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출애굽기 공부1 2014년 01월 01일
작성자 김기석

 하나님을 경외하는 용기

본문 / 출1:1-22


출애굽 사건은 부활 사건과 더불어 성경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자유의 확대과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거대한 제국이 지배하는 엄혹한 세상 한 복판에서 움터나온 역사의 새싹입니다. 출애굽기는 애굽과 바로로 상징되는 세상의 모든 억압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분노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무력한 자들을 보호하고 해방의 길로 이끌기 위해 역사에 개입하셨다는 사실은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의 긴 여정을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억압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책은 장엄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겨울 보리처럼

요셉이 세상을 떠난 후 야곱의 일가족들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불안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수가 늘어나고 번성하자 애굽 당국은 그들을 사회 불안을 야기할 수도 있는 세력으로 불온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애굽 사회에 동화되지 않은 그들이 전쟁시기에 적에게 가담할 우려가 있다면서, 그들을 감시하고 또 억압하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는 일에 동원한 것이지요. 그런데 야곱의 자손들은 줄어들거나 의기소침해지기는커녕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1:12) 나갔습니다. 마치 짓밟힐수록 더욱 튼실하게 자라는 겨울보리처럼 말입니다.


밟아도 밟아도 고개를 드는 이들을 제어하기 위해 애굽의 고관들은 그들의 일의 강도를 높였습니다. 이제나그제나 억압자들의 상상력이란 고작 이 정도입니다. 흙 이기기, 벽돌 굽기, 농사의 여러 가지 일 등 중노동이었습니다. 우리가 잠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애굽 왕은 야곱의 자손들이 체제에 위협을 가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잠재적인 위험인물로 분류하고 억압하고 있습니다. 마치 가상 적들에 대한 예방 전쟁을 승인하는 어떤 나라와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적으로 만들고, 그들을 제거하는 것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행동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입니다.


왕의 법이냐, 하나님의 법이냐? 

불안해진 애굽 왕은 점진적인 인종 말살 계획을 수립합니다. 그는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불러 지엄하게 이릅니다.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1:16)는 것입니다. 바로는 제국의 맨 얼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에게는 큰 일이 아닙니다. 물론 명분은 '제국의 안위를 위하여'입니다. 애굽 왕의 명령은 제국주의 하에서 생명이 얼마나 큰 위기에 처해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제 히브리인의 운명은 경각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눈부신 반전을 보여줍니다.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렸다는 것입니다. 왕의 법과 하나님의 법이 대립할 때 산파들은 단호하게 하나님의 법을 붙잡았습니다. 마치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가 반역자들의 시신을 매장하지 말라는 크레온 왕의 포고령을 무시하고 오빠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한 것과 같습니다. 안티고네는 왕의 법보다 하늘의 법을 따르는 길을 택했고, 그 때문에 죽음의 자리에 내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의 서장에서 겨우 이름으로만 알려진 두 산파 십브라와 부아가 보여준 용기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두 여인은 인간성에 반하는 죄악을 거절한 이들로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두 여인을 가리켜 세계 최초의 '시민 불복종 운동가'라고 말하기도 하는 데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왕의 소환을 받아 왕 앞에 섰을 때 두 여인은 두렵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들은 당당합니다. 왜 지시를 수행하지 않았느냐는 왕의 지엄한 채근을 받지만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강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1:19)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이 말 속에 담겨 있는 이중적 의미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억압받는 이들이 오히려 강인하다는 표면적 메시지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이면적 메시지 말입니다.


1장은 간결하지만 매우 강력한 메시지로 이야기를 마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 '왕의 부당한 명령에 대한 거절', 그리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이 셋의 긴밀한 연관이야말로 어쩌면 억압의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삶의 비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 여인

본문 / 출2:1-10


히브리인들에게는 가혹한 시절이었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갓 태어나는 히브리 사내 아이는 죽음의 위협에 처해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 위해 세상의 법을 기꺼이 위반하려다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는 반면, 세상의 법을 관료적 엄격함으로 수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일이 옳은가를 성찰적으로 묻지 않습니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동원된 사람들은 어찌 보면 우리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행복을 구하는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악은 특별한 사람만이 저지르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역설했습니다. 관료적 엄격함으로 악한 일을 수행하는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무사유'입니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지만, 이 말은 더 나아가서 다른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려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점점 위험한 곳으로 변해갑니다.


