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밤의 수심을 재다 2013년 07월 10일
작성자 김기석

 밤의 수심을 재다


내일부터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듣고 설핏 잠이 들었다. 새벽녘, 창밖으로 들려오는 빗소리에 잠이 깼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가슴의 울울함을 씻어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꾸르릉, 대지를 울리는 천둥소리가 장쾌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자맥질하듯 두서없이 떠올랐다가 가라앉곤 했다. 그때였다. 내 기억 저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치기만만하던 젊은 시절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라는 구절에 반해 제멋대로 마음 속 사부로 삼았던 오규원 시인의 시 구절이었다.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비애감이 몰려올 때마다 나는 그 구절을 붙들고 버티곤 했다. 어쩌자고 중늙은이같은 내게 그 구절이 찾아온 것일까?

서재를 뒤져 누렇게 변색된 낡은 시집을 찾아냈다. 지내온 세월이 종이 냄새와 함께 거기에 있었다. 이곳저곳 일람하다가 아, 이런 구절과 다시 만났다. "비가 온다. 어제도 왔다./비가 와도 이제는 슬프지 않다." 슬프지 않은 비라니. 밤의 수심水深이 한결 깊어지고 있었다. 빗소리가 소환한 젊은 날의 기억들과 모든 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이미 익숙해진 내 모습이 부대끼고 있었다. 건드리면 쨍 소리가 날 것처럼 팽팽한 긴장 속에서 살던 날은 이미 지나갔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고난과 죽음까지도 감수할 수 있다는 비장함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적당히 비겁하고 적당히 타협하며 현실에 안착한 것이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더 이상 현실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숙이라기보다는 늙음의 징후이리라. 아, 세월이 이렇게 무상하게 흘렀구나.

이미 잠은 달아난지 오래였다. 그럴 때는 그저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이리저리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신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처럼 처신하는 이들을 잠잠케 하려고 즐겨 인용하던 성경구절이 떠올랐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노자가 언급한 천지불인天地不仁, 즉 천지는 사사로운 정에 끄달리지 않는다는 말과 내남없이 일치되는 말이다. 장엄한 말이다. 하지만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겹쳐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문화혁명 이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중국 작가 라오서의 책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그는 비는 모든 이에게 내리지만 결코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 내리기 때문이다. "비가 개인 후에, 시인들은 연잎의 구슬과 쌍무지개를 읊조리지만, 가난뱅이들은 어른이 병이 나면 온 식구가 굶는다. 한 차례의 비는 기녀나 좀도둑을 몇명이나 더 보태주는지,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을 얼마나 내는지 모른다." 그의 문장과 만난 후 일상에 뿌리 내리지 않은 사상이나 관념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 빗소리가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 왜 사는지를 알 수 없어 번민하는 사람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짜부라진 사람들, 투명인간 혹은 잉여적인 존재로 여김을 받는 이들이 보내는 영혼의 발신음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 소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귀에 도달하지 못한 채 우주 공간 어딘가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자면 수취 거부라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시간의 강을 헤쳐가느라 날카로움을 잃어버린 자갈들처럼 우리는 평온한 일상을 뒤흔드는 소리를 짐짓 모른 척 하며 살고 있다. 사력을 다해 절망과 맞서기보다, 뒷걸음치는 데 익숙해진 우리들이 아닌가? 에부수수한 의식 속으로 무력감과 쓸쓸함을 동반한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바람은 예리한 통증이 되어 왼쪽 가슴에서 머리를 관통했다.

누구는 바람소리로 몸을 닦는다는 데 어쩌자고 나는 이렇게 빗소리에 갇힌 것일까? 어느 순간 오규원에서 성경으로, 성경에서 라오서로 분주히 오가던 마음이 현실로 복귀했다. '비가 그치지 않으면 출근길이 불편할 텐데'. 축축하게 젖은 옷과 양말, 버스에서 맡게 될 눅눅한 냄새, 빗물을 튕기며 질주하는 자동차들이 떠올랐다. 아, 삶은 이처럼 진부하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는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 나는 지금 누구의 가슴을 향해 흐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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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13 07-31 06:07)
비를 주시는 분의 사랑을 믿을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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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13 07-31 06:07)
목사님 글이 비가되어 제 마음을 적시네요..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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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13 07-31 06:07)
목사님 글이 비가되어 제 마음을 적시네요..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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