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그놈'에게서 벗어나는 법 2013년 08월 10일
작성자 김기석

 '그놈'에게서 벗어나는 법


"평화란 어떤 것일까?" 여름 수련회를 앞두고 교회학교 교사들이 초등학교 5, 6학년 학생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아이들은 느닷없는 질문에 잠시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전쟁을 하지 않는 것", "밥을 같이 먹는 것",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 다들 엇비슷한 대답을 내놨다. 마지막으로 독일 국적의 한 아이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옥천 초등학교의 '그놈'과 싸우지 않는 것." 아이들도 교사도 함께 웃었다. 그 아이만 빼고. 그는 나름대로 진지했다. 모두가 평화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데, '그놈'의 얼굴, 표정, 목소리를 떠올리는 순간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대체 '그놈'이 누구일까? 묻지는 않았지만 짐작은 간다. 녀석은 피부색이 다르고, 국어가 익숙하지 않다 하여 아이를 짓궂게 놀려댔을 것이다. 그 때문에 한번 열전을 벌이기도 했을 것이고. 방학이 되어 잠시 홀가분하게 잊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질문이 '그놈'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놓은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놈'이 있다.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 말이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그는 싫다는 데도 지싯지싯 우리 기억 속을 파고들어 평온한 일상에 파문을 일으킨다. 예기치 않은 시간에 마치 유령처럼 등장해 마음을 무겁게 하고, 그렇지 않아도 신산스러운 삶에 비애감을 더해준다.


아주 오래 전 어느 선배가 들려준 일화가 생각난다. 생활 한복 차림에 수염을 멋지게 기르고 다니던 그는 강연차 지방에 갔다가 늦은 밤 주최측이 마련해 준 작은 모텔에 들어갔다. 수건과 주전자를 올려놓은 쟁반을 들고 방까지 따라온 주인은 다짜고짜 "도사님, 어느 산에 계십니까?" 하고 물었다. "나 그런 사람 아닙니다"라고 해도 주인 아주머니는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급기야는 "내 팔자가 왜 이 모양인지 좀 봐달라"고 하소연하기까지 했다. 짐작되는 바가 있어 선배는 단도직입적으로 "그 놈을 용서해!" 하고 말했다. 그러자 아주머니의 낯색이 대뜸 변하면서 "그렇게는 못 해" 외치고는 자리를 떠나더란다. '그놈'은 예전에 그 아주머니를 떠나보냈는지 모르겠지만 아주머니는 '그놈'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놈'으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먼저는 받은 만큼 되갚아주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지 않던가. 문제는 그것이 더 짙은 그림자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루쉰의 작중인물인 '아Q'가 보여준 정신승리법을 사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무기력한 찌질이 '아Q'는 동네 건달들에게 놀림을 당하거나 얻어맞으면 뒤돌아서서 '자식 같은 놈이니 봐준다'고 혼잣말을 하고, 사람들이 벌레 같다며 때리면 벌레를 때린 놈들은 더 나쁘다며 자기를 위로한다. 그는 언제나 승리자이다. 하지만 그는 영원한 패배자이다. 모든 문제를 세상 탓으로 돌리는 순간 그는 망상의 세계 속에 칩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를 신에게로 가져가 신의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문제는 신의 정의가 너무 더디게 집행되는 것 같다는 데 있다. 때로는 신이 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거나. 그럴 때면 '그놈'은 더욱 득의의 웃음을 띠고 찾아와 속을 뒤집어놓는다.


제일 좋은 방법은 그와 대면하여 갈등을 갈등으로 드러낸 후 화해를 모색하는 일일 것이다. 쉽지 않은 길이다. 갈등을 회피하는 성향이 많은 한국인들은 특히 이것을 어려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해를 모색해야 하는 까닭은 정신적인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그것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가장 큰 불행은 가해자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결국은 가해자를 닮아버리는 것이다. '그놈'과 화해를 모색하는 것은 그를 소중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인 동시에 피해의 기억에 붙들려 살지 않겠다는 일종의 독립투쟁이다. 하마다 게이코의 동화 <평화란 어떤 걸까?>를 읽다가 가슴 훈훈해지는 구절과 만났다. "평화란 내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하는 것. 네가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고 하는 것. 그리고 너와 내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 평화에 대해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그놈'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는 없다. '그놈'은 없어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할 대상이다. '그놈'을 친구로 만들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아무리 철옹성 같은 벽이라 해도 어딘가에는 문이 있다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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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13 08-12 09:08)
그놈.에게서 자유로워지는 해답을 얻으니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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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10-24 10:10)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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