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16 2013년 08월 20일
작성자 김기석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13:1)


아, 얼마나 좋은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 예수의 공적인 사역과 가르침은 12장에서 끝났다. 무리들을 향하던 가르침은 이제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 아니 당신이 떠난 이후에도 이 세상에 있어야 할 제자들을 향한다. 가야 할 때가 다가왔음을 알기에, 제자 하나하나를 무심히 바라보실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이들의 영혼을 뒤덮고 있는 어둠과 혼돈이라는 두꺼운 껍질을 열 수 있을까? 스승은 이전보다 훨씬 나직한 어조로, 마치 연필을 꾹꾹 눌러 쓰듯 그렇게 제자들을 가르치셨을 것이다. 그 가르침은 일종의 유언인 셈이다. 그런데 '끝까지 사랑하셨다'라는 말이 자꾸만 목에 걸린다. 부박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믿음과 사랑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상황이 어렵다 하여 자식 버리는 부모 없듯이 예수는 철 없는 제자들을 사랑하신다. '끝까지.'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13:3-5)


예수는 '아신다'. 평범한 언술이지만 평범하게 읽히지 않는다. 이것은 인식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당신 삶으로 수용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강요하시지 않는다. 모든 것은 그의 손에 맡겨졌다. 거절할 수도 있고 수용할 수도 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등질 수도 있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바칠 수도 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예수는 자신의 삶의 뿌리와 목표에 주목한다. 일찍이 그는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안다'고 하셨다.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예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후 대야에 물을 떠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비일상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에 제자들의 말문이 막힌 것일까? 그들은 말이 없다. 그들의 발을 어루만지는 스승의 손길에서 그들은 많은 말을 들었을 것이다. 어떤 필설로도 형용할 수 없는 영혼의 교류, 어쩌면 손은 가장 깊은 의사소통의 수단인지도 모르겠다. 앞 못보는 사람과 열병환자와 나환자의 몸에 닿았던 그 손, 죽었던 소녀를 잡아 일으켰던 손, 물속에 빠져들어가던 베드로를 건져주셨던 그 손으로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닦으셨다.

시인 강은교 선생은 <당신의 손>이라는 시에게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의 손이 길을 만지니/누워 있는 길이 일어서는 길이 되네./당신의 슬픔이 살을 만지니/머뭇대는 슬픔의 살이 달리는 기쁨의 살이 되네./아, 당신이 죽음을 만지니/천지에 일어서는 뿌리들의 뼈". 아, 그대. 이 생명의 손길과 접촉해 보았는가?


시몬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다. 이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베드로가 다시 예수께 말하였다. "아닙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13:6-8)


베드로답다. 그는 관습을 뒤집는 이런 행동을 납득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렵니까?" 그는 '주님께서'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지 않았을까? 지금 예수가 하고 있는 일은 종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라는 것이 그의 언표 너머의 속뜻이다. 사회의 당연한 질서를 뒤집어엎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지금 상식적 세계를 대표하고 있다. 예수께서 첫번째 수난 예고를 하셨을 때도 베드로는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마16:22)라고 말했다. 우리는 베드로의 진정을 안다. 그러나 모든 진정이 곧 최선은 아니다. 분별력 없는 진정성은 어리석음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리석음을 깨기 위해서는 충격이 필요하다. 에둘러 말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는 단호하게 말한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닦아주는 이 일을 수용할 수 없다면 너는 나와 꿈을 나눈 사람이 될 수 없다.' '힘있는 이들이 세도를 부리고, 은인인 척하는 세상을 전복시켜, 사람들이 서로 섬기고 돌보고 나누는 벗들의 나라를 세우고 싶은 것이 나의 꿈이다.' 발을 닦아주는 행위 속에는 그런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 우리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값싼 힐링의 퍼포먼스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예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내 발뿐만이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겨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 밖에는 더 씻을 필요가 없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13:9-10)


손과 머리까지도 씻겨 달라고? 베드로는 여전히 예수님이 행동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스승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그분의 핵심과 만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평생 교회 출입을 해도 예수의 핵심과 만나지 못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믿는다는 이들은 많지만 주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이들은 적다. 핵심과 접속하지 못한 이들일수록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깨끗하다. 지향에 흔들림이 없으면 더디더라도 낙심할 것 없다. 자주 발을 씻으면 된다. 그러나 모두가 깨끗한 것은 아니다. 이게 우리 현실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뒤에, 옷을 입으시고 식탁에 다시 앉으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13:12-14)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기독교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화려하고 장엄한 의례가 아니라, 수건과 대야가 기독교의 상징이다. 그 소박한 상징물이 외면받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13:15)


