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17 2013년 10월 30일
작성자 vorblick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1-4)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하는 세상에 사는 이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은 격려인가, 기만인가? 근심의 뿌리는 불확실한 미래에 맞닿아 있다. 그런데 주님은 근심의 해독제가 믿음이라고 말씀하신다. 믿음이란 유보없는 맡김이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주님과 함께 그 상황을 겪어내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근심은 스러진다. 쓰라림과 고통은 피하기 힘들지만 근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는 있다. 예수는 제자들을 위해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신다고 하신다.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그리로 제자들을 데려가겠다는 것이다. 그 '있을 곳'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열리게 될 새로운 삶이리라.


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14:5-7)


도마를 두고 흔히 의심 많은 도마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를 정직한 도마라 부르고 싶다. 모르면서도 아는 척 엉너리치는 것이야말로 깨달음 혹은 진정한 믿음의 적이 아니던가? 일견 어리석어 보이는 질문이 있었기에 예수의 가르침과 존재를 관통하는 대답이 나올 수 있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30대 초반의 젊은이가 한 대답치고는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길과 진리와 생명을 추상적으로 이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앞에 생략되어 있는 단어들을 되살려야 한다. '십자가의 길', '성육신의 진리', '부활의 생명'. 이것은 셋이지만 하나이다. 예수라는 생명을 일이관지로 꿰뚫고 있으니 말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사람들은 '나'라는 말에 불필요할 정도로 집착하여 이 진술에 담긴 심오한 의미를 왜곡 혹은 외면한다. 사람들은 일쑤 예수가 아니고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이 구절을 즐겨 인용한다. 하지만 '나를 거친다'는 말은 십자가의 길, 성육신의 진리, 부활의 생명을 산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 삶 속으로 돌입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고는 아버지의 세계에 이를 수 없다.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14:8-9)


(너희는) "그분을 이미 보았다"는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빌립은 답답하다. 본 적이 없는 데 보았다고 말씀하시니 말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말한다. 해맑은 요구 아닌가? 그런데 그가 말하는 '봄'과 예수께서 말씀하신 '봄'은 살짝 어긋나고 있다. 볼 눈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보여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는 말씀하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이다. 한결같은 사랑, 깊은 공감, 무한한 책임, 그 미쁘심, 우람한 산줄기와 같은 의로우심, 심연과도 같은 공평하심, 그 모든 것을 구현하신 분에게서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14:12)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일을 자기의 일로 알고 행하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사는 것, 그 분의 몸이 되어 사는 것이 곧 신앙생활이다. 예수는 남겨질 제자들을 격려하신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더 큰 일'을 큰 예배당을 짓고, 이러저러한 시설을 만드는 일로 곡해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의 지향을 굳게 붙드는 일을 규모의 문제로 환원하는 순간 교회는 신의 무덤이 되고 만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14:15-17)


사랑은 구속이 아니다. 자유로운 헌신이다. 타자를 향한 무한대의 자기 개방이다. 사랑은 자기 만족이나 기쁨이 아니라 그의 만족과 기쁨을 지향한다. 만해 한용운은 님을 향한 사랑을 <복종>이라는 시에 담아서 노래했다.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사랑에서 비롯되는 복종은 깊은 수동성이지만 굴욕감과는 무관하다. 예수를 사랑한다는 고백 속에는 그의 가르침을 기꺼이 지키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다. 우리는 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주님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달라고 아버지께 구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진리의 영'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보혜사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의 번역어이다. 원래의 의미는 '변호인'이지만 곁으로의 부름, 위로, 권면 등의 의미망을 거느리고 있는 단어이다. 보혜사는 우리 곁에 다가와 흔들리는 우리 삶을 꼭 붙들어주고, 위로해주고, 하나님의 뜻을 일깨워주신다. 예수는 오감으로는 지각할 수 없지만 너무나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힘, 이미 제자들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그 힘을 감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4:18-19)


얼마나 좋은가? 예수의 사람들은 이 무심한 우주 가운데서 끈 떨어진 연처럼 살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그분께 등을 돌릴 수는 있지만 그분은 당신의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실존의 어둔 밤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빛의 현존을 아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는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은 역사의 특정한 시점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그날은 제자들이 눈을 뜨는 날,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던 것을 뚜렷하게 보게 되는 날, 그래서 새로운 세계의 문지방을 넘는 날이다.


