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에게 길을 묻다 2013년 11월 10일
작성자 예수에게 길을 묻다

 

 

 예수에게 길을 묻다

      ---이현주 목사의 <사람의 길 예수의 길>에 사족을 달다


"넌 왜 여기 가만히 있느냐? 날 사랑한다면서 왜 팔짱을 끼고 조용히 편안하게 있느냐? 넌 먹고 마시고, 내가 한 말을 편안하게 읽고, 십자가에 못 박힌 내 얘기에 눈물도 흘리고, 그리고 침대로 가서 잔다. 부끄럽지 않느냐? 그게 네가 날 사랑하는 법이냐? 넌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느냐? 일어나라!"(니코스 카잔차키스, <수난>, 열린책들, p.376)


유리병 속의 편지

세월이 빠르다는 말처럼 진부한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진부한 말은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와 잠시 머물다가 떠나게 마련이다. 저마다 불멸을 꿈꾸지만 소멸하는 게 생명의 본 모습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게 있다면 누군가가 남겨놓은 흔적일 뿐이다. 그래서 문화는 시간의 퇴적물이다. 길고 짧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흔적도 곧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 흔적에 눈길을 주고, 그 흔적과 사귀고, 그 흔적에게 길을 물으며 우리는 한 생을 건넌다. 문득 멈추어 서서 과거를 돌이키다 보면 기억의 지층 저 깊은 곳에서 한때 우리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사람들 혹은 사건들이 떠오른다. 그것이 한 권의 책일 수도 있다.


'사람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라는 <파우스트>의 한 구절을 붙들고, 도무지 앞이 가늠되지 않는 인생길을 마구 질주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우리 가슴에 불꽃을 일으켰던 책들이 있다. 때로는 책 전체의 서사구조가 때로는 책 속의 한 구절이 우리 앞을 비추는 등불이 되곤 했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책을 징검다리로 삼아 생이라는 개울을 건넌다.


관옥 이현주 목사의 글은 한국교회라는 진리의 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청춘들에게 던져진 하늘의 수인사가 아닌가 한다. 악머구리 들끓듯 소란스런 말들이, 계율화된 말들이 사람들의 의식을 옥죄고, 거짓말이 참말을 억압하는 시대에, 그가 조근조근 발설한 말들은 소리없이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물 위에 띄워진 유리병 속의 편지처럼 그의 메시지는 불특정한 독자들의 가슴에 이런저런 파문을 일으키곤 했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때로부터 근 30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수십 년 전에 쓴 글을 새삼스럽게 재출간한다는 사실이 저자에게는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을 들어갈 수 없다는 말처럼 시간은 불가역적이어서 오늘의 관점에서 과거를 수정할 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역사에는 권력의 낙인이 찍혀 있게 마련이기에 권력의 판도가 변할 때마다 새롭게 기록되곤 한다. 그러나 작가의 글은 그럴 수 없다. 그렇기에 어떤 이들은 젊은 날의 글들을 폐기해버리고 싶은 욕구를 느끼기도 한다. 오늘의 자리에서 뒤를 돌아보면 미숙하고 부끄러운 것들이 너무나 확연히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재출간을 저자 자신이 원한 것은 아니다. 지인들의 요구에 소극적으로 응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 책의 재출간은 그 자체로 귀한 일이다. 그가 30여년 전 고민하고 성찰했던 내용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당연의 세계 낯설게 하기

<사람의 길, 예수의 길>. 편의상 나누기는 했지만 이 둘은 본래 하나이다. 예수의 길이 곧 사람의 길이고, 사람의 길 또한 예수의 길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2천 년 전 팔레스타인 땅을 주유했던 예수라는 사나이에게서 참 사람됨이 무엇인지를 본다. 그를 구원자로 믿는 이들이 아니라 해도, 진지하게 참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외면할 수 없다. 예수는 이래저래 많은 이들의 상상력에 불을 질렀다. 특히 작가들은 2천 년의 기독교 역사가 그에게 덧씌운 가면들을 벗겨내고 그의 참 모습에 다가서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사실 교회는 김지하의 말대로 금관을 씌워 예수를 침묵시켰다. 작가들은 전복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예수라는 실체에 접근하려 노력했다. 인물의 생동감을 빼앗는 형이상학적 접근을 지양하면서 작가들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예수를 상상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이나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 복음>,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나 엔도 슈샤쿠의 <사해의 호반>이 좋은 예이다. 이들의 작품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고뇌하며 살아간 인간 예수에게로 우리를 안내하는 낯선 이정표들이다.


