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18 2013년 03월 27일
작성자 김기석

5.2 하나님도 세상의 고통 때문에 아파하는가?

"그러므로 내가 통곡한다. 다들 비켜라! 혼자서 통곡할 터이니, 나를 내버려 두어라! 내 딸 내 백성이 망하였다고, 나를 위로하려고 애쓰지 말아라."(사22:4) 이것은 멸망을 직감한 어느 나라 임금의 통곡이 아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한 하나님의 통곡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인 무소부재無所不在, 전지전능全知全能이 무색해진다. 물론 이것은 비탄에 잠긴 예언자가 자기 마음을 신에게 투사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반대도 역시 참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정념(情念, pathos)에 깊이 공감하는 자이다.

성경에서 가장 낯선 게 느껴지는 것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질투하는 분으로 그리는 대목이다. "너희는 다른 신에게 절을 하여서는 안 된다. 나 주는 '질투'라는 이름을 가진,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출34:14) 교회 전통이 가르치는 질투는 타자의 행복을 있는 그대로 축하해 줄 수 없는 영혼의 편협함이나 어떤 대상에 대한 독점욕에서 비롯되는 부정적 감정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질투는 그 백성을 사랑하기에 그와의 옹근 관계를 원하시는 데서 비롯되는 질투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이들이 겪는 고통에 마음 아파하시는 분이시다. 히브리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을 다섯 가지 단어로 표현한다.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분(출34:6)으로 말이다. 그 가운데서 자비라는 단어는 아파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라훔'은 어머니의 태 혹은 자궁을 뜻하는 '레헴'과 유사하다. 자기의 몸속에서 기르고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낳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애끓는 사랑과 그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유사하다고 본 것이다. 성경은 '라훔'을 자비 혹은 긍휼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어떤 이는 그것을 '통애痛愛' 곧 아파하는 사랑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성서의 하나님은 부동不動의 동자動者(아리스토텔레스)나 제1원인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역사와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는 분이다. 인간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시는 분이다. 무한자가 유한자와 더불어 언약을 맺는다는 사실 자체가 지혜롭다는 이들에게는 스캔달이다. 하지만 그는 오쟁이진 남편 신세가 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언약을 맺는다. 사람도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도 사람을 찾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고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각각의 피조물 속에는 신의 숨결이 머물러 있다. 성서의 하나님은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이 말하는 '눈 먼 시계공'이 아니다. 그는 자기의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애태우시는 분이다. 히브리 사상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출애굽 사건은 특히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아픔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출3:7)

예레미야는 죄 지은 백성을 책망하고 또 벌하시면서 그 때문에 아파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에브라임은 나의 귀한 아들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다. 그를 책망할 때마다 더욱 생각나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주의 말이다."(렘31:20)

이스라엘의 편협한 민족주의에 대한 반담론이라 할 수 있는 요나서는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요나는 자기들의 삶을 유린하곤 하던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망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도록 요구받았지만, 행여라도 그들이 회개하고 용서를 받을까 저어되어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달아나려 한다. 하지만 풍랑이 그의 앞길을 막았고,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보낸 그는 마침내 니느웨에 가게 된다. 둘러보는 데만 사흘이 필요한 그 도시에서 요나는 하룻길을 걸어가며 외친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욘3:4)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성서는 그 말이 일으킨 회개 사건을 인상 깊게 서술하고 있다. 니느웨 사람들은 금식을 선포하고 높은 사람으로부터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다. 그 소문을 들은 니느웨의 왕까지도 그 회개행렬에 동참했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창작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히브리의 지혜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정하고 싶은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뜨거운 햇볕으로부터 자기 머리를 가려주던 박넝쿨 하나가 사라지가 화를 내던 요나는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니느웨를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요나의 차가운 신학은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담아낼 수 없었다.