불인지심

출애굽기 2장의 전반부에는 세 사람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레위인 가족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아기의 운명은 풍전등화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2:2)라고 말합니다. '잘 생겼다'는 말은 그 아기의 외모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지만, 아기에게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선택된 말일 겁니다. 우리 설화에도 권세자들로부터 민중들을 구하기 위해 나타나는 '아기 장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면 날개 달린 백마도 함께 등장한다고 하지요? 모세는 아마도 그런 느낌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모는 아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아기를 숨길 수 없음을 알게 되자 그들은 갈대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담아 강 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천운에 맡긴 거지요. 아이의 누이는 먼 발치에서 그 갈대상자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로의 딸이 시녀들과 함께 강 가로 나왔다가 그 상자를 발견합니다. 공주는 울고 있는 그 아이가 히브리 사람의 아기인 것을 즉각 알아차립니다. 하지만 공주는 그 아이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솟구쳐 차마 그를 다시 강물에 던지지 못합니다.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야말로 사람다운 마음입니다. 옛 사람들은 이것을 '불인지심不忍之心'이라 일렀습니다.


그때 아기의 누이가 등장하여 말합니다.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2:7) 공주의 허락을 받은 누이는 아기의 친 어머니를 불러 아기의 유모가 되게 합니다. 기가 막힌 역설입니다. 친 어머니가 유모가 되고, 멸절의 대상인 아이가 공주의 보호를 받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건져낸 사람' 모세는 이렇게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안전한 곳에서 해방자로 키워지고 있었습니다


생명 중심의 사고

'제국의 안전을 위하여' 언제든 위협요소로 변할 수도 있는 이들을 제거하려는 바로의 계획은 이미 버림받은 생명을 차마 또 버릴 수 없어 거두어들이는 바로의 딸에 의해 차질을 빚게 됩니다. 아이의 생명을 어떻게든 살리려는 아기의 누이와 어머니, 그리고 바로의 딸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출애굽의 영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여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생명 중심의 사고'일 것입니다. 그 세 여인의 나이, 지위, 문화의 차이는 뚜렷합니다. 하지만 그런 차이에 다리를 놓아준 것은 보편적 인간성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물론 신학적, 인간학적, 역사적 의미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이란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려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여기 등장하는 세 여인은 세상의 어떠한 전제 정치라 해도 파괴할 수 없는 인간성이 있다는 사실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극심한 어둠 속에서도 도덕적 용기를 발휘하는 이들이 있는 한 우리는 절망의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소비사회가 도래하면서 사람들은 '생명 중심'의 사고를 하기보다는 '돈' 중심의 사고를 하며 삽니다. 돈을 중심으로 모든 생각과 제도가 재배치된 세상은 위험사회입니다. 액체처럼 유동하는 공포가 스멀스멀 우리 사이를 배회합니다. 효율과 속도가 새로운 신이 되어 숭배할 것을 요구할 때, 사람다움을 잃지 않는 이들이 등장해야 합니다. 그들이야말로 겨울 세상에 봄 소식을 가져오는 제비가 될 것입니다.

























광야로 내몰리다

본문 / 출2:11-25


건져냄을 받은 사람 모세, 그는 바로의 딸에게 입양되어 애굽의 왕족들이 받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한동안 유모 역할을 했던 친어머니는 그에게 히브리적 정서를 심어주려고 노력했을 겁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한 평생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월적 지위를 누리며 살면서도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그에게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일 겁니다. 