관옥 목사의 이 책은 사유의 빈곤과 상상력 부재에 시달리는 한국교회에게 주어진 귀한 선물이다. 저자는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던 성경 이야기에 의문부호를 붙임으로써 익숙한 세계, 당연의 세계를 낯설게 만들어 버린다. 당연의 세계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는 이들은 낯선 것을 위험한 것이라 여긴다. 예수 시대 유대교의 사회적 세계는 예수라는 낯섦을 견디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를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다. 품어지지 않는 것을 제거해 버리고 싶어하는 것이 누릴 것을 다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못돈 버릇이 아니던가. 자기들이 누리던 기득권에 작은 틈을 만드는 이들에게 가차없이 이단자의 찌지를 붙이는 교권주의자들이 얼마나 많던가? 


까타콤의 현실

그래서일 것이다. 이 책의 1부는 까타콤에서 행한 베드로의 증언이다. 진리가 증언되고 선포되는 자리는 지하 무덤이 적격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관옥 목사는 회색지대가 허용되지 않는 그 암울한 시대에, 그의 벗인 시인 양성우가 '겨울 공화국'이라 칭했던 그 시대에 예수에게 길을 묻고 싶었던 것이리라. 저자는 베드로의 입을 빌어 예수에 대해 증언한다. 관옥은 베드로에 빙의 되어 때로는 예언자의 서늘한 외침으로, 때로는 예민한 시인의 감성으로 예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종일관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그늘진 땅에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예수의 관심이었다. 김수영의 시구대로 '바람보다 먼저 눕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사람들, 가혹한 생의 조건 속에서도 기어코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 역사 변혁이라는 대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는 못하더라도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며 탄식하는 사람들 말이다. 예수는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였고, 설 땅 없는 이들의 설 땅이었고, 땅 위를 걷는 하늘이었다.


성경은 매끈한 텍스트가 아니라 주름 잡힌 텍스트이다. 지구라는 녹색별 위에 터잡고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빚어온 삶의 이야기가 온축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텍스트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들이 꿨던 역사의 꿈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뱉어내는 그들의 신음소리에 반응하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이란 이미 주어진 하나의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전통에 비추어 우리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예수가 유대교의 성전 체제와 벌인 싸움도 사실은 해석학적 투쟁이었다. 똑같은 텍스트를 가지고도 성전체제에 기생하는 이들은 자기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논리를 찾아냈고, 예수는 그 성전체제를 탈신비화하고 탈권위화하는 길을 찾아냈다.


교회가 추문거리로 변해버린 시대이기에 이 책의 증언은 오롯이 당대적이다. 본질을 사유하는 사람에게 허락되는 길은 오직 좁은 길 뿐이다. 관옥이 걸어온 길이 그러하고, 또 그가 신학적·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우리에게 열어보이는 길이 그러하다. 본질과 비본질이 뒤섞이는 현실, 아니 그 둘이 전도된 현실을 보며 관옥은 베드로의 입을 빌어 통곡하듯 외친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지니고 있던 것을 모두 버렸다. 알몸이 되어 하늘 아래 섰다. 형제들이여, 지금도 나는 분명히 증언할 수 있다. 그때 그 순간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았던 거역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벌거벗을 때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 때 우리는 온 세상을 소유한다.

하늘 아래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설 때, 우리의 앞을 막아설 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가는 곳마다에서 사람들에게 회개 하라고 가르치며 마귀들을 많이 쫓아냈고 수많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

진실을 위하여 싸워 본 자는 알리라, 가난함만이 지닐 수 있는 거대한 힘을. 빼앗길 것 없는 자의 태산 같은 용기를."


