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15 2013년 05월 09일
작성자 김기석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셨다.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에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곳이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나사로는 식탁에서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12:1-3)

 지금까지 요한은 장면 전환을 위해 '그 뒤' 혹은 '이틀 후'라는 표현을 즐겨 써왔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못하는 허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바로 이 장면에서 그는 아주 구체적인 시간을 드러내고 있다. '유월절 엿새 전'. 세례자 요한에 의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지칭된 예수의 운명의 날이 다가왔음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베다니, 고통과 눈물의 땅이었던 그곳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죽음에서 소생한 나사로도 예수의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 기쁨의 자리에서 마리아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을 한다.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마리아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다만 자기중심이 명하는 대로 할 뿐이다. 혹시 아가서의 한 대목을 떠올렸을까? "임금님이 침대에 누우셨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내뿜었어요."(아1:12). 시인 김남조는 <막달라 마리아>라는 시에서 이 아름답고도 영적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눈물이며는/눈물에 감아 빗은 머리채며는/잘 비벼 적시는/감송향유며는/아아 탕약보다 졸아든 평생의 죄,/모든 참회며는/주님의 발에/간절히 한 번만 닿아보게/허락하시올지"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장차 예수를 넘겨줄 가룟 유다가 말하였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12:4-5)

가룟 유다뿐이겠는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마리아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머리칼로 예수의 발을 닦아드린 그 행위의 외설성 보다는 ‘아깝다’는 감정에 그들의 마음은 울가망해졌다. 사랑보다는 명분, 관계보다는 일에 집중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가룟 유다는 자기 속에서 솟아오르는 분노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제 가능성을 언급하며 여인을 비판한다. 반박하기 어려운 명분이다. 하지만 도덕적 당위로 모든 일을 평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유다는 여전히 스승의 중심과 접속하지 못한 채 버성기고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12:7-8)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예견하고 장례를 미리 준비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마리아의 헌신을 그렇게 받아들이신다. 이제 거의 마지막에 이르렀다. 예수가 떠난 이후에도 세상은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제자들이 집중해야 할 것은 스승 예수의 존재 자체이다.

다음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12:12-13)

대제사장들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으로 인해 많은 유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자, 나사로까지 죽여 없앨 작정을 한다. 자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조차 무화시키려고 한다. 눈먼 인도자란 바로 이런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은 말末을 붙들고 본本은 버린다.

베다니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은 유월절 순례 차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에게 빠르게 전파되었다. 해방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기 마련인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의 행렬은 메시야를 항한 군중들의 열망에 기름을 주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낀 것일까. 경건한 이방인들까지도 예수와 사적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군중들의 기대와 예수의 길 사이에는 건너기 어려운 간극이 있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12:23-26)

예수가 말하는 '영광을 받을 때'는 보내신 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고,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가는 때, 곧 죽음의 시간을 가리킨다. 영광과 죽음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땅에 떨어진 밀알 하나의 비유는 다름 아니라 예수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고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그를 따르는 이들이 능동적으로 선택해야 할 삶의 길이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고 미워하는 사람은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라는 말은 같은 사실을 달리 표현한 것뿐이다.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비루한 생을 유지하기 위해 영혼을 팔지 말라는 말이다. 잘 죽을 수 있어야 잘 살 수 있다. 본회퍼 목사는 <자유의 도상에 있는 정거장>이라는 시에서 죽음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자, 이제 오너라, 영원한 자유에의 도상에 있는/최고의 축제인 죽음이여”. 죽음을 향해 오연하게 ‘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라면 예수가 계신 곳에 우리도 함께 있어야 한다. 마른 땅만 골라 걸으며 예수를 좇을 수는 없다. 지금도 예수는 세상의 그늘진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그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12:27-28)