운명의 실을 잣다

어느 날 모세는 히브리인들이 노동하는 현장에 나갑니다. 성경은 이 대목에서 모세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갔다(2:11)고 말합니다. 히브리인들이 그에게는 결코 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고된 노동의 현장은 그리 낭만적인 곳은 아닙니다. 자발적인 노동, 창조적인 노동의 현장이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요. 스스로 일의 의미를 체화하지 못한 채 강요에 따라 수행해야 하는 일은 노예 노동입니다. 노예 노동의 특색은 자기 결정권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유형지에서 보냈던 경험을 보고한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도록 하는 것보다 사람을 황폐하게 하는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어떤 일이 의미가 있다고 느끼면 몸이 고단해도 견딜 수 있습니다. 의미가 제공해주는 내적 에너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노예 노동의 현장, 그곳에는 죽지 못해 일하는 이가 있고, 그들을 감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두 부류 사이에는 인간적인 유대감이 생기기 어렵습니다. 시키는 자와 수행하는 자 사이의 긴장만 있게 마련입니다. 모세는 그 노동의 현장에서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보고 격분합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그는 사태에 개입했고,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애굽 사람을 죽여 모래 속에 숨겼습니다. 나중에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는 평을 받습니다만 젊은 날의 모세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는 사람이었습니다. 이튿날에도 그는 노동의 현장에 나갔고, 두 히브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는 왜 동포끼리 싸우느냐며 한 사람을 꾸짖습니다. 그러자 그가 어제 있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14a) 예기치 않게 발설된 말이지만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모세의 운명을 정확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세우려는 용기

이 일로 모세는 바로의 의심을 사게 되었고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맙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숨어듭니다. 여전히 애굽의 세력권이지만 그곳은 인적이 드문 곳이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의 어느 우물 곁에서 그는 또 다른 갈등상황을 목격합니다.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이 그곳에 이르러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양떼에게 먹이려 할 때, 뒤늦게 그곳에 당도한 목자들이 그 여인들을 쫓아내려 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도망자 신세라는 사실도 잊은 채 그 일에 개입합니다. '정의를 세우려는 용기'야말로 모세라는 인물의 특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불의한 일을 보고도 그 일에 개입하려 하지 않습니다. 연루되기를 꺼리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불의가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이들의 침묵이라지요? 모세는 위험을 무릅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아 투박하지만, 그래서 일을 세련되게 처리할 줄 모르지만, 약자들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이야말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이들의 기본적인 특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모세는 제사장 르우엘('하나님의 친구'라는 뜻,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이드로'라고도 소개됨)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르우엘은 모세를 자기 딸 십보라와 부부로 맺어주기도 합니다. 아들이 태어나자 모세는 아이 이름을 '게르솜'이라 짓습니다. '게르ger'라는 단어는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 '손님' 혹은 '나그네'라는 뜻이니까, 게르솜이라는 이름 속에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모세의 쓸쓸함이 묻어 있다 하겠습니다. 모세는 이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저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경계인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관습의 지배를 덜 받습니다. 세상의 창의적인 사유가 경계인들을 통해 나타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모세가 경계인으로서 머무는 동안도 세상은 빠르게 변화되고 있었습니다. 애굽 왕은 죽었고, 고역에 시달리는 히브리인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습니다. 땅에서 솟아오르는 신음소리가 하늘의 개입을 부른다는 성서신학의 중요 명제가 이곳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기억하셨다"는 표현은 단순하지만, 그 기억은 사건을 일으키는 기억입니다. 역사의 희망은 기억하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불붙는 떨기나무

본문 / 출3:1-10


살다보면 평온한 일상을 꿰뚫고 들어와 삶의 방향을 완전히 되돌려 놓는 순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기치 않았지만, 삶의 토대 전체를 뒤흔들어놓는 일 말입니다. 1970년대 초 전태일 분신사건에 접한 일군의 신학자들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신학을 전개할 수 없다는 충격에 빠졌고, 그로부터 새로운 신학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어쩌면 모든 진정한 만남은 사건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만나면 나의 변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지요.


