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13년 12월 07일
작성자 김기석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무 데로나 가려는 자는 그 어느 곳에도 가지 못하는 법. 그 어떤 항구도 목적지로 삼지 않은 사람에게는 바람도 아무 쓸모가 없다." 몽테뉴의 자서전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연이든 필연이든 우리가 타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지금 지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이 참 소란스럽다. 대립과 갈등이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될 때도 있지만, 그 갈등을 해소하는 방식을 모색하기 위해 지혜를 모으지 않는 한 사회 분열을 가속화하는 촉매가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이 그러하다. 상대를 탓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 양심의 소리는 잦아들고 성찰적 거리는 소거되게 마련이다. 나의 옳음을 강변하기 위해 상대의 그릇됨을 과장하는 이들이 늘어날 때 세상은 차가운 타자들의 거리로 변한다. 아내들에게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고 자랑했던 라멕의 노랫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성경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뽐내고, 교만하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무정하고, 원한을 풀지 않으며, 비방하고, 절제가 없고, 난폭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을 말세의 징조라고 말한다. 어느 것 하나 우리 시대를 비껴가는 것이 없다. 우리는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할 수도 있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다.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는 수치의 문화와 죄책의 문화를 구분했다. 수치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다른 이들의 시선이나 비평에 민감하다. 자기 잘못을 성찰하고 고치기보다는 그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그들은 자기 잘못을 지적하거나 비판하는 이들을 견디지 못한다. 비평에 의해 촉발된 수치심은 일쑤 원한감정으로 바뀐다. 그들의 자존감의 뿌리는 타자에게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부자유하다 그에 비해 죄책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양심의 소리 혹은 하늘의 소리에 민감하다. 중요한 것은 남들의 평가가 아니라 자기 옳음에 대한 확신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돌아본다. 죄책의 문화보다는 수치의 문화에 침윤된 이들이 많다.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과 군 사이버 사령부를 통한 선거개입이 있었다는 것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이쯤 되었으면 대통령이 나서서 이 일에 대해 사과를 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국민들은 그런 사실 자체를 부인하거나 그런 일이 설사 있었다 해도 나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지도자, 혹은 국론을 분열시키는 이들을 엄단하겠다고 어깃장을 놓는 지도자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수치의 문화에 침윤된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용서를 청할 줄 모른다는 데 있다. 용서를 구하는 대신 그들은 자기의 수치를 이르집는 이들에 대한 보복을 꿈꾼다. 악순환이다. 악순환을 더욱 부추기는 것은 진영의 논리이다.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순간 참이 들어설 자리는 줄어들게 마련이다. 그래도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는 것은 참을 드러내기 위해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허허벌판에 서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함석헌 선생의 시구처럼 "물 냄새 맡고 달리는 사막의 약대처럼/스며든 빛 잡으려 허우적거리는 움 속의 새싹처럼" 살기를 선택한 이들이다.


계절은 이제 대설을 지나 동지를 향해 가고 있다. 밤이 깊다. 왜 사람들은 예수의 탄생일을 동지녘으로 결정했을까? 탄생일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일 것이다. 어둠이 지극할 때 예수는 빛으로 이 세상에 들어왔다. 로마의 평화와는 구별되는 참된 평화를 가지고.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 문득 자발없는 의문이 떠오른다. 오늘의 교회는 역사 속에 빛을 끌어들이고 있나, 아니면 어둠을 깊게 만들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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