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24 2013년 06월 14일
작성자 김기석

 4. 왜 일을 하는가? 바른 직업 윤리는?

허리가 구부정한 농부가 뒷짐 진 손에 괭이를 들고 논두렁 위를 천천히 걸어간다. 딱히 할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물고를 보려는 것일까? 그 늙은 농부에게 땅은 그저 힘겨운 노동의 현장이 아니다. 그곳이야말로 그의 존재가 가장 값지게 드러나는 곳이다. 들판에 엎드려 일하는 이들을 바라본다. 마치 땅과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인다. 일을 낭만화할 생각은 없다. 성경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어긴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람에게 먹을거리를 내주던 땅은 이제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척박한 땅, 그곳에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고투해야 했다. 땀이 흘러야 겨우 곡식을 조금 내주는 땅. 그 땅 위에서의 삶은 곤고함 그 자체이다. 인간의 노동은 정말 죄의 결과인가? 사실 이 대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좀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의 경험을 이야기 속에 담아냈다. 인간과 땅의 소외는 노동의 힘겨움을 원인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시민들은 일을 하지 않았다. 일은 노예들이 전담했다. 육체 노동은 천한 것으로 여겨졌다. 근래 들어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우리 사회는 몸 노동을 하는 이들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전쟁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박노해, <노동의 새벽> 중


1980년대 초반, 전쟁같은 노동일에 지친 이들의 마음이 읽힌다. 밤낮 없이 일해야 했던 그들에게 노동은 신성하지도 않고, 삶의 존엄함으로 이끄는 통로도 아니었다. 노동의 현실은 탈출하고 싶지만 탈출할 수 없는 질곡이었다. 진이 빠져 허깨비가 된 것 같은 암담함이 당시 노동 계층이 경험했던 현실이었다. 소외된 노동처럼 사람의 진을 빠지게 하는 일이 없다.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생산과정으로부터의 소외가 심화될 때 일은 기쁨이 아니라 벗어버려야 할 짐이 된다.


상황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현실은 마찬가지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돈의 지배 하에 살고 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은 구매력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자기 능력 이상의 성과를 얻기 위해 자기를 착취한다. 한병철 교수는 현대 사회를 '피로사회'라는 말로 요약했다. 행복을 위해서 기울이는 노력이 오히려 소외를 심화시키고, 자기로부터의 분리를 가속화하고 있다는 아이러니. 생산되는 물건의 생의 주기가 짧아질수록 시간은 더욱 분절된다. 분절된 시간은 지속이 없기에 향기 또한 없다. 향기가 배어 있지 않은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 그것처럼 가혹한 일이 없을 것이다.


다시금 묻는다. 일 혹은 노동은 신의 저주인가?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을 맡기신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1:28) '땅을 정복하라'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인간의 욕망에 따라 함부로 착취하거나 왜곡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정복하라'는 말과 짝을 이루는 말은 '땅에 충만하라'이다. 그렇다면 그 말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라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위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스리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다radah'는 '돌보다'라는 뜻으로 새겨져야 한다. 돌본다는 것은 각자에게 품부된 생명의 몫을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는 뜻일 것이다. 타락 이전의 인간은 하나님의 동산을 돌보는 청지기로 부름받고 있다.


기쁨으로서의 일과 저주로서의 일 사이에서 우리는 흔들린다. 옛 사람들은 저주로서의 노동을 누군가에게 전가시키는 방식으로 저주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일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성직만이 소명이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했다. 직업이 곧 소명이라는 것, 어쩌면 이런 인식의 변화야말로 근세를 여는 문고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일을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자기들이 수행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지속적인 창조에 동참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니라 복의 계기가 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종교개혁자들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히브리인들은 일을 소중히 여겼다. 랍비 교육에 반드시 몸 노동이 포함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고등교육을 받았던 바울은 천막 깁는 일을 했다. 그는 어느 곳으로 옮겨가든지 자기 손으로 노동하여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렇기에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일을 소홀히 하는 신자들을 준엄하게 꾸짖을 수 있었다.