예수는 지금 예기되는 죽음의 현실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몸으로 접촉해왔던 세상 모든 것들과의 분리, 사랑하는 이들과의 작별, 기억의 소멸...자연스런 죽음이 아니라 폭력적인 죽임의 현실을 생각하며 예수는 괴로워한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병든 이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던 이의 괴로움. 윤동주는 <십자가>라는 시에서 예수를 '행복했던 사나이'라고 말했지만 정말 그럴까? 예수의 마음이 일렁인다. 살고 싶은 마음과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마음이 부딪쳐 삼각파도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떨쳐버리고 단호하게 말한다. '아니다.' 이 단어 하나가 천둥소리처럼 우렁우렁 가슴에 울려온다. 이 한 마디를 하지 못해 우리 삶이 누추하다. 예수는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고 말한다. '이 일'은 죽음을 받아들임으로 죽음을 넘어서는 것,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니다'라는 말을 경계로 하여 땅과 하늘이 공명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아직 얼마 동안은 빛이 너희 가운데 있을 것이다.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다녀라. 어둠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빛이 있는 동안에 너희는 그 빛을 믿어서, 빛의 자녀가 되어라."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떠나서 몸을 숨기셨다.(12:35-36)

사람들은 예수의 내면에서 일어난 그 치열한 고투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어떻게 공명하고 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들은 여전히 영적인 어둠 속에서 헤맬 뿐이다. 그들은 '인자'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그가 죽음을 통해 죽음을 넘어서는 존재임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그들에게 다정하게 권고한다.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다녀라. 어둠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게 하여라." 어스름이 내렸다 하여 지레 날개를 접지 말라. 빛이 없다면 스스로 빛이 되어서라도 갈 길을 가라. 외부의 빛이 가물거린다면 그 빛을 안으로 모시면 된다. 빛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신신당부를 하신 후 그들을 떠나서 몸을 숨기셨다.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많은 표징을 그들 앞에 행하셨으나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아니하였다. … 그들이 믿을 수 없었던 까닭을, 이사야가 또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나에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12:37, 39-40)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여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일까지 행하셨건만 사람들은 아직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기 욕망의 터 위에 집을 짓느라 사람들은 다른 삶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예수의 이야기 혹은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그 이야기에 합류할 생각은 없다. 그들은 믿지 않은 게 아니라 믿을 수 없었다. 믿음이란 인습에 찌든 자아를 여의고 더 큰 생명을 향해 자기를 내던지는 모험이다. 마음이 무디고, 눈이 어둡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들 눈 앞에서 생명의 춤판이 벌어져도 흘낏 한번 바라볼 뿐 그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 춤판에 뛰어들려 하지 않는다. 자기를 잃을까 두려운 까닭이다. 이사야는 그런 상황을 일러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불신의 책임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까? 그렇지 않다. 애굽 온 땅에 재앙이 닥쳐올 때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셨다는 말이 그렇듯이,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고는 돌이킬 수 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이르기 위해 사용한 말일 뿐이다.

지도자 가운데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으나,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 때문에,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12:42-43)

모든 사람이 다 어둠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빛을 빛으로 인식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인식이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백성의 지도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믿는 이들이 생겼지만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그 사실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들의 인식은 안전에 대한 욕구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이다.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진리의 세계에 뛰어들기 어려운 법이다. 많은 이들이 진리의 세계에 성큼 뛰어들지 못하고 그 언저리만 맨돈다. 믿음은 결단이고 모험이다. 안일한 행복에 붙들린 이들은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다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가엾지 않은가? 차라리 그들이 무지함 속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길을 보면서도 그 길을 걷지 않는 자의 비애는 깊고도 깊다.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자의 영혼에는 자유가 없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아니한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 나를 배척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내가 말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12:46-48)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중첩된 어둠에 짓눌린 채 희망없이 살아가는 이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혼돈과 암흑과 공허로 가득한 세상을 찢고 빛이 도래했다. 그 빛은 사람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 빛, 치유하는 빛, 새로운 생명을 낳는 빛이었다. 예수는 싸늘한 심판관으로 세상에 오지 않았다. 예수는 당신을 배척하고 조롱하고 죽이려는 무리까지 받아 안으셨다. 그들의 폭력을 용서하심으로 피해자로 전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빛이신 그 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들의 삶이 곧 그들의 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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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10-02 09:10)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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