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지천명으로서의 교육 2013년 09월 26일
작성자 vorblick

 지천명으로서의 교육


섬돌 밑에 감춰졌던 칼과 신발 한 켤레를 찾아들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났던 테세우스가 떠오른다. 해마다 열리는 예술제의 열기가 고조되어가고 있던 어느 해 봄, 운동장 층계참에 앉은 노 교장이 아들의 무릎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내 교육은 실패했어." 교육자로 살아온 자기 삶을 반추하며 무심코 내뱉은 그 말은 아들을 사로잡은 화두가 되었다. 아들은 그 말에 붙들려 참 교육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한 평생을 살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온 길 끝에서 아버지가 말한 '교육의 실패'는 어떤 의미일까? 그것이 전성은이 손에 들고 길을 떠났던 칼과 신발 한 켤레였다.


흔히 '교육!' 하면 학교 교육을 떠올린다. 교육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 위주의 사고 때문이다. 학교가 중요한 교육의 주체인 것은 사실이지만 진짜 교육은 학교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00교육'이라 말할 때 '00'에 해당하는 술어는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술어를 다 포괄하는 범주로서의 '교육'의 본질은 무엇인가? 전성은은 부정否定의 방법(via negativa)을 통해 그 물음에 접근하려 한다. '교육은 ~~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비본질적인 것을 덜어내고 나면 교육의 요체가 어느 정도 드러나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부정의 길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이해한 교육의 본질을 드러내려 한다. 전성은의 글은 교육학에 대한 이론적 통찰이나 논리적 정합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사람살이가 빚어내는 일종의 무늬이다. 사람은 이야기를 듣고 살고, 이야기를 지으며 산다. 이야기가 삶을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접근하기 위해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힘이 있다. 이야기는 우리를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내면에 불꽃을 일으킬 때가 많다. 둔감한 이들에게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로 끝나지만 민감한 이들은 이야기 속에서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풍크툼'(punctum)과 만난다. 오직 자신에게만 섬광처럼 다가와 가슴을 뒤흔들어놓고, 다시는 이전처럼 세상을 볼 수 없게 만드는 순간 말이다.


전영창, 원경선, 장기려, 안용선, 조지 워싱턴 카버 같은 이들이 빚어낸 삶의 이야기는 전성은이라는 존재에게 던져진 타오르는 불이었다. 그들 가운데 개인적인 안일과 평안을 구한 이들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길을 걸어가며 길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있음 자체가 전성은에게는 교육이었다. 노을 속으로 걸어가면 자기도 모르게 노을빛으로 물들듯이 교육은 그렇게 물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교육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가치관, 인생관, 역사관을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감동시켜 자기와 같은 길을 걷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인생을 길이라고 한다면 교육은 그냥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뚜벅뚜벅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육은 자기의 길 감'이다."


전성은에게 있어서 교육은 이처럼 '지천명하는 일'이다. 하늘이 각자에게 품부한 생을 옹골차게 살아내도록 하는 일이다. 천명이라는 말이 자의적으로 활용될 수도 있고, 숙명론적인 태도를 부추길 수도 있지만 전성은은 천명이라는 단어 사용을 꺼리지 않는다.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절대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천명이 다가올 때 사람은 거의 즉각 그것이 천명임을 안다. "절대인 천명이 사람을 만나 상대적이 될 때 비로소 천명은 역사와 만나 역사 속에서 일하게 된다." 천명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 사람에게는 절대의 세계인 것이다. 우리 삶이 맥이 없는 까닭은 아직 천명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명을 발견하고 그 명을 수행하기 위해 목숨을 걸 때 비로소 독립의 사람이 된다.


교육에 대한 논의는 지천명이라는 프리즘을 거치면서 다양하게 변주된다. 하늘의 명은 사랑이다. 사랑은 타인의 고통에 민감해지는 일이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는 수고이다. 마사 누스바움도 '타인의 관점, 특히 사회가 '그저 사물'보다 덜 중요하게 보는 이들의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하는 것과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타자에 대해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 교육의 과제라고 말한 바 있다. 타인과 더불어 공생할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교육이 지향하는 바라는 뜻이다. 하지만 공생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교육을 받은 사람은, 바로 인간이 타인에게 가한 고통 때문에 발생한 아픔을, 내가 책임질 이유가 없는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아픔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 바로 나라고 인식하는 사람이다."


참 교육이 지향하는 인간상은 이처럼 책임적 존재이다. 효율성과 합리성을 숭상하며 자기 확장에 골몰하는 이들에게는 뜬금없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교육의 목표를 '지천명'으로 보는 전성은에게는 이것은 마땅히 가야 할 인간의 길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수행하는 이들을 일러 유로지비(yurodivy), 즉 '거룩한 바보'라고 부른다. 그들은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 어리석음을 통해 세상을 구한다. 타자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혹은 세상의 더러움을 정화하기 위해 기꺼이 오물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사람들이야말로 교육이 목표로 하는 참 사람이다.


천명을 살아가는 사람의 길은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제국주의의 가면을 벗기는 일과 상통한다. 제국은 사람들이나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제국은 차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기에 제국의 논리에 동화되지 않는 이들은 격리하거나 처벌한다. 오늘 이 땅의 교육은 그런 제국의 가면을 벗기기는 커녕, 그 가면을 두껍게 만드는 일에 동원되고 있다. 사람됨의 길을 가르치지 않는 교육은 이미 교육이 아니다. 끝없는 경쟁으로 내몰리는 이들이 타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늘의 제국은 자본주의가 아닐까? 제국은 우리로 하여금 자본이 만들어놓은 매트릭스 바깥의 세상을 상상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 세계 속에서 사람들이 우울증이나 강박증, 자살 충동, 무력감에 시달리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라 할 수 있다.


한 평생 교육자로 살아온 전성은이 주창하고 있는 지천명으로서의 교육은 우리가 가야 할 '오래된 새 길'이 아닐까? 그 길을 걷다가 실패를 경험한다 해도 그 교육은 결코 실패가 아니다. 그 실패 위에서 새로운 길을 준비하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가 쓴 글의 얼개가 다소 성기어 보여도, 글 속에 담긴 그 뜨거운 혼의 불꽃에 접속되어 참 교육의 길을 걷는 이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 이 글은 전성은 선생의 책 <왜 교육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가>에 붙인 해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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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11-14 09:1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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