세상에 가르치는 사람은 많고도 많다. 가르침의 중요한 매개는 물론 말이다. 하지만 영적인 가르침은 정보나 지식의 전달이 아니기에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태도이다. 태도는 가르칠 수 없다. 다만 물결처럼 가슴에서 가슴으로 번져갈 뿐이다. 그렇기에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라는 표현은 췌사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 그는 본이 된 사람이다. 참 사람의 길, 하늘에 잇댄 존재의 아름다움을 그는 그저 보여주었다. 그 길을 걷는 것, 그 아름다움에 물드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하면, 복이 있다. 나는 너희 모두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택한 사람들을 안다. 그러나 '내 빵을 먹는 자가 나를 배반하였다' 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13:17-18)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의 거리 혹은 괴리가 깊다. 신앙생활이란 앎을 삶으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말씀을 은혜로 받는다. 하지만 말씀에 육신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는 사실은 외면하며 산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타매(唾罵)거리로 전락한 것은 고백과 삶의 불일치 때문이다. 복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처럼 사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안다. 모두가 그렇게 살지는 못하리라는 사실을. '내 빵을 먹는 자가 나를 배반하였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우리는 조건반사적으로 가룟 유다를 떠올림으로 알리바이를 구성한다. 나와는 무관한 말처럼 말이다. '나를 배반하였다'라는 말이 이명증처럼 울리고 있다. 입 맞추어 예수를 배반한 유다와 우리가 닮았다는 자각 때문이다.

예수님도 괴로우셨다. 가장 가까운 이가 배신자가 되는 현실을 편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해져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베드로가 예수의 품에 기대어 앉은 제자에게 고갯짓을 하여,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여쭈어 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이 빵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리고 그 빵조각을 적셔서 시몬 가룟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그가 빵조각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 때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13:26-27)


'빵'을 나누어 먹는 사이는 가까운 사이다. 친밀함의 은유인 빵이 배신의 은유로 변하는 아이러니. 그렇기에 쓰라림은 더욱 크다. 요한은 유다가 빵조각을 받는 순간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말한다. 이후에 유다가 보인 행태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사탄은 분단의 세력이다.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곤 한다. 사탄이 위험한 것은 그 유혹 혹은 틈입이 은밀하기 때문이다. 사탄은 절제된 우리 욕망을 들쑤셔 욕망을 부풀린다. 부푼 욕망이 서식하는 곳에서 이웃은 경쟁자가 된다. 경쟁은 불안과 분노를 낳고, 그것은 결국 어떠한 형태든 폭력으로 귀결된다. 사탄은 또한 '옳음'이라는 명분을 타고 들어온다. 나의 옳음에 대해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사탄이 암약할 최적의 조건이다. 가룟 유다에게 있어서 예수의 길은 '옳은 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의 옳음을 추구하기 위해 예수에게 등을 돌리려 한다.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문장이 간결하기에 메시지는 묵직하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탄의 궤휼이라 해도. 예수는 묵묵히 그것을 수용하려 한다. 이해하기 어렵다. 


유다는 그 빵조각을 받고 나서, 곧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13:30)


말씀과 실행 사이가 이처럼 긴밀하게 결합되다니. 때는 밤이었다. 어둠이 지배하는 때였다는 말이다. 유다는 사랑과 친교의 징표로 건네진 빵조각을 받고도 돌이키지 못했다. 그는 '어둠의 권세들'이 지배하는 영역을 향해 길을 떠났다.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13:31)


보냄을 받은 자의 영광은 보내신 분의 뜻을 완수하는 것이다. 삶으로 뒷받침하지 않으면서 '영광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하지만 인자이신 예수의 영광이 배신의 쓰라림과 고난을 통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해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아멘' 할 때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다. 예수의 순종 혹은 수용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살아났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13:34-35)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어째서 새 계명인가? 새로움은 지금까지 없던 것이 나타나는 것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새로울 신(新) 자는 서 있는 나무에 도끼가 기대어져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새로움이란 상투성을 깨뜨리는 데서 오는 생생한 아픔 혹은 전율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은 그들 가운데서 사랑이 진부한 상투어가 아니라 늘 생생한 사건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 공동체와 세상의 다른 집단을 구별짓는 표지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나'의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렇기에 자기 초월이고,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예수와 더불어 시작되는 새로운 인류는 이렇듯 매 순간 새롭게 탄생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사랑의 담론은 풍성하지만 사랑을 위한 희생은 한사코 거부하는 교회로 인해 하나님은 지금 곤욕을 치르고 계신다. 제자됨의 징표, 그것은 저절로 ‘되는’ 사랑을 넘어 ‘하는’ 사랑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차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조차 부둥켜안으려는 노력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예수의 제자라 하겠는가.


시몬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왜 지금은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13:36-37)


여전히 베드로는 무명 속을 걷고 있다. 제자이면서도 스승의 지향을 알지 못한다. 아직 그의 눈이 열리지 않은 까닭이다. 예수는 아직 베드로의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고 계신다. '내가 가는 곳'은 하나님의 품이지만 그것은 또한 죽음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곳이다. '지금'과 '나중'은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외올실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는 바로 그 지점을 보고 있다. 주님을 위하여서는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베드로의 장담은 조금의 허위의식도 없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한 가지 잊은 것이 있다. 자신이 유한성에 사로잡힌 인간이라는 사실 말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13:38)


베드로는 자신이 아니라 바로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시려 한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두 음절로 이루어진 이 단어의 행렬이 마치 스타카토처럼 단절적으로 가슴에 파고든다. 아, 닭이 울기 전 시간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시간은 언제나 닭 울음 소리가 난 후에 의식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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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13 08-21 06:08)
깊은 말씀의 바다에 온 마음이 젖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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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남(13 08-23 10:08)
" 사탄은 자기의 <옳음> 을 주장할때를 틈탄다" 를 명심하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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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11-07 09:1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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