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22 2013년 05월 09일
작성자 김기석

6.2 신에 대한 믿음은 필요한가?

섬마을을 떠돌아다니며 잊혀져가는 삶의 이야기를 채집했던 강제윤 시인을 통해 가슴이 아릿해지는 이야기를 들었다. 남도의 섬을 떠돌던 그의 발길이 어느 날 영광군 안마도 신기마을에 이르렀다. 시인은 그곳에서 84세의 할머니를 뵙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외로워서 어떻게 견디시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교인들이 더러 찾아와 벗이 되어주어 고맙다면서, 정작 교회에는 다니지 않는다 하셨다. 할머니는 혼잣소리처럼 이런 말을 덧붙였다. “교회 다니라 하면 나가 그라요. ‘하나님 아부지가 누구는 차별하겄소. 교회 다니나 안 다니나 아부지 자식이제. 어떤 자식은 자식 아니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다 같이 짠한 자식이제. 교회 안 댕긴다고 자식이 아니겄소. 바람만 불어도 아부지 살려주시오, 그리고 사는 세상 아니요.’ 그라요 내가.”(한겨레신문, 2010년 8월 4일 자 요약)

이 할머니는 등록 교인은 아니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할머니가 말하는 '하늘' 혹은 '아부지'가 기독교가 가르치는 '야훼 하나님'이 아닐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신'일 수도 있고, '천지신명'일 수도 있다. 제도 교회의 언술 체계 속에 포섭되지 않는 이 할머니의 믿음도 믿음일 수 있는가?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 있겠고, 고개를 가로젓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신은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부동의 동자'라느니 '제일원인'이라느니, '존재 자체'라느니, 논리정연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곧 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성적으로 납득했다고 해서 감정이나 의지가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이 없다면 사람들은 신에 대해 묻지 않을 지도 모른다. 신의 존재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죽음과 죄책과 고뇌, 그리고 무력감이라는 한계상황에 직면할 때면 사람들은 자기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합리적 이성에 통합되지 않는 삶의 여변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당혹감을 느낀다. 20세기 인류의 추문인 아우슈비츠을 겪으며 예민한 한 사상가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가 가능한가?'를 물었다. 쓰나미와 지진, 그리고 기후 변화로 인해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재난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 현실을 목격할 때마다 우리에게 떠오르는 것은 신의 사랑과 신의 전능성에 대한 의문이다. 어떤 이들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신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신의 존재는 풍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의 욕망을 하늘에 투사한 것이 곧 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신의 존재는 예나 지금이나 문제적이다.

무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을 인과관계를 가지고 푼다.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 현실은 전생의 우리가 혹은 우리의 부모가 쌓아온 업의 결과라는 것이다. 업業, 곧 '카르마'라는 말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고개를 떨군다. 업보라는 말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일거에 무지르는 전가의 보도이다. 업을 믿는 이들은 업의 사슬을 끊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선업을 쌓아 악업에서 해방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유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이들은 세계를 목적론적으로 인식한다. 창조로부터 시작된 시간은 마지막을 향하여 나아간다. 그들에게 있어 삶은 신이 품부한 소명을 수행하는 과정이 된다. 신이 우리에게 존재를 주었다면 우리의 삶을 그 분께 돌려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신은 창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고 숨기기도 하신다. 그러기에 삶의 시간은 신의 뜻을 묻고, 그 물음에 스스로 답하는 과정이 된다. 신은 세속적이고 표면적인 역사의 이면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나가고 있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아주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계1:8)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엡4:6)

시몬 베유는 "신은 오직 부재의 형태로 천지만물 속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한한 인간은 숨어 계시는 신을 견디기 어렵다. 그래서 신의 형상을 만들고 그 신을 기꺼이 경배한다. 소위 말하는 우상이 그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산에 올라가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출애굽 공동체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아론에게 달려가 자기들을 이끌 신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아론은 백성들이 모아 온 금을 녹이고 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든다. 그것을 보고 백성들은 외친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출32:4) 사람들은 자기들을 이끌 신이 없는 시간의 공포를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공포를 다독여 줄 유사 신들을 만든다. 그것은 돈일 수도 있고, 출세일 수도 있고, 충성을 바쳐야 할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사 신들을 경배하는 이들은 자기 속에 깃드는 헛헛증을 떨쳐버릴 수 없다.

