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17 2013년 03월 27일
작성자 김기석

5.1 세상에는 왜 고통이 있는가?

권력이 신앙이 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가차 없이 유린되는 세상을 본다. 오늘의 세계는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라는 홉스의 말을 실증이라도 하듯 잔혹하게 변해가고 있다. 전쟁과 테러로 무참하게 살해된 가족의 주검을 부여안고 울부짖고 있는 사람들, 피골이 상접한 사람들, 총구 앞에서 굴욕을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 공평함이 없는 세상은 온통 고통에 잠겨 있다. 하지만 고통은 그런 특별한 상황 속에 처한 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고통은 어쩌면 인간의 삶의 기본적인 조건인지도 모르겠다. 법구경法句經은 생노병사生老病死에, 미운 이와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고(求不得) 감각적인 것에 대한 집착(五取蘊)이 자아내는 고통을 더하여 팔고八苦라 하였다. 인생이 고해라는 말은 허사가 아니다.

현실은 늘 우리의 에토스를 좌절시키곤 한다. 착한 사람은 복된 삶을 살아야 하고, 악한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히브리의 한 시인은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그들은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시37:1-2)고 노래했다. 하지만 이런 낙관주의는 지속되기 어렵다.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너무도 자주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 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 오만은 그들의 목걸이요, 폭력은 그들의 나들이옷이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다니며, 마음에는 헛된 상상이 가득하며, 언제나 남을 비웃으며, 악의에 찬 말을 쏘아붙이고, 거만한 모습으로 폭언하기를 즐긴다. 입으로는 하늘을 비방하고, 혀로는 땅을 휩쓸고 다닌다."(시73:4-9)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길까?'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고통이 다가올까?'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불교는 카르마(業)이라는 말로 그런 고통을 설명한다. 모든 것이 인과관계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거두는 생의 열매는 언젠가 뿌린 씨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받아들인다 해도 지금 여기서 겪는 고통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비애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 여행자인 인간에게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예수도 고통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다. 온갖 종류의 모순이 중첩된 세상에서 피식민지 백성으로 산다는 것처럼 곤고한 일이 또 있을까? 그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지속적인 고통의 현실이 사람을 어떻게 황폐하게 만드는지 너무나 잘 알았을 것이다. 그 고통이 자기의 연약함이나 허물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함께 겪는 고통은 그래도 견딜만 하지만 유독 자기에게 집중되는 고통은 견디기 어렵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고통을 안겨준 이들에게 앙갚음하고 싶어한다. 그 마음 자체가 또한 고통이다.

우월한 개인이 혹은 제도가 상대적으로 연약한 이들에게 가하는 고통은 불의한 것이고 따라서 극복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싸움에도 전략은 필요하다. 맹목적인 분노는 자기 파멸을 가속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고통으로 되갚으려 할 때 인간성에 왜곡이 발생한다. 고통을 죄로 혹은 폭력으로 전이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 예수는 열혈당원이나 시카리단의 위험을 피하면서도 불의를 이길 수 있는 길을 치열하게 모색했을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그런 모색의 결과물이다. 원수사랑은 '그'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나'를 위한 것이다.  

어떠한 경우이든 고통은 걸림돌일 때가 많다. 영문 모를 고통이 다가올 때 우리는 무력감과 아울러 자기 비하에 빠지기 쉽다. 하나님조차 나를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고통은 죄에 대한 형벌도 아니고, 인간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신이 내린 시험도 아니다. 가해자가 분명한 고통도 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도 있다. 고통 그 자체를 기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존재의 비약을 경험하는 이들도 있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타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이 아니겠는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자기를 조롱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를 바치시지 않았던가.

예수는 누구보다도 공감의 사람이었다. 그는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emphatic distress) 사람이었다. 탄생부터 십자가에 이르는 그의 삶 그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예수의 삶에는 헤롯에 의해 학살당한 아이들과 그 부모들의 고통이 그늘처럼 드리워 있었다. 박해를 피해 고향을 등져야 했던 경험과 가난 체험, 그리고 십자가에 이르는 삶의 굴곡, 예수는 고통의 사람이었다. 고통은 인간됨의 왜곡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인간됨을 고양시키기도 한다. 스스로 고통을 겪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타자의 고통에 어찌 공감할 수 있겠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를 새로운 차원에서 조명한다.

"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휘말려 있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는 무지한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하실 수 있습니다."(히5:2)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에게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히5:8-10)

연약함이 타자에 대한 너그러움의 뿌리이고, 고난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연약함 혹은 고통이야말로 버성기는 사람들의 관계를 다시 이어주는 매개체가 될 때가 많다.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 온갖 연약함에 사로잡힌 사람들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 각별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고통을 경험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나타난 치유의 사건은 그러한 적극적 사랑과 공감이 빚어낸 선물일 것이다. 교회 전통은 예수가 세상의 죄를 다 지셨다고 고백한다. 이런 고백이 선뜻 와 닿지 않는다면 '죄'의 자리에 '아픔' 혹은 '고통'이라는 말을 넣어 보라.

욥이 불행한 일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친구인 욥을 찾아왔다. 그들은 욥의 참혹한 모습을 보고는 슬픔을 못 이겨 소리내어 울었다. 겉옷을 찢고, 공중에 티끌을 날려 자기들의 참담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욥의 고통이 너무도 처참하여 차마 입을 열어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욥2:11-13). 이들의 우정이 놀랍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의 우정은 금방 금이 가고 만다. 욥이 겪는 고통을 두고 신학적인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욥이 겪는 고통이 욥의 숨겨진 죄를 입증한다면서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심지어는 그가 지은 죄에 비해 고통이 경미하다고까지 말한다.

"재앙이 흙에서 일어나는 법도 없고, 고난이 땅에서 솟아나는 법도 없다."(욥5:6)

"너는, 하나님이 심판을 잘못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전능하신 분께서 공의를 거짓으로 판단하신다고 생각하느냐?"(욥8:3)

"너는, 하나님이 네게 내리시는 벌이 네 죄보다 가볍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욥11:6)

그들은 인습적인 지혜에 의지하여 욥을 정죄한다.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그들이 차가운 신학으로 욥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나중에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들에게 분노하셨다. 그들의 말이 경건한 듯 보였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분노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돌린 것은 그들을 용서해달라는 욥의 기도였다. 욥의 친구들의 문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는 오만함이었다.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 영문 모를 고통을 겪는 이들의 가슴에 울려퍼지는 '왜?'라는 물음에 답이 없을 때가 많다. 그렇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제자들이 예수께 "이 사람이 눈 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때 예수는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라면서 다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요9:3)이라고 대답한다.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다.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해 그를 불행에 빠뜨렸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전혀 다른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제자들의 질문 속에서 그 사람은 대상화된 존재 곧 타자일 뿐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의 고통에 주목하심으로 그를 사물의 자리에서 인격의 자리로 회복시키고 있다. 그는 싸늘한 신학 이론으로 해석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치유되어야 할 사람이었다. 일그러진 생명을 온전하게 혹은 풍요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이다.

고통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현실이다. 고통은 할 수 있는 한 피해야 한다. 그래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은 평온한 일상을 뒤흔들고 때로는 찢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고통이야말로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문이 되고, 또 영원한 세계의 빛이 유입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고통을 겪는 이들의 고통을 해석하려 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울 때 희망의 뿌리가 돋아난다. 고통의 연대는 우리를 충만한 실재 앞으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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