떨기나무

양떼를 몰고 미디안 광야 서쪽으로 천천히 이동하던 모세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호렙은 '황량한 곳, 불모지'를 뜻합니다. 호렙은 어쩌면 특정한 장소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곤고한 우리 삶의 정황을 이르는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모세는 문득 낯선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그 가지가 스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거야 건조한 광야에서 더러 나타나는 현상이니 특별할 것도 없지만, 어지간히 시간이 지났는 데도 그 나무가 여전히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그 나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갑니다. 그 때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모세야, 모세야". 반복된 이 부름은 부름의 긴박성을 나타냅니다. 비상한 상황임을 직감한 모세에게 하나님의 금지명령이 내립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3:5)


모세가 선 곳이 거룩한 땅인 까닭은 그곳이 하나님이 현현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뜬 사람에게는 거룩하지 않는 땅이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상 시인은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을 뜨니 시들하던 만물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더라고 노래했습니다. 관건은 눈뜸입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는 신을 벗어야 합니다. 신은 어쩌면 불안한 삶을 달래기 위해 우리가 집착하는 일체의 것들을 지칭하는 은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대교 전설에 의하면 느부갓네살 임금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 드리려 하자, 천사가 나타나 그의 머리를 때립니다. 항의하는 왕에게 천사가 말합니다. "네가 왕관을 쓰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이냐?" 왕관도 벗어야 할 신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떨기나무는 히브리어로 '스네seneh'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보잘 것 없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떨기나무는 그늘을 드리워 지친 사람과 짐승을 품지도 못하고 목재로 쓸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스네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도 가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셨다는 말은 세상에서 천대받는 이들 속에 임재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역사의 주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입장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을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찾아오셔서 그들을 강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빛나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불붙은 떨기나무라는 상징이 담고 있는 강력한 메시지가 아닐까요?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3:6)이라고 당신을 소개하십니다. 유랑하는 이들과 동행하시고, 후손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을 때 자녀를 보내주시고, 땅을 약속하심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게 하셨던 하나님이 지금 모세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사회적 불의에 민감하신 분이시고, 약자들의 살 권리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역사 속에 기꺼이 개입하시려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3:7)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듣고',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늘 위에서 홀로 자족하시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행동을 개시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8절에 나오는 '내가'라는 주어에 이어지는 일련의 동사들은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려가서', '인도하여' '데려 가겠다'.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기득권자들의 편에 서서 제물이나 받으며 자족하는 이방의 신들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로잡기 위해 직접 역사의 현장에 뛰어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홀로 그 일을 수행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조력자들을 세워 그들과 함께 해방의 사역을 완수하려 하십니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우리 없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역사를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은총이 또 있을까요?























나는 나다

본문 / 출3:11-22


예기치 않은 시간, 뜻밖의 장소야말로 새로운 삶의 문지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황무한 땅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특별한 장소에 머물면서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인간의 시간 속에 돌입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신 것은 그의 울울한 심사를 위로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역사를 갱신하려는 당신의 뜻을 드러내고, 그 위대한 사역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

느닷없는 부름은 당혹감을 일으킵니다. 그것은 일상을 파탄내고, 불확실한 삶으로 우리를 내몰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일 때 누구나 모세처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3:11). '내가 아니면 누가?'가 아닙니다. '내가 누구이기에'입니다. 소명 앞에 선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부족함을 먼저 살피게 마련입니다. 그는 자신이 부적격자임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변명에 부름을 철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3:12)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소명의 성취는 보냄을 받은 자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의지에 속하는 것입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일평생 많은 책을 읽었지만 언제든 자기 삶을 든든히 세워주었던 것은 네 마디의 말이었다고 말합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Du bist bei mir'.


