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19 2013년 04월 21일
작성자 김기석

5.3 하나님은 집 나간 자식을 무조건 맞아주시는 아버지처럼 자비하신가?

"프란체스코와 함께 오래 생활할수록 하느님께 이르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점점 더 분명하게 깨달았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깨끗이 면도하고, 온갖 음식과 향긋한 포도주를 즐기며 올바르고 평탄한 인간적인 길을 통해 하느님께 도달하는 방법과,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입고 한 줌의 머리털과 뼈만으로 더러운 냄새와 향냄새를 피우며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 하느님께 도달하는 방법이다. 나는 그중에서 첫 번째에 어울리는 사람이지만, 누가 나의 의견을 들어 주겠는가! 그래서 나는 오르막길을 택했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시기만 바랄 뿐이다!"(니코스 카잔차키스, <<성자 프란체스코 1>>, 열린책들, p. 166)

프란체스코 곁에 늘 머물렀던 레오 수사의 고백이다. 오르막길이든 내리막길이든 모든 길은 하나님께로 향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성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얼굴은 실로 다양하다. 자신의 뜻대로 창조된 세상을 보며 흐뭇해하는가 하면,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면서 모든 피조물을 심판하기도 한다. 외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는가 하면, 내리치려는 아브라함의 팔을 붙들기도 한다. 고향을 떠나 망명자가 된 야곱의 꿈에 나타나 격려하기도 한다. 호렙산에 있는 연약한 떨기나무 가운데서 자신을 드러내는가 하면, 번개와 천둥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짙은 구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역사의 주변부로 내몰려 신음하고 있는 히브리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는가 하면, 그들의 배신에 상처를 입고 염증을 내기도 한다. 바로가 지배하고 있는 애굽에 재앙을 내리고 이방 민족을 가차 없이 진멸하라고 지시하는가 하면, 온 세상 사람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 인내하는 분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경험 주체의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표상된다.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십니다."(시18:1-2)

'주님은 나의 ~' 할 때, '~' 속에 들어갈 서술어는 실로 다양하다. 목자, 힘, 노래, 구원, 산업, 분깃, 잔의 소득, 빛, 능력, 찬송…. 이런 서술어로 고백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다 합친다 해도 그분의 모습을 온전히 그려낼 수는 없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 자체가 불경이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분인 동시에 자신을 숨기시는 분(Deus Absconditus)이다.

시내 산을 떠나기에 앞서 모세는 주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간청한다. 하나님께서 그와 정말로 동행하실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만 얼굴만큼은 보이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영광이 지나갈 때 모세를 바위 틈에 집어넣고 손바닥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가 손바닥을 거두는 순간 당신의 등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출33:17-23). '하나님의 등'이라는 은유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체된 인식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늘 우리 삶 속에 현존하시지만-자연과 말씀과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우리는 그것을 뒤늦게 깨닫곤 한다. 하나님 인식은 그처럼 사후적으로 완성되곤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이미지화한다. 하나님을 엄격한 심판자로 경험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징벌과 보상을 주는 분이다. 달란트의 비유나 므나의 비유에서 주인이 맡겨준 돈을 땅에 파묻어 두었다가 주인에게 되돌려준 사람들은 주인을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는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는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마25:24-25)

이 사람은 주인의 성격 특성에 대한 자기 나름의 선입견에 근거하여 행동했다. 아니, 행동을 했다기보다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자기가 만든 이미지가 자기를 얼어붙게 한 격이다. 이 사람처럼 하나님을 슈퍼-에고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부릅뜬 눈으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감시자이다. 그들에게 있어 믿음은 신뢰가 아니라 두려움이 빚어내는 굴종이다. 천국에 대한 기대 때문에 믿는 것도, 지옥의 형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믿는 것도 참다운 믿음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믿음만이 진실하다.

프란츠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에서 평생을 아버지의 이미지와 싸워온 사람답게 자기 영혼에 깃든 트라우마의 뿌리를 들춰낸다.

"어느 날인가 제가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달라고 계속 칭얼대며 징징거린 적이 있었지요. 분명 목이 말라서는 아니었고 다분히 한편으론 아버지․어머니의 화를 돋우기 위해서, 또 한편으론 그냥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아요. 몇 차례 호된 위협을 퍼부었으나 소용이 없자 아버지는 저를 침대에서 들어내 파블라취로 끌고 나가 그곳에 저를 한동안 속옷 바람으로 혼자 세워두셨지요. 아버진 그 동안 문을 닫아걸고 들어가 계셨구요."(프란츠 카프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문학과 지성사, p.25)

카프카는 그날 이후 자기 속에 생긴 트라우마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한다. "어느 날 밤 거인의 모습을 한 아버지가 느닷없이 최후의 심판관이 되어 나타나서는 나를 침대에서 들어내 파블라취로 끌고 나갈 수도 있다. 그만큼 나란 존재는 아버지한테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p.26)라는 관념이 그것이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감정,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슈퍼-에고로 표상하는 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감정이다.