다시금 시몬 베유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중력과 은총>에서 말한다. "신에 대한 믿음 속에 사는 자는 신앙을 잃을 수 있다." "그러나 신 안에 사는 자는 결코 신앙을 잃지 않는다."함석헌 선생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믿을 이지. 다시 말한다면 받아들일 하나됨이지 뜯어보고 알 물건이 아니다. 믿으면 아는 데 이르지만, 감히 알기부터 먼저 하려 하면 뒤집혀진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보면 죽는다고 했다. 그는 그 앞에 우리가 보일 이지 우리가 볼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앞에 나갈 때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야 한다. 자기를 전적으로 부정함이다. 자기를 부정하면 입으로 불러 우상화한 하나님도 사라지고 영이 된다."(함석헌 명상집, <너 자신을 혁명하라>, 김진 엮음, 오늘의 책, 174쪽)

성경은 하나님을 경험한 혹은 경험했다고 확신하는 이들의 증언으로 가득 차 있다. 신을 체험한 이들은 자기들의 체험을 온전히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해 당황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은유를 사용한다. 은유란 쉽게 말해 낯익은 대상을 통해 낯선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언어라는 기호의 한계에 직면할 때 사람들은 은유를 동원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수많은 은유가 있다. '목자, 빛, 반석, 피난처, 요새, 산성, 방패, 힘,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을 돕는 재판관…'.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은유가 발설된 상황을 생각해보면 신의 실체에 조금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그들이 경험한 것은 자기 한계를 넘어서도록 해 준 낯설면서도 익숙한 어떤 힘이다.

그 낯선 힘 혹은 존재 앞에 설 때 느끼는 숭고의 감정을 루돌프 오토는 '누미노제'라는 말로 설명했다. 개념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비합리적인 체험을 할 때 사람은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의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자신이 어쩔 수 없는 피조물임을 존재론적으로 직감하는 것이라 하겠다. 예수는 어느 날 게네사렛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시몬의 배에 올라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말을 마치신 후 시몬에게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눅5:4) 하고 말씀하셨다. 시몬은 자기들이 밤새도록 애썼지만 고기를 잡지 못했다면서 그래도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다고 말한다. 그들 일행이 그물을 내리자 거둬 들이지 못할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다. 그 때 시몬 베드로는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한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5:8) 바로 이것이다. 시몬 베드로는 그 놀라운 이적을 통해 자신의 피조성과 죄성을 깨달았다. 양떼를 돌보던 모세는 호렙산에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서 없어지지 않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 다가가다가 신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자기 발의 신을 벗어야 했다. 신을 벗는다는 말은 어쩌면 그가 살아오는 동안 형성해 온 '자아'를 내려놓는다는 말일 것이다. 신 앞에서 '자아'는 물거품처럼 스러지고 만다.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사울은 빛 가운데서 그에게 육박해 오는 부활하신 이와 만나 앞을 보지 못하게 된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은 그때까지 자명한 것으로 여겨왔던 모든 것들이 의미를 잃고, 그가 극심한 혼돈 속에 있었음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하나님은 그처럼 우리의 존재를 깨뜨리고, 꿰뚫고 들어온다.

예수는 새벽마다 하나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기 위해 엎드리곤 했다. 그렇기에 그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요10:38, 17:21)고 말할 수 있었다. 제자인 빌립이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청하자 예수는 정색을 하고 말한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요14:9) 세상에는 신적 존재를 드러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삶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우리를 세우는 이들이다.

신의 존재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객관적 답이 없다. 신을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 일상적 사고를 넘어 우리 영혼을 고양시키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 속에서 사람들은 신의 숨결을 느낀다. 신은 체험의 대상이지 인식의 대상은 아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해하거나 해석하려는 노력을 내려놓고 속에서 빛이 솟아오를 때까지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침묵 때문에 괴로웠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탄식했다. 그러나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신에게 자기 운명을 맡겼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23:46). 이해를 넘어서는 신앙이다. 십자가 밑에 서 있던 백부장은 그런 예수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신과 자유를 찾아 평생을 떠돌았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왜 사람들이 현상 배후에 있는 불가시의 세계를 추구하는가를 묻고는 새로운 눈, 새로운 귀, 새로운 오감, 새로운 두뇌를 가지고 자기의 출발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후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인간의 막중한 의무는 신의 행진 리듬을 해석하거나 밝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덧없는 인생의 리듬을 가능한 한, 신의 리듬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우리 썩어 없어질 인간은 불멸을 얻는 데 성공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죽음을 모르는 일자(一者)와 협력할 수 있다."(니코스 카잔차키스, <돌의 정원>, 열린책들, 264쪽)

신은 존재하는가? 신을 믿어야 하나? 이 물음은 여전히 열려 있다. 이 물음은 각자 자기 삶을 통해 대답해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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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06-02 03:06)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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