벌거벗지 못해, 아니 벌거벗을 용기가 없어 교회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게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교회가 부자가 되면서 예수는 교회 밖으로 떠돌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목숨을 버리는 자가 얻는다는 부활 신앙은 고백으로만 존재할 뿐, 사람들은 몸으로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는 나의 길을 가리라" 외쳤던 예수, 법이 사람들을 부자유하게 하고 불의를 영속화하는 데 기여할  때 기꺼이 법을 어길 수 있었던 예수, 그래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던 예수는 오늘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이 책의 제2부는 예수가 일인칭 화자로 등장한다. 두 개의 배신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야기의 결은 1부를 구성하는 베드로의 증언과 일맥상통한다. 예수를 팔아버린 가룟 유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의 약함과 실패를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스승을 배신한 후에 그것이 또 상처가 되어 자기 몸까지 파멸시켜 버린 사람 말이다. 유다의 세계에는 신의 은총이 틈입할 수 없다. 반면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는 약자이다. 두려움 때문이었지만 결국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나아가 통곡하는 사람 말이다. 예수는 그런 베드로야말로 교회의 기초라고 말한다.


"신 앞에서의 자기의 ‘아무 것도’ 아님(無)을 발견하고 쩔쩔매며 울고 있는, 그것도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울고 있는 베드로의 나약한 어깨 위에 기초한다. 왜냐하면 거기, 인간의 약함에 신은 비로소 임재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강함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약함은 비록 악덕은 아니라 해도 사람들이 어떻게든 벗어던지고 싶은 것이다. 효율과 경쟁이 지배하는 세상, 수(數)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약하다는 것은 곧 도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도래하면서 약한 사람들은 잉여적 존재, 곧 호메 사케르(Homo Sacer) 취급을 받기 일쑤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약함'이야말로 신이 임재하는 통로라고 말한다. 오늘의 교회는 이 지극한 역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은 그런 메시지를 철회하지 않는 예수를 입맞추어 추방했다. 예수를 입맞추어 배반하는 일은 그 옛날 겟세마네 동산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유다적 강인함에 매료된 모든 세대에서 자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2부의 증언은 시종 가슴을 절절하게 만든다. 특히 십자가 위에서 천년의 고독보다 더 깊은 고독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침묵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는 예수의 내면 세계는 가히 절창이라 할 수 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에덴 이후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들이 빚어내는 모든 악함에 대해 우주적인 미움과 분노를 느낀다. 미움과 분노 없이 어떻게 사랑이 발생하겠는가? 정직한 미움과 분노가 있었기에 예수는 '사랑'이라는 샘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 악함과 약함까지도 품어안는 사랑은 소용돌이치는 미움과 분노를 가라앉게 만들었고, 마침내 '용서'라는 한 송이 꽃이 소담하게 피어났다. 어쩌면 진정한 사랑과 용서에 이르는 이 길은 미움과 분노를 거치지 않고는 찾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수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망치 소리를 들으며 옛 세계가 붕괴되는 소리를 듣는다. 마치 폭포가 쏟아져내리는 것처럼 유장하게 이어지는 말들은 읽는 이들의 가슴을 세차게 뒤흔든다. 무너지는 것은 옛 세계 전체이다. 완고한 율법주의, 공산주의, 모든 '인위', '교회당', '세상의 비리', '광신, 폭력, 탐욕', '독재자들의 깃발', '국가주의', '제국주의'…. 십자가 위에서 그 모든 것들이 무너졌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그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 낡아빠진 세계의 논리에 즐겨 굴복한다. 그것이 안락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베드로와 예수의 입을 빌어 발설된 관옥 목사의 증언은 통곡이다. 그 통곡은 본(本)을 버리고 말(末)을 붙잡는 세계에 대한 통곡이고,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부인하는 교회에 대한 통곡이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이런 통곡을 견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아니, 견디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함께 통곡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무너지는 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얍복강가에서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곤경을 겪었지만 그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제 우리가 삶으로 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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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5 01-09 09:01)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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