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23 2013년 06월 14일
작성자 김기석

 3. 죄란 무엇인가?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나?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 <빠삐용>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꿈 속에서 주인공은 끝도 없이 펼쳐진 모래밭 위를 걸어간다. 그런데 저편에 탁자를 앞에 놓고 법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그들 앞에 선 주인공은 항변하듯 말한다. '난 죄가 없소,' 그러나 법관들은 그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죄목은 '인생을 허비한 죄'였다. 그러자 빠삐용은 고개를 떨구고 말한다. '유죄요.' 절해고도에 갇혀서도 자유를 향한 꿈을 접을 수 없어 끝없이 탈출을 감행하던 그의 쓸쓸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한때 '인생의 허비한 죄'로 유죄 선고를 받은 빠삐용에 빙의되어 지냈던 적이 있다.


'죄'란 무엇인가? 국어 사전은 '양심이나 도의에 벗어난 행위'를 죄로 규정하고 있다. 양심이나 도의라는 말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정의에서 죄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죄罪'라는 한자어에는 죄가 빚어내는 결과가 담겨 있다. 죄라는 글자는 '그물 망网' 부와 '아닐 비非'로 구성되어 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물에 걸린 듯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죄라는 글자는 어쩌면 죄를 저지른 이가 겪을 수밖에 없는 부자유함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영영사전을 찾아보면 죄(sin)에 대한 규정이 조금 다름을 알 수 있다. 죄는 '신으로부터의 소외, 멀어짐', 또는 '신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이다. 죄는 신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기독교는 인간을 죄인이라 가르쳤다.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신의 금지명령을 어김으로 인간은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의 삶은 죄의 역사라는 것이다. 사실 창세기의 원(原) 역사 부분(1-11장)은 인간의 죄가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에덴 이후에 태어난 첫 사람인 가인은 형제 살해자가 되었고, 가인의 후예인 라멕을 거쳐 노아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갈등과 폭력의 드라마 그 자체였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노아와 그 가족을 제외하고는 홍수를 통해 모두 멸절시켰다. 하루하루 창조를 마치신 후 그 결과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하나님의 한숨이 느꺼워진다. 


성경의 이야기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에 있다는 사실을 쉽게 납득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냐는 것이다. 타당한 항변이다. 하지만 성경의 이야기는 태곳적에 일어났던 일을 전해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의 유한한 삶과 실존의 어둠을 밝혀주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의 원역사 기록은 과거가 아니라 보편적 현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말이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흙이라는 뜻의 '아다마'에서 나온 말이다. 다시 말해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모든 인간은 다 아담이라 할 수 있다. 신의 금지 명령을 어긴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자유가 없었다면 위반도 없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신처럼 되리라'는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 성경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신으로부터의 소외'가 일어났고 인간은 보편적인 죄의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성 아우구스띠누스는 이것을 "영원한 사물로부터 잠세적인 사물에로, 풍족함에서 빈곤에로, 확고함에서 불안한 세계로 추방당한 것"(아우구스띠누스, <참된 종교>, 성 염 역주, 분도출판사, 85쪽)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삶의 기본적인 정황은 불안이다. 그것은 대상이 없는 존재론적인 불안이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말은 교리적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성찰적으로 접근할 때 그 본래적 의미가 드러난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고백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지 못하는 인간의 유한성과 그에 따른 절망, 그리고 불안에 대한 고백이 아닐까? 바울은 자기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그 근거로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롬7:22-23)


어쩌면 기독교 초기 신학자들은 유혹에 속절없이 끌려가는 인간의 나약함 혹은 죄에의 끌림, 뿌리 깊은 죄성을 가리켜 원죄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동생 아벨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살의를 품은 가인에게 신의 엄중한 경고가 떨어진다.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4:7) 그러나 가인은 그 죄의 끌림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죄에 속절없이 끌려가는 것일까?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파악하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교만이라고 번역되는 단어 휴브리스(hubris)는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기를 세계의 중심으로 파악하는 이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과 질서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세상에 갈등과 고통이 만연한 것은 그러한 자기 중심성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에 담긴 신학적 함의가 다양하지만, 이 말은 인간은 하나님의 현존을 다른 이들에게 상기시키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실존적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누가 그럴 수 있는가?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의 비루한 역사와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으신다. 특히 제국으로 상징되는 위계사회의 맨 밑바닥층을 형성하고 있는 이들의 인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그들의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역사에 개입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동일성 속에서 자족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형상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빌2:6-7a)


이른바 성육신의 신비이다. 전적 타자인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철저히 비우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그런 자기 존재에 대한 배신이야말로 죄라 할 것이다. 자기를 확장 혹은 강화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 일체의 행위 또한 죄라 할 수 있다. 어느 철학자는 원본으로 태어나 복사본으로 사는 것이 죄라 했다. 각자에게 품부된 삶의 몫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죄라는 말이다. 


