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25 2013년 06월 14일
작성자 김기석

 5. 바르게 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언어와 다른 동물의 의사소통 방식의 근본적인 차이는 인간의 언어가 다양한 말들을 무한히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누구도 말한 적 없는 새로운 문장이 끝없이 생성될 수 있고, 우리 중 누구라도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인간의 언어는 말과 문장 구성의 원리가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의 의사소통 방식과 차별화된다. 이처럼 인간은 문장구성의 원리에 따라 소리를 단어로, 단어를 문장으로 조합함으로써 자연계의 다른 어떤 의사소통 체계도 뒤따를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생각을 빠르고 정확하게 표현해 낼 수 있다. 최초의 인류가 등장한 이래로 말의 생산과 지각을 관장하는 기관인 혀, 입, 지각 체계, 대뇌 구조 및 기제가 중대한 진화를 겪으면서 언어가 출현했다."(랑카 비엘작/롤랑 브르통, <언어의 다양한 풍경>, 시공사, 신광순 역, 2009, 12쪽)


아기들이 말을 배우는 과정을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처음에는 단편적인 언어소를 가지고 자기 뜻을 전한다. 하지만 조금씩 그 언어소들을 적절하게 배치함을 통해 자기 뜻을 명확히 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명사에 적절한 조사나 어미를 붙이는 능력을 볼 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확대될수록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도 다양해진다. 언어는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 혹은 기호가 아니다. 오히려 생각을 가능케 하기도 한다.


성서 종교는 말의 종교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했다. 여기서 '말씀'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다바르'는 에너지로 가득 찬 말이다. 발화와 동시에 수행적 성격을 가진 말, 즉 사건을 일으키는 말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예컨대 성경은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창1:3)고 말한다. 명령과 수행 사이에 틈이 없다. 창조에 대한 보도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대로 되었다'는 말의 이중주로 되어 있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이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흙으로 빚어서 만드시고 자기 앞에 이끌어오셨을 때 그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직 단편적 언어소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담은 언어를 통해 세상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말은 그와의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가 다른 존재와 어떻게 다른지를 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와가 자기 앞에 등장했을 때 아담은 시인이 된다. 자기 앞에 있는 낯선 존재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본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창2:23) 아담이 사용한 말은 '관계의 언어', 즉 두 존재를 이어주는 친교와 소통과 사랑의 언어였다. 


그러나 뱀의 유혹으로 인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음으로 죄가 유입되자 사람의 말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창3:11)는 하나님의 질문에 아담은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창3:12) 아담이 사용한 말은 아담과 하와 사이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언어, 친교와 소통과 사랑을 가로막는 언어였다. 죄는 언어를 타락시킴으로 관계를 망가뜨린다.


불통의 언어가 불통의 세상을 만든다. 바벨탑 사건은 타락한 언어에 대한 심판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바벨탑 사건을 전하면서 성경은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창11:1)고 말한다. 어찌보면 아름다운 시절처럼 보인다.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은 도시를 세웠고, 그 안에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 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알리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명분하에 그런 기획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써서 탑을 쌓았다. '벽돌'에서 획일화의 경향을 보고 '역청'에서 강고한 통제를 본다면 너무 지나친 것일가? 사실 바벨탑 사건은 제국의 교만에 대한 경고였다. 


"역사의 무수히 많은 특정사회는 언제나 모든 것을 '하나로' 환원시키려는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였고 결국 그 사회는 전체주의 국가, 의미를 독점 독단하는 독재국가로 치닫고 말았던 것이다. 독재국가에서 차이는 언제나 미움의 대상이 되었고 의견은 말살되었던 것이다. 그같은 사회 안에서는 공식담화와 지시만이 유일한 언어체계를 구축하게 마련이고 또한 治者는 절대적 지식을 소유한 자로 행세하게 되는 법이다. 그가 발설하는 단어들은 실재와 직접적으로 동일화되며 추호의 오류도 비판도 받을 수 없는 바 절대의 진리인 것이다. 그의 진리는 회반죽과 역청, 불에 달구어 구운 벽돌과 화강암처럼 단단하고 보석처럼 빛나는 것이며 그 어떤 적군도 무너뜨릴 수 없는 바벨탑인 것이다."(서인석, <성서와 언어과학>, 성바오로출판사, 235쪽)