가룟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가 물었다.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14:22)


숨겨진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해맑은 질문 아닌가? 하지만 예수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한사코 멀어지려 하신다. 하지만 그럴수록 예수는 더욱 드러난다. 빛은 저절로 드러나는 법 아니던가. 빛 아닌 이들이 스스로를 빛으로 드러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법이다. 내면에 빛이 없는 이들일수록 자기를 겉꾸미는 일에 열중한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까닭을 묻는 제자에게 예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라고 응수하신다. 동문서답이다. 어쩌면 이러한 어긋남이야말로 진리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이 미묘한 어긋남이 빚어내는 불편함에 주목할 때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상식의 세계는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하지만 그 세계의 문은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하게 하실 것이다."(14:26)


그 어긋남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할 때, 인식의 벼랑 끝에 섰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다가온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가 삶의 고비에 직면할 때마다 말없이 다가와 모든 것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까맣게 잊고 살았던 말씀을 기억나게도 한다. 그 말씀은 길 안내자가 되기도 하고,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되어 우리를 지탱해주기도 하고, 불병거가 되어 우리를 보호하기도 한다. 시인 구상은 자기 속에 신령한 새싹이 돋아난 순간을 이렇게 노래한다. "어둠으로 감싸여 있던 만물들이/저마다 총총한 별이 되어 반짝이고/그물코처럼 엉키고 설킨 事理들이/타래실처럼 술술 풀린다."(<신령한 새싹> 부분) 어쩌면 이러한 순간이 보혜사를 모신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14:27)


박해가 예상되는 길을 가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평화를 남겨 준다고 말한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물론 외적 상황이 변할 때마다 요동치는 평화이다. 그 평화는 불안을 내포한 평화로서 지속성이 없다. 그러면 예수가 주는 평화란 어떤 것일까?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흔들리지 않는 평화, 환난 중에도 기뻐하는 평화, 죽음을 넘어선 자의 평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화(롬5:1)이다. 죽음이 생명에 삼키워졌음을 아는 자의 평화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나는 패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결코 패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누리는 평화이다. 그렇기에 예수는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말을 많이 하지 않겠다. 이 세상의 통치자가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어떻게 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 다만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내게 분부하신 그대로 내가 행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려는 것이다. 일어나거라. 여기에서떠나자."(14:30-31)


예수는 이 세상의 통치자 곧 '사탄'의 시간이 다가옴을 직감하신다. 지배의 욕망과 쾌락의 열망으로 부풀어오른 대지 위를 활보하는 자가 다가온다. 하지만 그는 예수에 대해 어떠한 권한도 없다. 이미 세상에 대해 죽은 자를 유혹하거나 두렵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으려 하신다. 그의 걸음걸음이 곧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고, 그분의 뜻에 대한 순복임을 증언하기 위해서. '일어나거라'라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주저하는 마음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용감하게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자는 초대이니 말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15:1-3)


