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가슴에 불이 붙는 것 같아서 2013년 09월 26일
작성자 김기석

 가슴에 불이 붙는 것 같아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타락하면 가장 흉한 냄새가 난다 한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개신교'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헌금 강요', '배타성', '시청 앞 기도회',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전도자들', '반공 숭미주의' 등이라고 대답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입을 다물고 만다. 어쩌면 개신교회를 비판하는 이들은 하나님이 시키셔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는 경청되지 않는다. 개신교회를 대표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만이 도드라져 보이기 때문이다.


저명한 신학자 존 캅은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에 경의를 표하면서 그러한 성장의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했다. 전래 초기부터 한국교회는 민족사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그 문제를 자신의 소명으로 부둥켜 안았다는 것이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지었으며, 민족운동의 산실 구실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교회는 그런 민족사의 문제에 응답하지 않게 되었다. 특정할 수는 없지만 '그 때'는 교회가 대형화 되고 부유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비 콕스는 '인간은 삶의 도구를 바꾸는 순간 신도 바꾼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부유함과 복음은 양립될 수 있는 가치일까? 불행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설교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눈으로 삶과 역사를 주석하는 이들일 것이다. 예언자가 그러하듯 설교자는 역사와 더불어 불화를 겪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는 역사를 향해 준엄하게 꾸짖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가 대형화되고 부유해지기 시작하면서 설교자의 언어가 달라지고 말았다. 회중 가운데 앉아 있는 이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경계선 위의 삶을 살았던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게 지식인이란 갈등조정자나 합의 도출자가 아닙니다. 지식인은 자신의 온 몸을 비판적 감각에 내거는 존재, 즉 손쉬운 공식이나 미리 만들어진 진부한 생각들 혹은 권력이나 관습이 으레 말하고 행하는 것들을 거부하는 감각에 실존을 거는 존재입니다."(에드워드 사이드, <지식인의 표상>, p.36)


지식인이 이러할진대 설교자는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오늘의 설교자들은 마치 시대와의 불화 따위는 없다는 듯이 살아간다. 오히려 시대와 불화하는 이들에게 지우기 어려운 찌지를 붙여 그들을 불온시하기도 한다. 오늘 한국교회는 참 예언자들보다는 거짓 예언자들의 목소리가 더욱 크게 울린다. 아마샤는 권력자들을 향해 서슴없이 독설을 날리는 아모스를 향해 "선견자는 여기를 떠나시오! 유다 땅으로 피해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시오."(암7:12) 하고 말했다. '밥벌이'를 위해 말씀을 변개하고, 권력의 눈치를 보는 이들이 많다.


교회의 위기는 말씀의 위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침묵시키는 말이 교회를 사로잡고 있다. 어느 심포지엄 자리에서 객석에 앉아 있던 한 방청객이 질문을 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습니까?' 예민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교회 안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함께 웃었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 웃음은 사람들의 공유된 인식을 드러내고 있었다.


김용우 감독님의 글을 읽으며 내내 중얼거린 것은 '아니, 내가 왜 이런 분을 지금까지 모르고 지냈지?'였다. 물론 먼 발치에서 뵌 적은 있었지만 어떤 생각을 가지고 목회를 해 오신 분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감독의 직무를 끝낸 후, 그의 가슴에 타오르고 있는 불길을 달랠 길 없어 뭔가에 사로잡힌 듯 써내려간 원고 속에서 나는 세례자 요한의 우렁우렁한 외침을 들었다. 도무지 감독을 지낸 이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거칠고 뜨거운 외침이었다.


저자는 마치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빙의된 것처럼 한국교회와 사회를 향해 고고성을 토해내고 있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감정의 격류 때문인지 때로는 거칠고 성기게 느껴지는 대목도 있지만, 그의 혼을 사로잡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는 둔감한 이라 해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이라는 강대한 제국의 위협 아래 서 있던 유다의 상황과 오늘 우리의 분단 상황이 그를 통해 내남없이 소통되고 있다. 숭미의식에 사로잡힌 보수 기독교, 이스라엘의 성전 체제처럼 강도의 굴혈로 변해버린 교회, 번영의 신학에 사로잡힌 채 사람들의 욕망에 복무하는 거짓 복음선포자들에 대해 저자는 분노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순교자인 카즈 뭉크(Kaj Munk)는 "오랫동안 교회의 상징은 사자, 양, 비둘기, 그리고 물고기였다. 하지만 한 번도 카멜레온이었던 적은 없다"고 말했다. 옳은 말이다. 카멜레온으로 변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던 사회적 의제 가운데 저자의 시선을 비껴나 있는 사건은 없는 것 같다. 소위 말하는 4대강 살리기 운동을 비롯해, 용산 참사, 쌍용차 노동자들의 죽음,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 사건, 디도스 사건, BBK 사건 등을 저자는 '땅의 백성들의 응어리'라 표현한다. 목사는 바로 그 응어리를 풀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그 사건들을 조명하는 일을 통해서여야 한다.


젊은 날 문익환 목사를 통해 들은 '목사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그래서 그는 이 땅을 치열하게 살았던 시인들에게 늘 귀를 열어두고 살았다. 시인이야말로 시대의 징조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포착하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그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적인 언어를 새롭게 배치함을 통해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빚어내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김용우라는 존재를 통해 주전 8세기와 6세기에 살았던 예언자들과 20세기를 살았던 시인의 영혼이 교류하는 장면은 참 경이로웠다.


십자가는 야만의 시대에 대한 위대한 거부이다. 성경은 모든 제국주의는 망한다는 사실을 시종일관 증언한다.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여 쌓아올린 바벨탑의 운명은 붕괴일 뿐이다. 이익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문명이 흔들리는 조짐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욕망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욕망 충족의 도구로 전락한 교회가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김용우 감독은 경고의 나팔을 불고 있다. 어쩌면 그는 이전보다 더 외로워질지도 모르겠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이들에게 그는 불편한 사람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자기 입장을 드러냈다. 하나님의 종이니 당연한 일인가? 당연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도 윤동주처럼 '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십자가가 허락된다면' 하는 심정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외로운 외침에 화답하는 이들이여, 일어나라!


# 이 글은 김용우 감독의 신앙 에세이에 붙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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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11-15 12:1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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