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20 2013년 04월 21일
작성자 김기석

5.4 영원한 삶이란 무엇인가?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다."(벧전1:24-25a)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전1:2-4)

에덴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 운명은 죽음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인간에게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낯선 손님이 무상함 혹은 덧없음에 대한 자각이다. 덧없음이 안개처럼 우리 삶을 포위하는 순간 그렇게도 애집하던 모든 것들은 광휘를 잃고 만다. 전도서의 화자인 코헬렛은 지혜도 즐거움도 슬기도 어리석음도 세상에서 하는 모든 수고도 돈도 입신양명도 다 헛되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지독한 비관주의처럼 보인다. 하지만 '헛됨'에 대해 말하는 코헬렛은 비관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덧없는 삶이지만 그것을 기뻐하며 적극적으로 누리라고 가르친다. 그는 세상 것에 대한 애집에서 놓여나야만 지금 여기서의 삶이 충실해진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코헬렛이 말하는 헛됨은 불교의 공空(śūnyatā)과 유사하다. 덧없음 혹은 헛됨의 자각은 지속의 부재로부터 온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인과의 조건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어떤 것도 자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덧없음과 헛됨에 대한 자각이 자아내는 멀미를 견디지 못하는 이들은 뭔가 영속적인 것을 추구한다. 돌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기도 하고, 자서전을 남기기도 하고, 자기 이름을 딴 기념사업을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조차 영속적인 것은 아니다. 시간과 더불어 스러지거나 낡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완전한 지속성에 대한 인간의 꿈이 빚어낸 상상의 장이다. 유토피아는 문자 뜻 그대로 '없는 곳'이다. 영원을 꿈꾸는 이들에게 허여된 것은 유한한 시간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덧없음을 자각하게 만드는 시간이란 무엇인가? 어딘가를 향해 흘러가는 것인가? 아니면 순환하는 것인가? 인간에게 시간이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어떤 흐름이 빚어내는 환상인가? 장 파울은 "모든 시계는 잘 간다"고 말함으로 시간 인식의 난감함을 표현했다. 그것은 시간에 대해 가장 깊이 성찰했던 아우구스티누스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아는 듯 하다가도 막상 묻는 이에게 설명을 하려 들자면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고백록>> 11.14)

누구나 다 아는 것 같지만 실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시간, 끝이 있는 시간을 공포로 경험하는 이들이 많다. 괴테는 파우스트 박사의 입을 빌어 시간이 아주 빨리 사라지니까 시간을 잘 이용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시간의 지속이 곧 행복을 보장하는가? 그럴 것 같지 않다. T.S 엘리어트는 시집 <황무지>의 프롤로그에 쿠마의 무녀巫女를 등장시킨다.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무녀에게 아이들이 묻는다.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무녀는 처연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죽고 싶어." 예언의 능력과 아름다운 용모로 아폴론 신의 사랑을 받았던 무녀는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신의 말에 자기 손아귀에 든 먼지만큼 많은 햇수의 수명을 누리고 싶다고 말한다. 아폴론은 그가 더 좋은 것을 구하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무녀의 소원을 들어준다. 하지만 세월과 함께 졸아들 대로 졸아든 무녀는 죽음을 간청하는 처지가 되었다.

오히려 시간이야말로 우리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닐까?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천사 다미엘은 '지금 현재'를 느끼고 싶어서 인간이 되고 싶어한다. "영원한 시간에 떠다니느니 나의 중요함을 느끼고 싶어. 내 무게를 느끼고 현재를 느끼고 싶어. 부는 바람을 느끼면서 지금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 지금…지금…". 다미엘이 시간 속에서 경험하고 싶은 것은 유한한 시간이 빚어내는 안타까움, 떨림, 혼돈, 무질서, 그리고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벚꽃잎이 바람에 날려 난분분할 때면 처연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헤어짐이 있기에 만남의 시간이 소중하지 않던가. 릴케는 <기도 시집>을 열며 이렇게 노래한다.

지금 시간이 기울어가며 나를

맑은 금속성 울림으로 가볍게 톡 칩니다.

나의 감각이 바르르 떱니다. 나는 느낍니다, 할 수 있음을,

그리하여 나는 조형造形의 날을 손에 쥡니다.

시간이 톡 치며 지나갈 때마다 세상은 새롭게 변한다. 꽃이 피었다 지고, 달도 찼다 기울고, 물결이 일었다 스러지고, 사랑이 왔다가 가기도 한다. 그러면 세상은 그런 흐름일 뿐 영속하는 것은 없는 것일까? 그래서 덧없는 것인가? 무한 혹은 영생을 꿈꾸는 것은 인간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예수도 이런 질문을 품었을 법하지 않은가? 그는 이 물음에 대해 어떤 대답을 찾았을까?

예수는 시간의 무한한 연장으로서의 영생을 가르치지 않았다. 시간의 세계를 건너 영원히 누리게 될 지복의 세계를 영생이라 칭하지도 않았다. 오늘 여기에서의 삶을 배제한 영원한 삶은 그에게 낯설다. 예수에게 있어 영원한 생명은 구원받은 삶 그 자체이다. 구원받은 삶이란 파편화된 삶의 총체성이 회복된 삶이다. 구원받은 이들에게는 과거와 미래가 따로 있지 않고, 여기와 거기, 나와 남이 따로 있지 않다. 영원의 반대말은 시간이 아니라 나뉨이고 흩어짐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모든 순간을 영원에 잇댄 채 살아간다.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 세상에 하찮은 것은 없다. 따라서 아무 것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들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묻던 부자 젊은이는 재산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어 영생으로부터 멀어졌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많이 버린 사람이라야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가르쳤다(마19:29). 마지막 심판날에 일어날 일을 가르치면서 예수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사람으로 꼽은 것은 세상에 있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정성을 다한 사람들이다(마25:40). 예수는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따로 있지 않다. 지금 여기서 자기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 바치면 된다. 예수의 삶이 바로 영원한 생명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영원한 생명은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신적 현실이다. 인간은 유한성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영원의 피륙을 짜도록 초대받고 있다. 그런 사실을 망각할 때 삶은 누추해진다.

"고결함이 없는 삶은 천에서 쉽사리 풀려져 나와 느슨하게 흔들리는 실과 같다. 반면에 경건한 행동을 하는 가운데 우리는 모든 순간이 고운 술을 만들기 위하여 영원이라는 타래에서 풀려져 나온 실과 같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그 실들을 잘라 버려서는 안 된다. 영원한 직물의 디자인에 맞추어 짜야 한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선집 4,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종로서적, p. 175)

인생은 하루의 점철이다. 영원한 삶은 오늘 시작된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면 부끄러움뿐이다. 지금은 유예의 시간이다. 영원한 삶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 용기이다. 긴 글을 마치면서 구상 선생의 시 <오늘>을 다시 음미해본다.

오늘도 신비神秘의 샘인 하루를

구정물로 살았다.

 

오물과 폐수로 찬 나의 암거暗渠 속에서

그 청렬淸冽한 수정水精들은

거품을 물고 죽어갔다.

 

진창 반죽이 된 시간의 무덤!

한 가닥 눈물만이 하수구를 빠져나와

이 또한 연탄빛 강에 합류한다.

 

일월日月도 제 빛을 잃고

은총의 꽃을 피운 사물들도

이지러진 모습으로 조응照應한다.

 

나의 현존現存과 그 의미가

저 바다에 흘러들어

영원한 푸름을 되찾을

그날은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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