예수는 출애굽기와 예언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 아픔에 깊이 공감하신 분이다. 복음서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대하는 예수의 태도 혹은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는 '불쌍히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 '민망히 여기다' 등이다. 그것은 주로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knizomai라는 단어의 번역어인데, 이 단어는 창자를 뜻하는 스플랑크논에서 나왔다. 우리 말로는 '애'가 될 텐데, 애끓다․애달다․애태우다․애틋하다는 말에 함축된 정서적 울림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몸의 느낌이다. 예수야말로 가련한 이들을 향해 애태우는 사랑을 보인 분이다. 그의 사랑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았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이고 창조적이었다. 십자가는 그런 사랑의 정점이었다.

1986년에 인종차별 철폐와 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소설가 엘리 위젤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수용소 체험을 몇 권의 소설 속에서 형상화해냈다. <밤>이라는 책에서 그는 수용소에서 무고하게 처형당한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업장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 일행은 연병장에 세 마리의 까마귀처럼 서 있는 세 개의 교수대를 보았다. 무기소지죄로 체포된 두 사람과 다른 혐의로 고문을 당하던 소년 하나가 그 앞에 서 있었다. 친위대원들이 격식에 따라 사형을 집행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 소년에게 집중되었다. 그의 얼굴은 납처럼 창백했다. 세 사람은 동시에 의자 위로 올라갔고, 목에 올가미가 씌워졌다. 어른 두 사람은 "자유 만세!" 하고 외쳤지만 소년은 침묵했다. 그때 소설의 화자는 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묻는 소리를 들었다. "하느님은 어디 있는가? 그분은 어디에 계시지?" 세 개의 의자가 쓰러졌고, 수용소 전역으로 정적이 흘렀다. 지평선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수감자들은 모자를 벗었고, 친위대원들은 그들을 세 희생자 앞으로 지나가게 했다. 두 어른은 이미 숨이 졌지만 세 번째 밧줄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몸이 가벼웠기 때문에 소년은 아직 죽음의 문지방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화자는 자기 뒤에서 아까 그 사람이 다시 묻는 소리를 들었다. "하느님은 지금 어디 있는가?" 그때 그는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어디 있느냐고? 그는 여기에 있어—그는 여기 교수대 위에 목이 매달려 있는 거야…."(엘리 위젤, <<엘리제르의 고백-밤, 새벽 그리고 낮>>, 이조출판, p. 81-83 요약)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말일까? 아니면 인간의 고통 속에 깊이 들어오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픔을 말하는 것일까? 해석은 열려있다. 같은 책에서 화자는 어린이까지도 불태워 죽이는 참혹한 현실에 당혹한다. 그것은 악몽이었다. 인간성이 무너진 야만의 현실 앞에서 그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인 '카디쉬 kaddish'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암송하는 카디쉬, 전율이 밀려왔다.

"Yitgadal veyitkadach shmě raba…하느님의 이름은 복되고 찬미 받으소서…"(위의 책 p. 48)

우주의 영원한 주인이고 전능하고 두려운 하나님은 침묵만을 지키고 있는데, 어찌 그를 찬미할 수 있으며 감사할 수 있단 말인가? 엘리 위젤은 또 다른 책에서 인간이 겪는 극심한 고통의 속에서도 침묵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항변하고 있다.

    "오 신이여. 나에게 당신을 거역하는 죄를 저지르고 당신의 뜻을 거스를 힘을 주옵소서! 당신을 부인하고 거절하고 당신을 속박하고 조롱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엘리 위젤, <<벽 너머 마을>>, 가톨릭출판사, p.54)

이것은 불경이라기보다는 절망 앞에 선 인간의 절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차라리 부정하고 싶지만 차마 부정할 수 없기에 인간의 고통은 깊어간다. 인간의 고통이 증대되고 피조물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세상으로 인해 하나님의 시름도 깊어간다. 예수는 하나님의 그 아픔을 덜어드리기 위해 자기를 바쳤다. 현실의 어둠에 절망하거나 누군가를 탓하기보다는 스스로 한 점 등불을 밝혀들기로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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