동행에 대한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망설입니다. 예기되는 여러가지 상황이 머리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동족들이 그의 말을 신뢰할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신들에 대한 통칭으로 흔히 사용되던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말로는 그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에둘러 말하고 있지만 모세는 어떻게든 그 소명을 거절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간결하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매우 존재론적인 진술입니다. 철학적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사실은 '나는 나라고 하는 나다'라는 뜻입니다. 가만히 보면 주어에 대해 술어가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이 대목을 하나님의 자기 완결성에 대한 진술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나다' 혹은 '나는 나라고 하는 나다'라는 말은 대답인 동시에 대답의 거절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인간의 술어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임을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건으로 계시되는 분이기에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오롯이 파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지향하는 바는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의 하나님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해야 할 말을 일러주십니다. 그 내용은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애굽에서 겪고 있는 일을 하나님이 보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실 계획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셨다'는 말은 단순히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사건을 예기하는 진술입니다. 그 사건이 바로 고난받는 이들을 이끌어내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갈릴리 지역이나 일부 해안 지역을 빼고는 팔레스타인 땅이 매우 척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표현하는 것은 과장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그들을 달콤한 말로 꾀어내시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억압과 학대 속에 살아본 이들은 압니다. 자기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삶,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을 갖지 못하고 사는 삶은 삶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사는 곳을 이르는 말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이제 구체적으로 모세가 해야 할 일을 일러주십니다. 백성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을 찾아가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3:18)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이 자신을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라는 단어는 특정한 민족을 지칭하는 말이라기보다는 고대 중근동 지역을 떠돌던 날품팔이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 밑바닥 계층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이 깊이 관심을 갖고 계신 이들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아,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언제든 동원될 수 있고, 또 언제든 제거될 수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을 자처하고 계십니다.

























소명 앞에서 주저하다

본문 / 출4:1-17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부르심(召)은 곧 그가 완수해야 할 일(命)과 연동됩니다. 명이란 한자어는 지붕 아래에서 무릎을 꿇은 채 지시를 경청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해방이라는 대업을 계획하셨고, 주님의 몸이 되어 그 일을 수행할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역사의 호출이든 하나님의 부르심이든 소명에 응답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평온했던 일상과 작별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던 아브람의 경우와도 같습니다.


자기의 부적격함을 말하다

모세는 주저합니다. 백성들이 그를 믿지 않을 것이며 호의적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낯선 야훼라는 신의 현현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동족들에게 배척받았던 그 쓰라린 기억에서 모세는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자꾸 직면하여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쓰라린 기억은 올무가 되어 사람을 부자유하게 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주저하는 모세에게 당신이 동행하신다는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모세로 하여금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던지게 하시고는 그것이 뱀이 되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뱀의 꼬리를 잡자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의 기적은 비일상적인 것이었기에 신적 능력으로 간주되곤 했습니다. 모세의 이 지팡이는 출애굽 이야기의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여전히 결단을 하지 못하고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빼보라 하십니다. 그러자 그의 손에 나병(실은 일반적 피부병을 뜻하는 보통명사가 사용되었습니다)이 생겼습니다. 모세가 손을 다시 품에 넣었다 빼자 본래의 모습대로 회복되었습니다. 이 표징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이들에게 닥쳐올 일에 대한 상징인 동시에 소명 받들기를 거절하는 모세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이 두 이적조차 믿지 않거든 나일 강 물을 떠다가 땅에 부으면 그게 피로 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애굽 땅에 내린 첫 번째 재앙을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십시오. '뱀, 나병, 피'는 사람들을 본능적으로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하고많은 것들 가운데 하필이면 왜 이런 것들을 보여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역사의 변화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과의 대면을 피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임을 암시하려는 것일까요? 거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야 하겠습니다. 그런 꺼림직하고 부정적인 현실조차도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 있음을 하나님은 넌지시 보여주고 계십니다.


동행을 주시다

모세는 여전히 결단을 미룹니다. 좋게 말하면 진중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우유부단합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대의를 수행하기에 부적격자임을 입증하기 위해 자기의 부족한 부분을 고백합니다. 자기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 하는 자',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고 말합니다. 백성을 설득하고 바로와 담판을 지으려면 말이 유창해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4:12) 일찍이 모세와의 동행을 약속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그의 '입과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떠난 후 제자들에게 닥쳐올 고난을 예고하면서 관원들에게 잡혀가더라도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막13:11)고 하셨습니다. 말하는 이는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어눌함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충실하게 그분의 입이 되는지 여부입니다.


