 산에 있는 동안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며 아론을 압박했다. 죄는 우상 없이 불확실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허약함과 무관하지 않다. 의는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란 '미래에 대한 기억'이다. 세상은 빛으로 오신 분을 쫓아냈지만 어둠은 빛을 결코 이길 수 없다. 빛을 몰아내려 함으로써 세상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만 제대로 알아도 우리 삶은 든든해진다.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16:12, 16) 


아무리 급해도 실을 바늘에 매서 쓸 수는 없는 법이다. 벼의 생장을 돕는다고 벼를 조금씩 잡아뽑았던(拔苗助長) 어리석은 송나라 사람처럼 해서는 안 된다. 진리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닥쳐올 현실에 대해 어섯눈조차 뜨지 못한 제자들이 안타깝지만 예수는 그들의 때를 앞당기기 위해 무리하지 않는다. 다만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눈을 가리던 것이 벗겨지면 그 때야 비로소 수난의 길이 곧 영광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제자들에게 슬며시 드러낸다. '그러나'로 연결되고 있는 대구, 즉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게 되고'와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라는 말은 신앙적 역설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는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위치한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의 가슴에 샛별이 떠오르기까지는 더 깊은 어둠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근심에 싸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16:20)


'너희'와 '세상'이 대조되고 있다. 한쪽에는 울음과 근심이 있고 다른 쪽에는 기쁨이 있다. 하지만 여기도 역시 '그러나'를 통해 역전이 일어난다. 빛에 속한 이들이 겪어야 할 근심 속에는 이미 기쁨이 잉태되어 있다. 그 기쁨과 만나기 위해서는 근심과 울음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한다. 그 때 세상은 기뻐하겠지만, 하늘에 계신 분은 웃고 계실 것이다(시2:4).

제자들의 근심이 기쁨으로 변하는 날은 해산의 날이다.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은 후 고통을 잊는 것처럼 제자들이 맛볼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다. 세상의 풍랑에 따라 속절없이 흔들리다가 마침내 중심을 얻은 이의 기쁨을 누가 빼앗아 갈 수 있겠는가. 부활 체험은 하나님이라는 중심과의 일치이고 일어섬이다. 시인 김수영이 말대로 우리 속에 '거대한 뿌리'가 생기면 누가 우리를 흔들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16:24)


예수님은 무엇이든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면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과 깊은 일치를 이룬 이들이 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은 무능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만 감당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자꾸 구해야 한다. 구하지 않기에 받지 못한다. 그런데 이 말을 사적인 욕망 충족으로 환원시키는 이들이 너무 많다.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이루지 못한 채 욕망의 바람이 부는대로 나부끼는 인생의 천박함이여!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세상에 왔다. 나는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간다."(16:28)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헤겔은 역사를 하나님의 자기 소외라 했다. 역사는 절대 정신으로부터 나와 절대 정신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죽음을 극복되어야 할 한계 혹은 저주로 보지 않는다. 보내신 분에게로의 돌아감으로 본다. 그렇다고 하여 예수가 직면하게 될 폭력적인 죽음을 미화하자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소명으로 이해한 이들은 소명을 주신 분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그의 제자들이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제 밝히어 말씀하여 주시고, 비유로 말씀하지 않으시니, 이제야 우리는 선생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과, 누가 선생님께 물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환히 알려 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믿습니다."(16:29-30)

 

제자들은 이제 비로소 스승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연상시키는 고백을 한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믿습니다." 아직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제자들은 참된 인식의 문 앞에 이르렀다. 하지만 제자들은 불과 물을 통과하지 못한 신앙고백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참된 인식은 수많은 억견(臆見)들이 무너진 후에야 다가온다. 마치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이 어둔 후에야 날아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보아라,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 두고, 제각기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벌써 왔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2-33) 

 

제자들의 고백처럼 예수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미구에 닥쳐올 일을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환히 보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 두고, 제각기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처럼, 물 위를 떠다니는 부평초처럼 부유하는 마음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주님은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그렇기에 '혼자'라는 단어와 '제각기'라는 단어를 발설하며 느꼈을 예수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더욱 짙게 느껴진다. 어쩌면 십자가의 길은 누구와 함께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닐 것이다. 홀로 감당해야 한다.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까닭은 제자들에게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연약함을 다 받아안으셨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살지 말고,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서라는 초대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아버지는 아들의 고통을 면하게 해주는 분이 아니라 고통의 시간을 함께 겪어내는 분이시다. 가장 외로운 시간이야말로 어쩌면 아버지와 가장 깊이 결속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신다'는 말은 예수와 하나님의 특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이들 모두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그리고 마침내 저 장엄한 고백이 나온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 한 마디를 할 수 있기까지 가야 할 길이 참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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