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진리의 외길을 걷다 2013년 12월 07일
작성자 김기석

 

 진리의 외길을 걷다

               -관옥 이현주 목사 고희 기념 문집 헌정사


목사님의 고희를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드립니다. 저는 오늘 모임을 주최한 이들로부터 '이현주 목사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목사님과 자주 만나 깊이 교제한 적이 없는 제가 할 일이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좋은 말로 어르는 그분들의 말에 어리숙한 제가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기에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시간은 이렇게 우리를 속이곤 합니다.


목사님에 대해 생각하는데 뜬금없이 게오르규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창공의 별을 보며 우리가 갈 수 있고 또 가야 하는 길의 좌표를 읽어낼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별들이 우리의 앞길을 환히 비추는 시대는 얼마나 행복한가!" 루카치가 여기서 말하는 시대는 인간이 선험적 고향을 상실하지 않았던 시대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자기 운명에 순응하고,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과 공동체와 신과 더불어 깊은 일치를 이루며 살던 시대 말입니다. 그 때 삶은 우연성보다는 필연성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시대를 영원히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선험적 고향을 잃어버리자 세계와 맺는 친밀한 유대도 사라졌습니다. 우연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고 우왕좌왕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길을 찾습니다. 시간 속을 바장이며 애쓰고 또 애쓰지만 마음에는 비애감이 가득합니다. 고갱이가 빠진 듯한 삶이 비감스러워 문득 올려다 본 하늘에 별 하나가 떠 있으면 마치 그것이 나를 위해 그곳에 있는 것처럼 큰 위안이 될 때가 있습니다. 별을 노래했던 윤동주도 그런 경험을 했던 것이 아닐까요? 어두운 길을 걸어올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밝혀놓으셨던 최완택 목사님의 '등불'처럼, 우리 마음에도 그런 등불 혹은 별이 하나쯤 있다면 삶은 아직 살아갈 만합니다.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70년대, 혹은 그후에 성인의 세계에 입문한 감리교인들, 특히 진실하게 살고 싶어 몸부림치던 이들의 가슴에는 등불 혹은 별 몇 개가 떠있습니다. 그분들의 이름은 각자가 호명할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한 분의 이름을 호명할 수 있습니다. 이현주 목사님입니다. 남세스럽다 손사래를 치실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사실입니다.


70년대 후반 학교 임원들과 죽변에 머물고 계시던 목사님을 찾아갔을 때 목사님은 리모델링 중이었던 예배당 바닥에 주저앉아 벽돌에 붙은 시멘트를 떼내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이 제게는 기도처럼 보였습니다. 목사님은 조명조차 흐릿한 그곳에 주저앉아 일하다가 지치면 집에 들어가 책을 읽고 글도 쓴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수산의 소설이 수채화라면, 윤흥길의 소설은 유화'라고 하셨던 말씀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문체가 다르면 세계인식조차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젊은 날의 제게 목사님은 글 잘 쓰는 선배이셨습니다. 글 잘쓰는 사람은 많고도 많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나의 경험 세계 바깥에 머무는 이들이었기에 선망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든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선배가 글을 쓴다는 사실이 왠지 뿌듯했습니다. 굳게 닫힌 빗장을 열고 미지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는 전사를 바라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시대와의 불화로 인해 늘 불만에 차있던 우리는 목사님의 글을 찾아 읽으며 세상과 싸우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고 경찰을 향해 돌진하고 돌과 화염병을 드는 것만이 싸움이 아니라, 감춰진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고 묵정밭으로 변해버린 우리 마음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 또한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싸움이었습니다.


