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오타네스류 2013년 10월 08일
작성자 vorblick

 오타네스류(類)


페르시아의 귀족이었던 오타네스는 캄비세스 왕이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한 것은 키루스의 아들 스메르디스가 아니라 같은 이름의 메디아인 스메르디스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오타네스는 그 왕을 시해함으로 정의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한 끝에 동지들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동지들은 거사를 앞두고 주저했다. 삼엄한 경비를 뚫을 방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오타네스는 경계병들이 귀족인 자기들을 막지는 못할 거라면서 필요하다면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무엇인가 거짓말을 해야 할 경우에는 거짓말도 해야 하오. 우리는 거짓말을 할 때나 진실을 말할 때나 언제나 자신의 이익이라는 똑같은 목표를 지향하오. 즉 인간은 거짓으로 상대방을 납득시켜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되면 거짓을 말하고,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진실에 의해서 이득을 얻을 수 있고, 그 정직함으로 상대방에게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인물로 인식시킬 수 있으면 진실을 말하는 것이오. 동일한 목표에 방법만 두 가지로 다를 뿐이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인간사회에서 진실이나 거짓보다 더 상위에 있는 가치가 이익이라는 씁쓸한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애써 부정하고 싶어도 현실은 오타네스의 진술이 참이라고 말하고 있다. 참과 거짓, 빛과 어둠, 정의와 불의의 착종, 그 속에서 우리는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다. 불신과 냉소의 찬 기운이 우리 사회 곳곳에 배어 있다. 진실에 복무해야 한다는 당위의 끈이 느슨해지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주인인 욕망 앞에 즐겨 엎드린다. 이게 우리 삶의 배경이 되고 있는 살풍경의 뿌리이다.


이익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이 많다. 이익이라는 새로운 신을 따르는 오그랑이들의 첫번째 임무는 대오를 맞추는 것이다. 그 대오에 발을 맞추어 행진하는 이들은 적절한 보상을 받는다. 하지만 그 대오를 이탈하는 이들은 즉각 적으로 규정된다. 그는 별종이라고 따돌림을 받거나 박해를 받는다. 대오를 이탈하는 이들에 의해 진실이 드러날 때면 사람들은 즉시 사람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논점 흐리기야말로 이익에 복무하는 이들이 즐겨 구사하는 전략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면 절로 마음이 어두워진다. 밀양 송전탑 공사 재개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갈등이 심각하다. 주민들이 파놓은 구덩이와 목을 맬 수 있도록 나무에 걸어놓은 올가미는 그들의 절박함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다. 많은 이들이 소위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의혹을 관음증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 논란 속에서 평생의 트라우마를 안게 될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애당초 없다. 정부가 약속했던 노인 복지 연금을 둘러싼 논란 끝에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자기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한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대오를 이탈한 그를 향해 독설을 뱉어냈다. 어떤 이들은 항명이라고 열을 올렸고, 어떤 이들은 배신자라는 찌지를 붙이기도 했다. 이런 거친 반응은 '양심'이라는 단어가 상기시키는 불편함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는 양심이란 가장 본래적인 가능성으로 현존재를 부르는 소리라고 말했다. 양심의 소리를 따른다는 말은 그 내부의 목소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는 말이다. 달리 말해 거기서 발생하는 불이익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말이다.


어느 정당이나 정파를 두둔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동기에 따라 살아가는가? 이익인가, 진실인가? 모든 것이 착종된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근본을 살펴야 한다.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했다. 그 한 마디를 붙잡고 살아야 삶의 누추함을 면할 수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있게 진실을 선택하는 이들을 통해 세상은 조금씩 밝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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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4 05-04 06:05)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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