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말로 짓는 세상 2013년 09월 10일
작성자 김기석

 말로 짓는 세상


이따금 도피성을 찾는 기분으로 가까운 카페를 찾아 간다.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와 통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이들에게 방해를 받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 욕구 때문이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책을 펼쳐들면 오랜만에 맞는 옹근 독서를 기대하며 절로 흐뭇해진다. 어떤 때는 써야 할 글을 구상하거나 메모를 하기도 한다. 시끄러워져 집중이 되냐고 묻는 이들이 있지만 그 소음은 오히려 의식의 차단벽이 되어 옹근 사색을 가능하게 해줄 때가 많다. 문제는 주변에 앉은 이들이 너무 소란을 피울 때이다. 공공 장소임을 잊은 듯 큰 소리로 떠들거나 낭자한 웃음으로 정신을 쏙 빼놓는 이들이 있다. 많은 이들이 마치 조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부산스럽다. 그럴 때면 책을 덮어야 한다. 마치 퇴거 명령을 받은 것처럼 쓸쓸하다.


고요함을 기대한다는 것은 그저 언감생심일 뿐인가?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종편방송에 눈길이 갈 때가 있다. 눈길이라 말했지만 실은 그건 청각적 경험일 때가 많다. 정치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전하는 이들의 음성이 매우 낯설다. 새된 소리, 흥분한 소리로 인해 그들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린다. 종편방송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기보다는, 가르고 찢기 위해 동원되는 것처럼 보인다. 성내는 말, 윽박지르는 말, 조롱하는 말, 꾸민 말, 허망한 말, 이간질 하는 말, 험한 말, 누군가를 격동시키기 위해 발설된 말.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피곤함은 어쩌면 이런 폭력적인 말들에 시달린 탓이 아닐까싶다.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말은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제 집을 잃고 떠도는 말들로 인해 세상은 훨씬 위험한 곳이 되었다.


신은 시날 평원 위에 세워졌던 바벨탑을 허물었다. 바벨탑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불통의 세상, 차이가 허용되지 않는 획일성의 세상이다. 자연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돌 대신 틀에 찍어 만든 벽돌이 사용되었고, 안팎을 가르면서도 통하게 해주는 흙 대신 완전한 차단을 가능케 한 역청이 사용되었다지 않던가. 바벨탑은 결국 공식 담화와 지시만이 허용되는 제국을 상징한다. 제국의 언어는 소통의 기제가 아니라 권력의 욕망에 복무할 뿐이다. 어느 시대이든 언어는 곧 권력이다. 그렇기에 모든 독재자들은 언어를 독점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썼다. 언어의 타락과 역사의 퇴행은 깊이 연루되어 있다.


바츨라프 하벨은 "모든 말들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 말해지는 상황, 그리고 말하는 이유 등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꼭같은 말이 한 시점에서는 평화의 주춧돌이었다가, 그 다음 순간엔 그 음절 하나하나마다 기관총소리가 울려퍼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옳은 말이다. 지금 우리의 말은 평화를 위해 복무하는가, 아니면 기관총으로 작동하는가? 우리가 하는 말이 곧 우리가 사는 세상이 된다. 요한복음의 첫 구절은 이 사실을 장엄하게 기록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문제는 우리 시대에는 참 말, 에너지로 가득 찬 말이 경청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진실은 자유에 이르는 지름길이지만 늘 불편함을 동반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진실한 말, 의미 있는 말보다는 재미 있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성찰을 요구하는 말보다는 판단의 언어에 더 빨리 반응한다. 보듬어 안고 북돋는 말보다는 헐뜯고 깎아내리는 말에 즐겨 복종한다. 이런 세상은 결국 디스토피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어느 날 꾀꼬리가 신에게 불퉁거렸다. 아름다운 노래로 신을 찬미하고 싶지만 개구리 울음소리가 너무 커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신이 말했다. "네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개구리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구나." 지금 우리는 꾀꼬리와 개구리 사이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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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11-14 09:1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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