소통의 기제가 아니라 권력을 위한 장치로 작동하는 언어는 늘 동일성을 추구한다. 세상의 모든 독재자들이 언론을 통제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언어의 독점이 허용될 때 전체주의의 문이 열린다. 하나님이 바벨탑을 허물어 사람들을 흩으시고, 세상의 말을 뒤섞어 혼잡하게 하셨다는 말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은총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수용할 때 소통을 위한 진지한 노력이 개시되기 때문이다. 전체주의가 동이불화同而不和의 세계라면, 민주주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강림절 사건은 화이부동의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제자들은 오순절 날 그들에게 내린 성령을 체험한 후 골방문을 열고 나와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외쳤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들이 세계 각국에서 와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제자들의 말을 각기 자기네들이 살던 지방 말로 듣고 경외심에 사로잡혔다. 그날 그들이 경험한 것은 언어와 민족의 차이를 넘어 인류가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요한복음의 첫 구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말로 시작된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지만 하나님 자신이기도 했다. 성경은 예수를 가리켜 육신을 입은 말씀(成肉身)이라 가르친다. 이는 그의 말과 삶 혹은 존재가 틈없이 일치했다는 말이다. 그의 말은 곧 사건이 되었다. 나병 환자를 향해서 '깨끗하게 되어라'(마8:3)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다(마8:26). 눈먼 사람들을 향해 '너희 믿음대로 되어라'(마9:29) 하고 말씀하시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예수의 말은 빈 말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말은 에너지로 가득 찬 말, 곧 다바르였다. 


정치범으로 분류되어 마케루스 산성에 갇혀 있던 세례자 요한은 예수가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 제자들을 보내 물어 보게 하였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마11:4-6)


예수는 존재로 말하는 사람이었지, 말로 자기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사람은 아니었다. 옛 사람도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 /노자 56장)고 말했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말은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던 막스 피카르트의 말도 같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서방의 수도원 운동을 시작하였던 베네딕도 성인의 <수도 규칙>은 침묵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나는 말하기를, '내 길을 지키어 내 혀로 죄짓지 않으리라. 나는 내 입에다 파수꾼을 두었고, 벙어리가 되어 낮추어졌으며, 좋은 일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노라'"고 하신 예언자의 말씀을 우리는 실행하자. 여기에서 예언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침묵의 덕을 (닦기) 위해 때로는 좋은 담화도 하지 말아야 했다면 하물며 죄의 벌을 (피하기) 위해서 나쁜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베네딕도, <수도 규칙>, 제6장, 이형우 역주, 분도출판사, 83쪽)


말에 대한 예수의 교훈은 매우 간결하기 이를 데 없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5:37) 이 말은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할 말을 하라는 말이라기보다는 자기 말을 그럴싸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치장하지 말라는 말일 것이다. 야고보 성인은 자기 혀를 다스리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약3:2)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약3:8)


바르게 말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옳은 말이라 하여 다 좋은 말은 아니다. 친구에게 닥쳐온 불행의 소식을 듣고 먼 길을 달려와 밤낮 이레 동안을 땅바닥에 앉아 있었던 욥의 세 친구들은 아름다운 우정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입을 여는 순간부터 그들의 말은 채찍이 되어 욥을 후려치기 시작한다. 옳음에 대한 강박에 붙들린 사람일수록 타자에 대해 가혹한 경우가 많다. 겉과 속이 다르거나 꾸며대는 말(綺語), 허망한 말(妄語), 이간질하는 말(兩舌), 험한 말(惡口)이 넘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 꼭 필요한 것이 참 말이다. 참 말은 세우는 말이고 살리는 말이다. 말이 살아야 세상도 산다.

목록편집삭제

정병철(13 10-05 06:10)
감사합니다 목사님.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