"우리는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은 일이 없고, 도리어 여러분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으려고, 수고하고 고생하면서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살후3:8)


그렇기에 그는 무질서하게 살면서 일은 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것은 기독교인다운 삶이 아니라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조용히 일해서, 자기가 먹을 것을 자기가 벌어서 먹으십시오."(살후3:12) 노동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노동하지 않음이 부끄러움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직업이 '목수'였음을 안다. 사실 목수라고 번역된 단어 '테크톤tekton'은 나무만 다루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나무나 돌을 다루는 장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건축 노동자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솜씨 좋은 테크톤이었음이 분명하다. 예수께서 자기 고향에 가서 회당에서 가르쳤을 때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이 그 증거이다.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놀라 말한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막6:2) '그 손'이라는 표현이 이채롭다. 예수의 손을 떠올려본다. 마디조차 보이지 않는 곱디고운 손이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굳은 살이 박힌 손, 마디 굵은 손, 더러 흉터도 보이는 손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17세기의 프랑스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1593-1652)는 <아버지의 작업장에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형상화해냈다. 어두운 작업장에서 아버지 요셉이 일하고 있다. 촛불을 밝혀들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 환하다. 주름 잡힌 아버지의 얼굴은 평온하고, 노동으로 단련된 두툼한 손과 팔 근육이 굳건하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깊은 신뢰가 엿보인다. 그 장면은 노동과 거룩함이 둘이 아님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 가족교회(Sagrada Familia)는 놀랍게도 예수의 아버지 요셉을 복권시키고 있다. 아주 오랫동안 성 가족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에서 요셉은 드러나지 않거나, 주변적인 인물로 취급되곤 했다. 하지만 성 가족교회를 설계하고 시공한 가우디(Gaudi)는 요셉을 성가족의 중심 인물로 내세웠다. 성 가족 교회에 있는 '탄생의 파사드'에는 요셉이 일하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그의 머리 위로는 분주히 날아다니는 일벌들이 새겨져 있다. 그는 이름도 빛도 없이 가정을 돌보는 가장들의 모델이 되고 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중풍병자를 고쳐주자 유대인들은 안식일 계명을 어겼다며 그를 비난하고 박해했다. 그 때 예수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말했다. 예수는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 일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은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일이고, 끊어진 관계를 잇는 일이다. 예수는 일이 어떻게 신성할 수 있는지를 일깨워준다. 


오늘의 현실은 노동의 신성함을 비웃는 듯하다. 일이 곧 돈벌이로 인식되는 사회는 불행하다.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자기를 혹사하고, 자연을 착취하고,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다. 아름다워야 할 관계는 점점 피상적으로 변한다. 불안과 외로움이 깊어간다. 사람들은 그 불안과 외로움의 대용물에 매달린다. 더 많은 소유와 쾌락을 추구하지만 마음은 늘 어딘가를 떠돈다. 뿌리 뽑힘, 고향 상실, 안식 없음,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제야말로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해야 할 때이다. 이익과 전혀 무관한 일에 자기를 바치는 이들이 있다. 세상 도처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벗이 되어주기 위해 안락한 삶을 내려놓은 사람들 말이다. 분쟁 지역에 머물며 찢겨진 사람들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가서 그들의 벗이 되어 주는 사람들, 인간의 과도한 욕심으로 인해 파괴되고 있는 자연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 그들은 인간의 일이 얼마나 거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들이다.


티쿤 올람(tikkun olam), 망가진 세상을 치유한다는 뜻의 히브리말이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태어났을 때보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놓고 가는 것이 인생의 과제라고 가르친다. 각자에게 품부된 일이 무엇이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고, 망가진 세상을 치유하려고 노력한다면 노동의 소외는 극복될 것이다. 김준태 시인의 절창이 떠오른다.


오오,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

우리 이제 흐르는 강물에 발을 적시며

강 건너 마을 사람들을 찾으러 나가자

우리 이제 땅 위의 칼들을 녹슬게 하고

바람이 어찌하여 불어오는가를 귀 기울이자

  -<인간은 거룩하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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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10-05 06:10)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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