그런가 하면 신을 자기 욕망 충족이나 문제 해결을 위해 언제든 동원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를 조율하기보다는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려 한다. 그들 역시 하나님보다는 불안의 대용물들을 구한다. 기복적 신앙이 여기에 속한다.

예수는 잘못된 하나님 이미지가 빚어내는 부자유와 억압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문제이고 하나님을 도구화하는 것도 문제였다. 그러나 그가 삶을 통해 그리고 깊은 기도와 영적 통찰을 통해 깨닫게 된 하나님은 문화화 된 종교가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분이었다. 예수는 놀랍게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 아바(Abba)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아빠'이다.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스페인 태생의 철학자요 시인이었던 조지 산타야나(Jeorge Santayana, 1863-1952)는 예수의 '아바' 호칭에 대해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제2의 순수성'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다.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진 이 비유는 예수가 아바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다. 어느 날 작은 아들이 자기 몫으로 돌아갈 유산을 미리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후 작은 아들은 제 것을 챙겨 먼 지방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방탕하게 살면서 재산을 낭비하였다. 재산이 다 떨어졌을 때 마침 그 지방에 흉년이 들어 그는 궁핍하게 지냈다. 할 수 없이 그는 유대인들이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는 돼지를 치는 목동이 되었다. 굶주림이 심해지자 돼지가 먹는 쥐엄 나무 열매라도 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아버지 집을 기억해낸다. 품꾼들조차 먹을 것이 넉넉한 아버지 집. 그는 아버지 앞에 엎드려 사죄하며 자기를 품꾼으로라도 써달라고 부탁하겠다는 생각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아직 먼 거리에 있는데 아버지는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지난날의 과오를 아프게 고백했다. 아버지는 종들을 시켜 가장 좋은 옷을 꺼내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주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축제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이 비유에 담긴 깊은 의미를 다 언급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이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유산의 몫을 나눠 달라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들의 요구에 응했다. 왜? 집을 떠나지 않고는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들이 걷게 될 타락의 길이 훤히 보이지만 그를 떠나보내는 아버지, 아들의 방황을 허용하는 아버지의 아픔을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무런 책망의 말도 없이 그를 품에 안았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났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을 떠나보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나님은 부릅뜬 눈으로 사람을 살피고, 율법의 조문에 비추어 벌을 내리는 분, 회의나 방황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무정한 분이 아니었다. 그분은 방황하는 이들을 품어 안는 고향이자 안식이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한 대목은 그런 하나님을 체험한 이의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당신은 내가 흔들리며 겨우 기어오른

그 시간에서 나를 빼내 천천히 구부렸습니다.

조용한 싸움 끝에 나는 머리를 조아렸고

이제 당신의 온화한 승리를 축하하는 당신의 어둠이 지속됩니다.

 

이제 당신은 나를 품고 있으나 누군지 모릅니다.

당신의 드넓은 감각은 내가 어둠에

물들어 있음만을 보는 까닭입니다.

당신은 나를 더없이 포근하게 감싸고

당신의 늙은 수염 사이로 나의 손이

스치는 소리를 엿듣습니다.

-릴케, <<기도 시집 外>>, 책세상, 김재혁 옮김, p.351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은 자비롭기만 한 분이 아니다. 그분은 세상에서 자행되는 불의와 억압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분이다. 예수는 자기들의 편견에 사로잡혀 하나님 나라의 문을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마23:13) 종교인들에 대해 분노한다. 그는 강도의 굴혈로 변해버린 성전에 들어가 환전상의 상을 둘러엎고, 비둘기 파는 자들을 내쫓았다. 예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위선자라 칭하시며 그들에게 화를 선언했다.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정성껏 드리면서도 그보다 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버렸다.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마23:23-24). 예수는 헤롯이 자신의 변혁운동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그를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헤롯 왕을 가리켜 '그 여우'(눅13:32)라고 불렀다.

이런 다소 과격해 보이는 말과 행위의 배경에는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있다. 하나님의 정의는 당신의 자비하심에 의해 제동이 걸릴 때가 많다. 하나님은 잘못을 저지른 이에 대한 처벌을 예고하시다가도 그 뜻을 거둬들일 때가 많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별명을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라고 붙였다. 하지만 하나님이 인내를 철회하실 때가 있다. 그것은 강자들의 폭력에 의해 정의와 공의가 무너지는 때이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말은 이런 사실을 잘 요약하고 있다.

"감성이 죽으면 진리와 정의가 약해진다.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에 힘을 넣어 주는 것은 그분의 분노다. 역사에는 분노만이 홀로 악을 정복할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하느님의 분노는 부드러움과 다정함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선포된다."(아브라함 J. 헤셀, <<예언자들>>, 삼인, p.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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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경(13 05-28 01:05)
많은것을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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