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21 2013년 05월 09일
작성자 김기석

6.1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얕은 구릉 지대에 둘러싸인 갈릴리의 작은 마을 나사렛. 예수는 삶의 시간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살 수 밖에 없었던 곳.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왔으나 오랜 세월 로마의 압제적 지배를 떨쳐버릴 수 없었던 역사의 암흑기. 예수는 그 시대 한 복판에 던져졌다. 스스로 택하지 않았으나 그런 시공의 제한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운명? 예수의 몸과 마음 속에는 그가 태어난 곳과 살았던 시대의 흔적이 새겨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최승자 시인의 <일찌기 나는>에 나오는 이 한 구절은 우리를 일상 속에서 잊고 살았던 질문 앞에 세운다. 40억 년이라는 장구한 우주의 역사에 비하면 우리 삶의 시간은 티끌에 지나지 않지만, 그 티끌로서의 삶도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던가? 나의 있음과 없음이 나 혹은 내 주변의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나는 왜 없지 않고 있는가?' 아무리 되뇌어도 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답이 없다고 하여 살기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답 없는 삶을 산다는 것, 어쩌면 그게 운명인지도 모른다. 가끔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허청거리기도 하는 것은 비존재의 끌어당김 때문일 것이다. 유대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삶의 가능성을 박탈당하고 비인간이 되기를 강요당했던 사람, 프리모 레비의 넋두리 앞에 설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따스한 집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는 당신,

집으로 돌아오면

따뜻한 음식과 다정한 얼굴을 만나는 당신,

생각해보라 이것이 인간인지.

진흙탕 속에서 고되게 노동하며

평화를 알지 못하고

빵 반쪽을 위해 싸우고

예, 아니오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죽어가는 이가.

생각해보라 이것이 여자인지.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이름도 없이,

기억할 힘도 없이

두 눈은 텅 비고 한겨울 개구리처럼

자궁이 차디찬 이가

이런 일이 있었음을 생각하라,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서시 중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정말 루머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일상의 패턴 속에 갇히고, 버릇을 따라 살다보면 내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느냐가 삶의 모든 것이 되어 버린다. 의미가 소거된 자리에 남는 것은 벌건 욕망 뿐이다. 삶은 그저 그런 것인가? 탄생과 죽음 사이에 걸린 외줄 위에서 곡예하듯 살다가 슬쩍 저 너머로 가버리면 그만인가?

살라는 명령은 받았으나 어떻게 살라는 명령은 받지 못했기에 우리는 방황한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 서면 누구든 막막해진다. 안도현 시인은 <삶이란 무엇인가> 묻고는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적 현실과 마음 풍경을 슬몃 그려보인다.

겨울 밤, 가끔씩 서로 가려운 등을 긁어주는 것,

가끔씩은 서로 싸리나무회초리가 되어 차륵차륵 소리가 나도록 때리기도 하는 것,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없고 머물고 싶을 때 머물 수 없으나,

늘 떠나고 싶어지고 늘 머물고 싶어지는 것

인생은 마치 미로 속을 더듬더듬 걸어가는 것과 같지 않은가? 어느 순간 인생의 비의에 접근한 듯 하다가도, 잠시 후 오리무중의 안개 속에 갇히기도 한다. 스스로 삶을 기획하고 구성하는 자유는 질곡이 되기도 한다. 점묘법(pointilism) 화가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점을 찍어 풍경과 인물을 빚어낸다. 그 고단하고 막막한 작업을 그들은 어떻게 견딜까? 그들은 어쩌면 하루하루의 점철이 인생임을 넌지시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삶은, 알 수 없어도 막막해도 아득해도 걷지 않을 수 없는 길이다.

예수도 그런 질문을 품고 살았을 것이다.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자기를 보내신 분의 뜻을 묻곤 하던 그분이 아니던가. 해가 떠오르기 전, 아직 사위가 어두울 때 그는 한적한 곳을 찾아가 절대자 앞에 엎드리곤 했다. 그 시간 그는 신에게 무엇을 여쭙고, 무엇을 구했을까?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그는 신 앞에 엎드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실존의 모호성에 포위된 삶을 하나님께 가져갔다.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 앞에 섰던 이들은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한다. 그래서 예언자 이사야는 사람들에게 말한다."악한 자는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사55:7) 참 삶이란 '악한 길',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창세기의 첫 대목은 죄가 유입되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죄는 소외시키는 힘이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뒤틀어 놓았다. '마주 봄'의 관계가 '등 돌림'의 관계가 된 것이다. 그 등 돌림의 결과는 참담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인간과 동물이 먹을 식물을 내던 땅은 엉겅퀴와 가시를 내기 시작했다. 사람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땅으로부터 소외된 결과 노동은 고통이 되었다.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정조는 '불안'과 '방황'이었다.

성경은 참 삶이란 주님께 돌아가는 과정이라 말한다. 실락원을 넘어 복락원을 꿈꾸며 나아가는 길이 곧 인생이란 말이다. 하지만 시간은 불가역적이기에 뒤로 돌아갈 수는 없다. 돌아가기 위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인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예수는 이렇게 외쳤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1:15)

회개란 '돌이킴'이다. 하나님을 등진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향하여 서는 것이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다. 제국의 논리에 순응하며 살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참 삶이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과정이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말하는 '영광의 때'는 세상에서의 일을 마치고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가는 때를 의미한다. 그것은 곧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예수에게 있어서 죽음은 삶의 종언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다.

그렇다면 예수에게 있어 삶이란 무엇인가?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온전하게 하는 일이었다. 병자들을 치유하고, 귀신들린 이들을 온전케 하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살 맛을 돌려주는 일이야말로 그가 생을 바쳐 추구하던 일이다. 타인에 대한 지배 의지가 충돌하며 빚어내는 소란스러움을 넘어 그는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새로운 삶을 제시했다. 그에게 낯선 타자는 없다. 모두가 한 호흡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이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쳤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그래서 생명이고 사랑이다. 십자가는 한 생의 비극적 마감을 상징하는 기호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 앞에 열리는 새 세상의 기호이다.

사람들은 삶은 좋아하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는 것조차 꺼린다. 그것은 미지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삶 역시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죽음보다는 삶에 친숙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삶에 매달린다. 삶이 누추해지는 것은 죽음을 삶 속에 통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가리켜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 말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지 않다. 죽음이라는 한계가 없다면 삶의 의미도 없을 것이다. 무한히 지속되는 삶에는 긴장도 없고 활기도 없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시간을 촘촘하게 살아내려 노력한다. 죽음의 자리에서 바라보아야 삶이 제대로 보인다. 예수는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15:13)고 말했다. 죽음은 개체로서의 생명의 종언이지만, 더 큰 생명으로의 진입이다. 죽음은 출구이자 입구이다. 옛 사람은 자기 목숨에 집착한 채 살아가는 것은 불길한 일(益生曰祥)이라 했다.

자기 생명의 확장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사울은 부활한 예수와 만난 후 박해자의 삶의 자리를 버리고 박해받는 자가 되었다. 과거와의 찬란한 단절이었다. 그러나 비애는 없었다. 이후 그의 삶은 푯대를 향한 달음질이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빌3:10)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빌3:12)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가?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제대로 산다는 것은 제대로 죽는다는 것이다. 그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을 내다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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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06-01 06:06)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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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13 08-01 06:08)
좋은 글로 마음 씻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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