목사님의 글은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성서해석에서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던 불온한 영혼들에게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목사님의 글은 우리가 무심히 보아 넘기던 일상 속에 깃든 빛을 포착해 인상 깊게 드러내셨습니다. 목사님은 '상상력'을 도구 삼아 진리의 광맥을 캐내기 위해 고투하는 광부였고, 진실의 본질에 가닿기 위해 때로는 금기의 경계조차 넘어서는 모험가였습니다. 소설가 이청준 선생님은 <전짓불 앞의 방백>이라는 글에서 목숨을 걸고 진실을 말해야 하는 엄정한 순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글쓰기는 재주가 아니라 진실에의 모험입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저는 '글 재주'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불쾌감을 느낍니다. 물론 타고난 글쟁이도 있지요. 하지만 글 쓰기의 과정은 진리라는 실상과 접속하기 위한 고투의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글쓰기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시인 김수영이 '시는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사실을 가리키는 말일 겁니다.


목사님의 글은 가끔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숨겨도 좋을 이야기, 어찌 보면 부끄러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드러내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대책없는 정직이 부담스러웠던 것은 우리에게는 그럴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압니다. 목사님의 글은 타자들과의 소통을 지향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자신과의 소통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어둠을 마주하지 않고, 적당히 엉너리치며 넘어가는 것은 '구도자로서의 글쓰기'를 하는 목사님께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목사님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기 어려운 분이었습니다. 진리의 오름길에 오른 순례자의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순례자는 허위단심으로 하나의 봉우리에 오르지만, 아주 잠깐 숨을 돌리고는 다른 봉우리를 향해 길을 떠납니다. 계곡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할 때도 있고, 그늘조차 없는 바위 너설을 걸어야 할 때도 있고, 가파른 벼랑을 올라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렵다고 하여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운명적인 이끌림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오름길에 오른 이들의 삶은 떠남의 연속입니다. 물리적 떠남만이 떠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한 자리에 머물면서도 끊임없이 떠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세상을 한정없이 떠돌면서도 한 곳에 매인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늘 흐름 속에 있었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수많은 경계선을 넘나드셨습니다. 손에는 언제나 동서양의 고전을 비롯한 책이 들려 있었고 때로는 단소 한 자루가 들려 있기도 했습니다. 호젓하기 이를 데 없는 행장이었습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했던가요? 어쩌면 목사님은 아무 데도 머묾이 없이 마음을 낼 수 있기를 소망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노자와 장자를 참구하고, 불교 경전을 묵상하고, 유대교 랍비들의 글을 읽으면서도 목사님이 절대로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은 성경입니다. 목사님은 지금도 마치 무위당 선생님과 그러하셨던 것처럼 성경을 향해 묻고 성경이 주는 답을 경청하고 계십니다. 마음으로 나눈 대화를 기록으로 남겨주시니 우리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목사님의 글은 쉽습니다. 고담준론으로 사람들을 압도하려는 생각 따위는 애초부터 갖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내면을 밝혀주는 불이 이미 타고 있고 기름도 넉넉히 준비되어 있는 데도 목사님은 젠체 하지 않으십니다. 철없는 이들 가운데는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이런 글은 나도 쓸 수 있겠다'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치기 어린 이들에게 말합니다. "한번 써봐요." 흉내는 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글의 무게는 같을 수 없을 겁니다. 사자와 낙타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는 어린아이가 될 수 없다는 니체의 말은 언제나 참입니다.


요즘 들어 목사님의 글은 더욱 짧아지고 있습니다. 말의 부질없음을 절감하시기 때문일까요? 내면을 밝히는 글이 어느새 기도로 바뀌어 있음도 봅니다. 목사님은 지금 말이 소거된 자리를 향해 굳건히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하나의 이정표가 되셨습니다.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 보아도 별을 보며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찾던 시대에는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가는 동안 우연히 만난 작은 별빛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목사님은 지금까지 방황하는 많은 영혼이 쉬어 갈 수 있는 그늘이었고, 외로운 이들의 비빌은덕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앞에 진실을 향한 고투로 빚은 참의 등불 하나 밝혀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은 시간도 그 길 곳곳하게 걸어가 주십시오. 후배인 우리는 앞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겠습니다. 목사님보다 큰 영혼이 되는 것이 목사님께 대한 우리 최고의 인사라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목록편집삭제

로데(13 12-08 09:12)
두 분 목사님 계셔서 힘이 됩니다.
삭제
정병철(14 05-08 05:05)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