기독교는 저지른 죄만을 죄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도 죄이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도 죄이다. 나태함이 그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선택의 가능성을 뱀에게 넘김으로 죄에 빠졌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의 죄는 무엇인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면서도 자기 집 문간에 있는 거지 나사로를 돌보지 않은 죄였다. 사회적 불의에 대한 침묵 또한 죄라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망가뜨리는 행위 또한 죄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자신의 죄인됨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자기의 죄를 직시할 용기도 용의도 없는 이들은 죄에 대한 담론을 독점함으로써 죄책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상세한 규정이 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규정은 사람이 이웃들과 더불어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원칙이다. 하지만 종교체험은 제도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본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기 일쑤이다. 안식일 계명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안식일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주어졌지만, 오히려 그 계명이 사람들의 자유로운 삶을 옥죄는 올무로 작동했다. 율법의 다른 규정도 마찬가지이다. 먹고 살기 위해 부득이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도 죄인으로 규정되었다. 동물을 잡거나, 부정한 것들을 치워야 하는 이들은 한 사회의 존속을 위해 꼭 필요한 이들이지만 율법체제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되었다. 


인간의 합리적 이해에 포섭되지 않는 일들을 사람들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다.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은 병 자체로 인한 힘겨움 말고도 사회적 배제라는 또 다른 징벌을 감당해야 했다. 악령에 들린 자나 가난한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죄'에 대한 담론은 이처럼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그런 사회적 배제를 통해 얻는 이익이 없다면 사람들은 그렇게 집요하게 누군가를 죄인으로 규정하려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예수 시대의 성전체제는 용서에 대한 권한을 독점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예수는 '죄'와 '속죄'에 대한 담론을 독점하면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성전체제를 일러 '강도의 소굴'이라고 외쳤다. 성전체제와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예수는 인습적 세계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풀어내 하나님의 백성으로 복귀시켰다. 병든 사람들에게는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했고, 귀신을 꾸짖어 내쫓음으로써 사람들을 온전히 회복시켰고, 자기 삶을 긍정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이를 가리키며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했다. 간음하다가 잡혀 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하고 이르셨다.


용서가 지향하는 것은 삶의 회복이고 관계의 회복이다. 하지만 용서의 담론도 값싸게 허비되어서는 안 된다. 악마적인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이중의 고통을 안겨주는 일이 된다. 피해자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사람들을 용서해야 할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넬슨 만델라를 도와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이끌었던 성공회 대주교 데스몬드 투투는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용서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자기의 경험에 입각해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는 백인들에 의해 오랜 세월 동안 끔찍한 인종차별을 겪어온 흑인들을 용서의 자리에 초대했다. 


"용서와 화해는 진실을 외면하는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등을 두드려 주고 잘못을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다. 참된 화해는 끔찍함, 학대, 고통, 타락, 진실을 드러낸다. 그렇게 해서 오히려 상황이 악화될 때도 있는 위험한 시도이지만, 결국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음이 드러난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해결할 때만 진정한 치유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비 화해에는 사이비 치유만 뒤따른다."(데즈먼드 투투, <용서없이 미래없다>, 홍성사, 319쪽)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진실과의 정직한 대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용서는 피해자가 더 이상 피해자 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살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비인간적 불의를 겪은 사람들은 자칫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결국 그런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용서는 가해자들에게도 자유를 주는 일이지만, 피해자 자신이 해방되는 일이기도 하다. 예수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과 조롱하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시며 하나님께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용서해 버리심으로 피해자가 되기를 거부하신 것이다. 사랑과 관용으로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버릴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멀지만 가야만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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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10-03 09:10)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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