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2013년 08월 21일
작성자 김기석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한 남자가 팔뚝에 자기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고 있다. 단기 기억 상실증 환자가 아니다. 그는 어쩌면 미구에 죽음과 마주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달아날 생각이 없다. 그는 자기가 죽으면 자기 가족들에게 알려달라는 뜻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이윽고 그는 중무장한 군인들과 탱크가 집결해있는 광장을 향해 나아간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라는 대명사로 말할 수 밖에 없지만 그는 엄연히 이름이 있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고, 친구들이 있을 것이다. 그는 그들 곁으로 가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을 떠나 광장으로 가는 것일까? 이집트에서 일어난 일이다.


무바라크의 장기 독재가 종식된 후 선거에 의해 적법하게 선출된 무르시 대통령이 군부에 의해 축출된 후 이집트 정국은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 그의 축출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광장을 점거하자 군부는 그들에 대한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벌써 9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 한다. 국내 신문들은 '이집트 대학살', '이집트 유혈사태'라는 타이틀로 이집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일부 아랍 국가들은 이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 저마다 국익을 따지고 있을 것이다. '국익'이라는 불가사리가 세상의 아름다운 가치들을 마구 삼키고 있다. 국익이라는 명분이 내세워지는 동안 수 없이 많은 생명이 유린되고 있다. 어쩌면 그들의 희생은 부수적 손실로 취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죽어간 이들은 숫자로 환원된지 오래이다. 사망자를 나타내는 숫자로 환원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사람들. 그들 역시 우리처럼 '살고자 하는 생명'이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아들과 딸, 혹은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누이였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스스로 저자가 되어 자기 삶의 이야기를 엮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가정을 이루고, 집을 짓고, 나무를 심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픈 사람들의 꿈은 탱크의 굉음 속에서 짓밟히고 말았다. 죽어가는 이들의 망막 속에 비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파란 하늘, 누군가의 미소? 아니면 핏빛으로 변한 세상?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려온다.


그런데 그들은 왜 죽음의 자리인 줄 알면서도 그곳으로 달려간 것일까? 조금만 비겁하면 비루할망정 안전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민주화를 향한 열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존재를 존엄하게 유지하고 싶은 자유인의 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비록 자유를 향한 투쟁이 무모해 보인다 해도 계속되어야 함을 가리키고 있다. 그들이 피로써 심은 평화와 자유의 꿈이 아름다운 결실로 맺혀지도록 하는 것은 살아남은 이들의 과제이다.


역사에 등장했던 모든 제국의 그늘 밑에서 살아가던 이들에게 삶은 고역 그 자체였다.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혼돈, 흑암, 공허는 그런 세상에 사는 이들의 실존적 정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자 상황이 달라졌다. 혼돈은 질서를 향해 정돈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이 있으라' 하는 명령이 떨어지자 빛이 생겨났다. 빛의 알갱이는 그처럼 깊은 어둠 속에서 터져나오게 마련이다.


많은 이들이 국정원 정치 개입 사건에 항의하는 뜻으로 광장에 나가고 있다. 경찰은 질서유지 혹은 보호를 명분으로 차벽을 둘러 광장을 봉쇄하고 있다. 봉쇄한다고 해서 진실이 숨겨지지는 않는다. 어둠 속에 감춰진 불꽃은 언젠가는 타오르게 마련이다. 광장이 더 이상 항거의 외침이 아닌 축제의 함성으로 가득 찬 세상을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 역사의 과제이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이들은 진실과 대면할 용기를 내야 한다. 불협화음을 뚫고 조화로운 소리가 흘러나오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지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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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13 08-24 01:08)
잘 사는 나라보다는 기본이 서 있는 나라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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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13 09-02 08:09)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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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11-07 11:1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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