이쯤 되면 소명을 받들만도 한데 모세는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하고 탄원합니다. 마침내 하나님도 역정을 내십니다.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신"(시145:8) 하나님께 익숙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분노 혹은 역정은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하지만 신앙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분노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이나 기대가 없다면 분노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사랑의 반증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역정을 내시면서도 그의 불안한 마음을 해량하시어 그의 입이 되어줄 사람을 보내십니다. 모세의 형 아론입니다.


모세의 거듭된 소명 거부 이야기는 그의 우유부단함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은 영웅적 인물인 모세의 강철같은 의지가 아니라 계층 질서의 밑바닥에 속한 사람들에게 사람답게 살 권리를 회복시켜주려는 하나님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도한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기의 부족함을 아는 이들을 세워 당신의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백성 앞에 서다

본문 / 출4:18-31


마침내 모세는 하나님의 의지를 받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기꺼이 혹은 들뜬 마음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 못해' 동참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뜻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 삶의 주도권을 주님께 넘겨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부정의 길이고 희생의 길입니다. 그렇기에 소명을 받드는 일은 거룩합니다. 


지팡이를 들고 가다

모세는 집으로 돌아가 장인 이드로에게 애굽에 있는 형제들이 걱정되어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이드로는 어쩌면 모세에게 일어난 변화의 사건을 예민하게 알아차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드로는 즉시 '평안히 가라'고 축복합니다. '가겠다'는 선언과 '가라'는 허락 사이의 이 긴밀한 연결은 모세에 대한 이드로의 깊은 신뢰를 보여줍니다. 야곱과 그의 외삼촌 라반이 빚었던 불화와 갈등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우리에게 이 둘 사이의 관계는 건강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모세는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의 귀향을 시작합니다. 그의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습니다. 이전부터 들고 다니던 지팡이이지만, 그 지팡이는 이제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상기시키는 상징물이었습니다.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권능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가시적으로 매개하는 상징물이기에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의 지팡이'(4:20)라 이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바로 앞에서 해야 할 말과 행해야 할 일을 상세히 알려주십니다. 해야 할 말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장자로 여기신다는 것, 따라서 그들을 해방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올릴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이적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쉽게 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아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바로에게 죄를 물을 수 없습니다.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는 마음을 닫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자기 존재의 바닥에 이르기까지는 돌이키지 못하는 권력자들의 실상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옛 사람은 부드러운 것은 생명의 친구이고 딱딱한 것은 죽음의 친구라 했습니다. 굳어진 마음은 새로운 것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지도 못하는 마음입니다. 굳은 마음으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도 없고, 다른 이들에게 공감할 수도 없습니다. 왜 마음을 열지 못할까요? 두려움 때문이거나, 뭔가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트레바리가 심한 사람들일수록 내면이 부실하거나 허약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죽음을 겪다

감당하기 어려운 사명을 띠고 애굽을 향하는 모세의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예기되는 어려움으로 인해 그의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는 이상한 경험을 합니다. 모세가 숙소에 머물고 있을 때 갑자기 하나님이 그를 죽이려 하셨습니다(4:24).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스로 오랜 설득 과정을 거쳐 이스라엘의 해방이라는 대의에 헌신하도록 한 모세를 죽이려 하시다니요? 하나님의 낯선 얼굴 앞에 선 사람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때 우리 실존에는 깊은 어둠이 드리웁니다. 16세기의 영성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것을 일러 '어둔 밤'의 체험이라 했습니다. 그는 영혼은 어둔 밤을 거쳐 밝음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에 대해 죽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려던 것일까요?


그 깊은 고독과 두려움의 순간 십보라가 모세를 도와줍니다. 십보라는 돌칼을 가져다가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4:25) 하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피가 등장합니다. 피는 곧 생명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이 대목의 핵심은 역시 할례에 있습니다. 할례는 나중에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징이었습니다. 바로가 지배하는 애굽 땅에 들어가기 전 모세 일가족은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확인했던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낯선 얼굴과 대면했던 모세는 마침내 하나님의 산에서 형 아론과 만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말씀과 보여주신 이적을 아론에게 다 고합니다. 동일한 과정이 이스라엘 장로들 앞에서도 반복됩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고난을 살피셨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이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 땅의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그들은 감격으로 받아들입니다.























