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일어서는 사람들 2013년 12월 27일
작성자 김기석

 일어서는 사람들


청년들이 하나 둘 무대 위로 쏟아져 나와 성탄절 뮤지컬의 마지막 합창곡을 부를 때 가슴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톰 후퍼 감독의 영화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원 데이 모어'라는 곡에 '마리아 찬가'를 입힌 그 합창은 장엄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거니받거니 부르는 그 힘찬 합창과 더불어 청년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뮤지컬이긴 했지만 좌절과 무기력을 떨치고 청년들이 일어서는 것 같아 울컥해졌다.


지난 해 12월 한 젊은이가 대자보를 통해 '안녕들 하십니까?' 하고 안부를 묻자 이곳저곳에서 응답이 쏟아져나왔다. 대개는 안녕하지 못하다는 대답이었지만, 그것은 이미 희망이었다. 누구도 안녕할 수 없는 세상에서 숨죽이고 있던 이들의 집단적 깨어남이요 일어섬이었으니 말이다. 먹고 사는 문제는 누구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과제이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삶을 규정하는 유일한 척도가 되는 세상은 지극히 세속적인 동시에 타락한 세상이다.


스펙 쌓기에 몰두하느라 안색이 파리하게 변한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시리아 작가인 자카리아 타메르의 단편소설 '열 번째 날의 호랑이'가 떠오른다. 숲에서 잡혀와 우리에 갇힌 호랑이는 창살을 물어뜯으며 사납게 저항했다. 그러나 여러 날 지속된 굶주림으로 인해 호랑이는 숲의 기억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호랑이는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조련사의 요구대로 고양이처럼 야옹거렸다. 그러나 조련사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호랑이에게 당나귀처럼 히힝거리라고 요구했다. 자존심 때문에 거절하던 호랑이는 결국 굶주림에 굴복했고 당나귀처럼 히힝거렸다. 우리에 갇힌 지 열흘 째 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조련사가 그에게 준 것은 고기가 아니라 건초 한 다발이었다. 히힝거리는 호랑이는 더 이상 호랑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길들여진 젊음처럼 슬픈 게 또 있을까? 물론 길들여짐은 젊은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숲의 기억을 잃어버린 호랑이처럼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자기 존재에 대한 망각이야말로 자본의 독주를 가능케 하는 못자리이다. 소비주의와 쾌락주의에 길들여진 이들의 눈에는 이웃이 보이지 않는다. 이웃은 스스로 목적을 지닌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 만족을 위해 동원해도 괜찮은 수단이 되고 만다. 수단으로 변해버린 이들만 어정거리는 세상은 전장이다.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살아가는 삶의 기본 정조는 불안이다. 불안이 지속되면 무력해진다. 그래서 불안과 공포에 길들여진 이들이 생겨난다. 그들은 지릅뜬 눈만 보아도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시인 김수영은 힘 있는 이들에게는 저항다운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무력한 이들에게나 옹졸하게 저항하는 삶을 자조적으로 노래한 바 있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정말 얼마큼 적으냐"(<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에서). 인간 상실이다.


사람을 잗다랗게 만드는 세상, 경쟁에 뒤처진 이들을 사그랑이 취급하는 세상은 불의하다. 성경이 증언하는 신은 땅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무심히 바라보지 않는다.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신다. 신은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애굽의 전제정치 하에서 신음하던 히브리들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역사에 개입했다. 신은 억압과 착취를 운명으로 여기며 살고 있던 이들을 흔들어 깨웠다. 풍요의 상징인 나일강이 사실은 그들의 피와 땀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 속에 새로운 세상의 꿈을 심어주었다. '당연의 세계'에 갇혀 살던 이들이 '다른 삶'을 상상하기 시작할 때 역사변화는 시작된다. 출애굽 사건은 그렇게 일어났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꿈 또한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증언이다. 경쟁과 효율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사다리 오르기로서의 삶이 아니라, 협동과 돌봄과 나눔이 더욱 소중히 여겨지는 삶이야말로 평화 세상의 주춧돌이다. 가인은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는 신의 질문에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며 불퉁거렸다. 가인의 후예인 우리 또한 이 말의 인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승자독식사회의 이면에서 마치 그림자처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보며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그들은 잉여인간 취급을 받기도 한다. 잉여인간이란 없어도 좋은 사람, 아니 차라리 없는 게 좋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사람이 아니라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의 살벌한 풍경이다. 성경은 세상의 모든 존재가 신에게서 나왔다고 가르친다. 예외는 없다. 그렇기에 세상에는 함부로 대해도 좋은 사람은 없다. 모두가 각자에게 품부된 삶의 몫을 한껏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들을 적극적으로 품고 갈 때 세상은 평화로워진다고 가르친다.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장애인, 노인, 여성, 비정규직, 구직자, 이주 노동자, 죽한 이탈 주민, 소수자에 대한 우선적 배려야말로 평화 세상의 입구이다.


신은 레위기서에서 자기 백성들이 추구해야 할 목표를 제시했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그런데 신이 말하는 거룩함의 내용은 일상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웃을 억누르지 않는 것, 품꾼의 삯을 떼먹지 않는 것, 장애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 재판의 공정함 등이 그것이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추수할 때 밭의 한 모퉁이를 가난한 이들과 나그네 신세인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라는 것이다. 그것이 거룩한 삶이라는 것이다. 뒤집어 보면 이웃들을 배려하지 않는 삶은 거룩함과 무관함을 알 수 있다. 개인적인 실천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불의가 제도화되는 세상에 대한 거부와 변혁 또한 거룩의 길이다. 불의한 세상에 대한 저항의 포기는 이웃 사랑의 포기이다. 달력을 바꾼다고 새해가 오지는 않는다. 허든거리던 발걸음을 가지런히 하고, 삶의 주체로 역사의 주체로 일어설 때 영원에 잇댄 시간이 유입된다. 직립의 사람들이 많이 일어서는 한 해가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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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4 05-09 04:05)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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