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비도덕성의 덫 2013년 10월 26일
작성자 vorblick

 비도덕성의 덫


무서리 내리는 상강 절기에 접어들었다. 농가월령가는 이맘 때의 풍경을 이렇게 노래한다. "만산 풍엽은 연지를 물들이고, 울 밑의 황국화는 추광을 자랑한다." 아닌게아니라 이산저산 황국화가 지천이다. 이 아름다운 계절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어서 어르신들을 모시고 나들이를 다녀왔다. 파란 하늘, 코스모스, 갈대와 억새의 군무, 잔잔한 강물에 얼비친 햇살. 물고 뜯는 이들 속에 사느라 잔뜩 구겨진 마음이 저절로 펴지는 것 같았다.


잠시 들른 시골 예배당, 참새떼가 제집인양 무시로 들고났다. 예배당 출입문 위 서까래에 있는 제비집은 비어 있었지만 야박하게 철거당하지 않은 채였다. 은행나무와 꽃사과나무 사이 그늘에 팔자좋게 엎드려 있던 개는 지긋한 눈길로 낯선 이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골 풍경을 닮은 것일까? 그 교회 목사는 싱긋 웃으며 저 녀석을 교인들이 개집사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개를 보면 질겁을 하는 마을 아이를 녀석이 수굿이 맞아주면서 아이가 교회에 드나들게 되었고 그 참에 아이 부모도 교인이 된 모양이다. '네가 사람보다 낫구나' 하면서 사람들이 개집사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느릿한 시골 풍경을 즐기다 도시로 돌아오니 마음이 절로 옹색해진다. 성경은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를 거듭하던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이 세운 것이 도시라고 말한다. 경쟁과 효율이 지배하는 각박한 도시 공간에 짓눌린 이들이라면 이 말을 거의 직감적으로 이해할 것이다.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산다면 모를까 세상 돌아가는 일을 보며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우리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정치, 경제 현실은 답답하기만 하다. 정쟁을 그치지 않는 정치권이야말로 국민의 근심거리가 된지 이미 오래다. 거칠고 야비한 말들이 넘친다. 정치인들은 남을 불쾌하게 만들려는 열정에 사로잡힌 이들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큰 정신은 어느 결에 사라지고 자기 이익에 발밭은 소인배들이 각축을 벌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국가정보원 댓글사건을 담당했던 윤석열 여주지청장이 제기한 외압설로 정치권이 또다시 격랑에 휩쓸리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일부 언론과 여당은 '하극상'이니 '항명'이니 하는 단어를 써가며 그를 공격하고 있다. 무엇이 실체적 진실인지를 규명하려 노력하기보다는 조직의 이익에 복무하지 않은 이에 대한 분노 터뜨리기에 급급한 것 같다. 데이비드 로이는 부도덕성(immorality)과 비도덕성(amoralrity)을 구분한다. 부도덕성이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나쁜 일을 하는 것이다. 사소한 범칙에서부터 중범죄에 이르기까지 부도덕한 행위는 많고도 많다. 그에 비해 비도덕성은 하나의 구조나 조직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무사유' 개념과도 유사하다. 스스로 자기 행동의 책임적 주체가 되려 하지 않고 강자와 자신을 합일화함으로 이득은 누리되 책임은 지려 하지 않는 이들이 참 많다. 그들의 도착적 성실함은 공적 세계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그들의 속내를 이르집을 능력은 없지만, 그들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은 자기 자리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이익을 위해 진실을 외면한다면 그보다 더 큰 비극이 또 있을까?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도다."(시12:8) 히브리의 한 시인의 가슴에서 울려나온 이 탄식이 왜 이리도 깊이 다가오는 것일까? 모순과 갈등이 없을 수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비루해지지는 말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 부정이니 말이다. 미국의 가톨릭 운동에 큰 족적을 남겼던 도로시 데이는 '사람들이 선하게 사는 것이 더 쉬운 사회'를 꿈꿨다. 순하고 착한 이들을 거칠게 만드는 정치는 이제 끝나야 한다. 진실은 밝혀져야 하고, 불의에 가담한 이들은 처벌받아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가을을 맘껏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목록편집삭제

노영(13 10-29 03:10)
옳은 말이지만, 진실은 더 지켜봐야 할것 같습니다.
삭제
로데(13 11-01 07:11)
예.할것과 아니오.할것을분별하고행하는 그리스도인.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