바로 앞에 서다

본문 / 출5:1-21


강고한 애굽 왕 앞에 나아가 노역에 시달리는 이들을 풀어달라고 말하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 아닌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아론은 어떤 운명적인 힘에 떠밀려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그들은 맨 몸입니다. 바로로 하여금 그들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할만한 어떤 강압적 수단도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애굽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바로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섭니다. 그의 손에는 하나님의 권능과 동행의 상징인 지팡이가 들려 있었을 겁니다. 


무망한 요청

두 형제는 바로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전합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5:1) 여기서 하나님은 애굽의 영토 밖에서 만나야 할 신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고대 세계는 다신적 세계였습니다. 신들은 저마다 관장하는 역할이 있었고, 장소 규정적 존재였습니다. 신을 만나려는 이들은 특별한 장소에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사람을 찾아오시는 분이라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주재 영역을 광야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바로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의도적 배치입니다. 하지만 광야는 삶의 위기에 직면했던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님과 만났던 장소임을 생각해보면 모세와 아론의 말이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의 반응은 예상대로 매우 냉소적입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그는 앞으로 아주 비싼 대가를 치르며 그분이 누구인지를 조금씩 배우게 될 것입니다. 애굽인들이 섬기던 신들의 계보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신의 말에 순종한다는 것은 신의 아들을 자처하는 바로의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가 내릴지도 모르는 재앙을 언급하며 바로를 설득하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긁어 부스럼이라 하였던가요?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쫓아내는 동시에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히브리인들의 노동 강도를 높이라고 명령합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답게 그의 지시는 매우 구체적이고 또 전략적입니다. 그는 감독관들에게 벽돌에 들어갈 짚의 공급을 중단시킬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면서도 할당량은 줄여주지 않습니다. 그는 즉자적 대중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삶이 곤고해지면 그들은 누군가를 원망하게 마련이고 그 원망은 그들에게 헛된 꿈을 심어주었던 이에게 집중되리라는 사실을 바로는 꿰뚫어 보았습니다.


제국과 자본의 유사점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5:8b-9) 억압자들의 언어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겪는 고통에는 무관심합니다. 괴로움 때문에 저절로 터져나오는 신음소리를 '게으름'의 소치로 받아들입니다.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싶어하는 약자들의 꿈은 편안하기에 하는 헛소리로 취급됩니다. 제국의 언어와 자본의 언어는 그런 면에서 매우 닮아 있습니다.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나 존중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제국은 폭력을 통해 민중들의 꿈을 유린하고, 탐욕스러운 자본은 고용의 불완전을 통해 노동자들을 길들이려 합니다.


바로의 전략은 성공적입니다. 노동 강도가 높아지면서 백성들 사이에 원망하는 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물론 그 원망은 곧 출구를 찾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이었습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은 해방의 단꿈을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뜨렸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힘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그들에게 각인시켜 주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로의 승리는 이중적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는 길은 어쩌면 가시밭 위를 걷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외부의 적과 싸우는 일도 힘들지만 더 큰 싸움은 내면에 깃든 무기력과 싸우는 일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그렇기에 바로의 체제에 맞서는 동시에 백성들의 무너진 마음을 세우는 일에 공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외부의 적을 막아내고, 다른 손에는 건설 장비를 들고 무너진 성벽을 보수해야 했던 것과도 비교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모세는 절해고도에 갇힌 듯 외롭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의 운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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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14 01-02 10:01)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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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진(14 01-05 05:01)
우연히 읽기 시작하여 끝까지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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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14 01-09 02:01)
피남편사건.정말이해안되었는데답답함을풀어주셔서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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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린(15 02-10 09:02)
척박한 가나안을 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했을까? 궁금했는데 이제야 이해됩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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