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희망과 절망의 경계선에서 2013년 09월 26일
작성자 vorblick

 희망과 절망의 경계선에서


얼마 전에 일이 있어 괌(Guam)에 다녀왔다. 좌우로 필리핀해와 태평양을 끼고 있는 섬은 참 아름다웠다. 해안 가까이 형성된 산호로 인해 물빛은 매 시간 변화되고 있었다. 그윽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그런데 일상을 여읜 자리에서 만나는 그 고요함은 뿌리를 알 수 없는 슬픔의 정조를 자아냈다. 그 천변만화하는 고요한 물살이 번잡하고 부박한 일상에 시달리는 동안 잊고 있었던 아름다움의 세계를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리라. 지인들에게 그런 느낌을 이야기했더니 괌도 많이 오염되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바닷 속 생물의 다양성도 줄어들었고, 물빛도 흐릿해졌다는 것이었다. 난개발 탓도 있지만 그 못지 않게 심각한 것은 더 이상 그 섬에 태풍이 불어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남쪽에서 형성된 태풍이 일 년에도 몇 차례씩 찾아와 사람들의 삶을 뒤흔들고, 바닷속까지 뒤집었던 태풍은 이제 괌의 북쪽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태풍의 순기능이 사라지자 또 다른 문제가 생긴 것이다.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예언자들의 나팔소리가 곳곳에서 울리고 있다. 온실효과, 생태계의 다양성 파괴, 표토층 유실, 지하수 오염, 오존층 파괴, 꿀벌 개체수 감소, 질병의 세계화 등이 장단기적으로 인간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지금 현대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400ppm을 돌파했다면서 머지 않아 지구 온도가 2-5도 상승하면 생태계가 교란되고, 식량 위기가 찾아올 거라고 말한다. 이런 경고가 주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잠시 귀를 기울리는 듯 하다가도 얼른 일상으로 돌아가곤 한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핵에 의존하는 문명의 미래를 묵시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원전의 신화에서 깨어날 생각이 없다. 이미 자본주의 문명에 깊이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실과 대면하는 순간 이전처럼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더 많이, 더 편리하게'를 행복의 기본조건으로 생각하도록 세뇌된 이들은 애써 현실에 눈을 감는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인간의 전락과 무관하지 않다. '존재'보다는 '행동'과 '소유'가 중시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분주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드리우는 공허와 혼돈의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한다. 사회학자들은 현대사회를 가리켜 '피로사회'니 '팔꿈치사회'니 '유동하는 공포'라는 말로 형용한다. 그들은 모두 세속의 예언자들이다. 이런 인간의 전락에 누구보다 깊은 책임이 있는 것은 종교계이다. 종교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를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한 사회 혹은 문명 속에서 종교가 해야 하는 역할은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종교는 사람들에게 초월의 빛 속에서 자기 삶을 가늠해보도록 해주어야 한다. 자기 삶의 전거를 욕망에서 찾지 않고 더 높은 가치에서 찾는 이들이야말로 종교적 존재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에 <제1회 정의·평화·창조질서보전대회>(JPIC)가 세계교회협의회 주관으로 우리나라에서 열렸다. 그 회의는 세계에 만연한 부정의와 분쟁의 현실과 생태계 파괴 문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의 책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심도 깊게 논의했다. 그동안 기독교인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1:28) 하신 신의 명령을 곡해해왔다. 인간을 창조의 면류관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외부 세계 전체를 대상화하고 수단화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찢고 착취했던 것이다. 그런 창세기 해석은 아전인수에 지나지 않는다. 창조론과 진화론을 대척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지만 사실 성경이 전하는 창조주에 대한 고백은 심오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창세기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이야기 속에는 심오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깊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창조주에 대한 고백은 반제국주의 담론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창조 이야기는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제국이 지배하던 세계에 살던 피정복민들이 꾼 제국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에 대한 고백을 통해 그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세상에 있는 어떤 존재도 하찮게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왕이든 노예든, 인간이든 식물이든 마찬가지이다. 모든 존재는 한 호흡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다른 존재를 하찮게 대하는 것은 결국 그를 만드신 존재를 부정하거나 모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신을 창조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모든 존재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생명의 그물망 속에 있는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인간에게 부여된 역할은 그런 관계가 파괴되지 않도록 돌보는 것이다. 타락이란 그러한 돌봄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에덴 이후의 삶은 형제간의 갈등의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관계의 파탄은 결국 자연 세계의 황폐화로 나타난다. 성경에는 앞의 두 관계가 정상화될 때 회복될 자연의 모습을 아름답게 노래하는 장면이 많다. 불모지에서 꽃이 피어나고, 죽었던 강물 속에서 물고기가 뛰놀고, 과수마다 열매가 끊이지 않고 열리는 세상의 꿈. 이 꿈은 어처구니 없는 꿈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꾸어야 할 꿈이다. 유대인들은 티쿤 올람(tikkun olam)이라는 말로 자기들의 과제를 천명한다. 현실의 이스라엘은 이런 과제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지만, 그들의 꿈이라 하여 우리의 꿈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는 없다. 티쿤 올람이라는 말은 '망가진 세상을 고친다'는 뜻인데, 풀어 설명하자면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는 태어날 때보다 더 나은 세상을 뒤에 남겨두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기후변화에 대처해야 한다는 뜻에는 공감하지만 그래도 대안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말의 이면에는 자기들이 감당하기에는 문제의 크기가 너무 압도적이라는 비관주의가 깔려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도 그랬던 것처럼 결국은 전문가들이 이 문제를 풀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문가주의가 세상을 오히려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우리의 작은 실천이 세상을 정말 변화시킬 수 있을까?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다.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일도 있는 법이다. 즐거운 불편을 기꺼이 실천하려는 우리의 옷자락을 잡아채곤 하는 것은 '부푼 욕망'이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다른 삶'을 상상하지 못하도록 막아왔다. 행복을 구성하는 다른 방식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자본주의는 욕망의 확대재생산을 통해 유지되는 체제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길이다. 내면의 헛헛함에 시달리는 이들 일수록 자본의 속삭임에 쉽게 넘어간다.


종교인들의 죄가 크다. 번영의 복음으로 사람들을 오도했으니 말이다.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람이라야 평화와 생명의 세상을 자아낼 수 있다. <정의평화창조질서의 보전대회>의 초안문서 제목은 '홍수와 무지개 사이'였다. 지금 우리는 희망과 절망의 경계선에 서 있다. 어느 쪽으로 눈길을 돌리느냐에 따라 종교와 인류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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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13 09-29 11:09)
지어주신땅을회복시키는일,더이상미룰수없는위기감을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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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4 05-04 06:05)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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