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홀로 찬 바람과 마주하는 나무처럼 2013년 11월 10일
작성자 김기석

 홀로 찬 바람과 마주하는 나무처럼


한 의인이 소돔에 갔다. 소돔 사람들을 죄와 벌에서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밤낮으로 거리와 시장을 돌아다니며 탐욕과 도둑질, 거짓과 무관심을 버리라고 설교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빈정거리며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더 이상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소돔 사람들에게 흥미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살인자는 계속해서 살인을 했고, 현자들은 계속 침묵했다. 어느 날 그 의인을 가엾게 여기던 한 아이가 다가와 왜 아무 소용없는 외침을 계속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의인은 자기가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면서 "내가 지금까지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1986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엘리 비젤이 자전적 소설인 <팔티엘의 비망록> 도입부에 적어놓은 글이다. 이야기를 처음 접했던 1980년대 초반, 나는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마음이 굳어진 이들의 가슴 앞에서 추락하는 말, 허공 중으로 흩어져버리는 말의 운명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반응할 줄 모르는 대중들로 인해 절망할 수 밖에 없었던 예언자의 고독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혹한 역사를 향해 하늘의 뜻을 전하도록 부름받은 이들의 보편적 운명이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옅은 비애감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웠다. 예레미야도 일찍이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되었다(렘20:8)고 하소연하지 않았던가. 그 고독, 그 비애를 어찌 견뎌야 할까?


<팔티엘의 비망록>이 번역되어 나왔던 1981년에 이청준 선생의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라는 연작 소설집이 간행되었다. '언어사회학서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오직 일의적인 말들만 허용되었던 시기를 통과하면서 작가가 고민하던 말의 운명을 탐색한 결과물이었다. 이청준 선생은 작가의 책임을 비장하게 서술한다.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소설로써 고발하는 것, 의롭지 못한 일을 증언하는 것, 우리의 삶을 부당하게 간섭해 오거나 병들게 하거나 불행스럽게 만드는 모든 비인간적인 제도와 억압에 대항하여 싸우고 그것들을 이겨 나갈 용기를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진실을 추구하는 작가의 소명이라는 것이다. 소설가에게 주어진 진실에의 소명이 이러할진대 종교인들의 책임이야 더 말해 무얼할까. 하지만 안쓰럽게도 종교인들의 말, 특히 목사들의 말은 사람들의 가슴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예언자들의 언어나 예수의 언어는 때로는 시린 마음을 감싸안는 미풍의 언어였고, 때로는 불의와 압제를 무너뜨리는 폭풍의 언어였다. 살아있는 말씀은 사건을 일으키게 마련이니 말이다.


말이 넘치는 시대에 말들은 제집을 잃고 떠돌고 있다. 비릿한 욕망을 숨기기 위해 선한 말들로 제 행적을 치장하는 이들로 인해 말의 신뢰성이 훼손되고 말았다. 불의한 이들은 기호로 표상되는 말과 그 말이 내포한 뜻을 착종시킴으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가장 거룩해야 할 종교 언어가 때로는 구속복처럼 사람들을 부자유하게 만들고, 사람들의 가슴 속에 떨쳐버리기 어려운 그늘을 드리우기도 한다.


세계교회협의회가 열리는 부산에서 세계인들은 한국교회의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확신에 찬 음성으로 다른 이들을 저주하는 사람들, 복음의 이름을 내세운 악다구니, 단호하고도 매몰찬 표정. 확신은 때로는 함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사람들이다. 그들은 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생각이 없다. 물론 배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만을 자폐적으로 복제할 뿐이다. 무사유의 전형이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성찰적 믿음의 부재이다. 성찰이란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 드러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돌아봄이 아니던가? 타자를 부정의 대상으로만 보는 한 대화와 성찰은 발생하지 않는다.


서글프고 아프다. 가장 아름다운 복음이, 우주를 감싸안을 만한 예수의 정신이 이렇게 축소·왜곡 될 수 있다니. 가을 바람에 낙엽이 한 잎 한 잎 떨어지고 있다. 이제 나무들은 졸가리로만 남아 겨울을 견딜 것이다. 장엄하지 않은가. 잎 진 후에 홀로 찬 바람과 마주하는 나무처럼 벌거벗은 진리 하나만 굳게 붙들고 이 암울한 현실을 건너는 이들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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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13 12-08 02:12)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글은 저의 마음 을 시원하게 적셔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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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다(13 12-10 10:12)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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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13 12-27 06:12)
성찰적 믿음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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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경(14 02-17 01:02)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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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4 05-07 03:05)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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