'나는 참 포도나무'라니! 예수님의 은유 참 발랄하기도 하다. 포도, 무화과, 올리브는 지중해 세계를 대표하는 과일들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고마운 식물들이다. 일찍이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을 일러 '여호와의 포도원'이라 하였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공의와 정의의 열매 맺기를 기대하셨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포학과 부르짖음만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탄식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하신다. 하지만 포도나무는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 가꾸는 농부의 손길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농부에 빗대고 있다. 농부가 심혈을 기울여서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가지치기이다. 다른 가지들의 생장을 억압하는 가지, 쓸데없이 웃자란 가지를 잘라내지 않으면 탐스런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삶도 그러하지 않던가? 버릴 것을 버리지 않으면 내면의 뜨락은 이내 쓰레기 하치장으로 변하고 만다. 삶에서 겪게 되는 시련과 아픔이 때로는 하나님의 가지치기임을 느낄 때가 있다. 시련과 아픔은 우리로 하여금 근본을 생각하도록 하는 초대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도덕적인 완전함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지향에 대한 긍정이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른 이들, 그들도 완전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삶의 단순함과 접속된 이들이다.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15:4-5)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머물다'이다. 이 단어는 이야기의 맥락에 따라 '붙어 있음'으로, 그리고 '떠나지 않음'으로 변주되고 있다. 나무와 가지는 분리될 수 없다. 가지가 나무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그 가지는 죽은 것이다. 물론 가지 없는 나무도 있다. 겨울을 나기 전 앙상하게 가지치기 당한 가로수 같은 경우 말이다. 하지만 가지가 튼실하지 못하면 열매도 없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찌하든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

예수가 보여준 생명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와의 접속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가 그 분 안에 머무는 것과 그분이 우리 안에 머무는 것은 편의상 선후관계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사실은 동시적 사건이다. 우리가 예수와 접속되어 있기만 하다면 열매는 저절로 맺힌다. 그것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이든 진실과 정의와 평화의 열매이든 마찬가지이다. 접속이 먼저고 열매는 따라온다. 어떤 이들은 그 열매를 '성화'라고 일컫기도 한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정말 그러한가? 불의한 자들과 불신의 무리들 가운데 능력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예수님이 여기서 말하는 '아무것'은 굳이 한정하여 말하자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예수와의 접속이 끊어지는 순간 우리는 속절없이 세상의 중력에 이끌려 추락할 수밖에 없다. 시몬느 베이유는 은총이 아니고는 중력을 이길 수 없다 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15:7-8)


예수 안에 머문다는 말과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문다는 말은 같은 말이다. 말씀은 곧 그의 존재가 아니던가. 변화산 꼭대기에서 제자들은 구름 사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막9:7). 그 말은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고, 세상을 든든하게 붙들고 있는 말씀이다.

예수 안에 혹은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특권이 있다. 무엇을 구하든 다 그대로 이루어지는 특권이다. 이 말은 욕망하는 바를 다 실현할 수 있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자의적 신앙에 사로잡힌 이들이 의도적으로 혹은 무지로 인해 외면하는 것은 이 약속의 전제인 '예수 안에 머문다'는 말이다. 예수의 마음과 접속된 이들이 구하는 것은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겠는가?

제자는 그런 삶의 열매를 맺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제자를 자처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이름과 실상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이름 값을 할 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자아를 확대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이들로 인해 하나님은 모독받고 있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15:10-11)


믿는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로 치환될 수 있다. 바울 사도도 사랑은 믿어줌이라 하지 않던가? 사랑하는 이는 그 사랑의 대상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기를 초월한다. 그것은 기꺼운 희생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하지만 그 때문에 비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렸다. 예수는 제자들을 그러한 기쁨의 자리에 초대하고 있다.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않는 기쁨,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는 기쁨, 그것은 예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15:12-15)


'사랑하라'는 말, 자칫하면 진부할 수도 있는 말이다. 진부할 수도 있는 이 말을 예수는 지치지도 않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사랑은 준 것만큼 받고자 하는 통속적 사랑이 아니다. 친구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는 사랑이다. 예수 자신이 삶으로 보여주신 그런 사랑 말이다. 그 사랑의 깊이 속에 뛰어드는 이들을 예수는 '친구'라고 부르신다. 황감한 일 아닌가? 오늘 우리는 누구의 친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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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혜(17 03-04 09:03)
사순절달력을 올려 주심 감사합니다
달력의 순서대로 말씀읽고, 그 말씀의 목사님 설교문들을 목록에서 찾아서 읽고 있읍니다.
받은 은혜 감사드리며 ,
참회기도와 중보기도를 올리고 내일 주일예배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을합니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예배를 볼수있어서 ,저 뿐만아니라 , 많은 분들이 은혜를 누리시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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