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14 2013년 02월 26일
작성자 김기석

이 때에 유대 사람들이 다시 돌을 들어서 예수를 치려고 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권능을 힘입어서, 선한 일을 많이 하여 너희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가운데서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 유대 사람들이 대답하였다. "우리가 당신을 돌로 치려고 하는 것은, 선한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였소.(10:31-33)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모욕을 당하는 이 아이러니.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는 말이 이런 것일까? 유대 사람들은 예수의 말에 걸려 넘어졌다. 그들은 삶이 곧 증언이고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신앙고백을 삶으로 번역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이들일수록 문자에 집착한다. 집착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타자에 대한 배제를 낳고, 배제의 경험이 쌓일수록 자아는 강화된다. 갑각류를 닮은 신앙인들이 많을수록 하나님은 외롭고, 교회는 일반 사회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율법에,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하였다'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신이라고 하셨다. 또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여 세상에 보내신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을 가지고, 너희는 그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10:34-36)

예수는 시편 82편을 인용해서 응대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들'은 경배의 대상인 초월적 신격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신의 위임을 받아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들, 재판을 관할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신들'이라고 지칭되는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이다. 말씀을 받은 자는 자기 좋을 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신의 뜻을 수행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악인을 편들지 말 것을 엄중하게 요구하신다. 그들의 소명은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변호해주고,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는 것이다. 그들의 권한 행사는 자의적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이들이 그 말씀을 빙자하여 자기 잇속을 차리거나, 누군가의 정신을 마비시키거나 불구로 만든다면 그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그의 DNA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겼기 때문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아라.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면, 나를 믿지는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10:37-38)

사람의 사람됨은 오직 그가 하는 일을 통해 드러난다. '나는 ~이다'라는 자기 진술이 참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삶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 마음을 닫아버린 사람들을 설복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 눈 앞에 꽃이 활짝 펴 대기 중에 향기가 가득 찼는 데도 달력을 보며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아우토 바실레이아'(오리게네스), 즉 몸소 하나님 나라이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그들의 나른한 일상을 깨뜨리고 돌입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한다. 오죽 답답했으면 '나를 믿지는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어라' 하고 하소연을 하실까.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 삶으로 말하기보다는 말로 삶을 대체해버리고 만다. 종교적 언어는 상투어로 변한지 오래이다. 은혜, 구원, 화해, 용서, 섬김, 돌봄이라는 말을 들어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 그 언어가 우리의 심장을 꿰뚫지도 않고, 삶을 뿌리로부터 흔들어놓지도 않는다. 오히려 삶으로 말하려는 이들에게는 불온의 낙인을 찍기 일쑤이다. 저 차가운 바람이 부는 거리에서 떠돌고 있는 사람들, 생존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이들을 시뜬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쩌겠는가? 그것이 참의 운명인 것을. 예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스스로 변화의 길을 걷기보다는 예수를 없애려고 했다. 예수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서 요단 강 건너로 몸을 피하셨다. 아직 당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병자가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의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였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은 여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이다.(11:1-2)

요한은 느닷없이 한 병자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베다니 마을에 사는 나사로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오라버니이다. 감람산 동남쪽 사면에 있는 베다니는 히브리어(beth'ani)로는 '빈민의 집'이라는 뜻이고, 아람어(beth'anya)로는 '고통의 집'이라는 뜻이다. 베다니는 한 마디로 눈물의 땅이다. 가난한 예수, 한없는 연민으로 세상의 고통을 부둥켜안았던 예수는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끼셨다.

그 누이들이 사람을 예수께로 보내서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그의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11:3-5)

어쩌면 나사로는 아주 오랫동안 앓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를 보살피느라 누이들은 결혼조차 미루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누이들이 요단강 저편으로 피신해 계신 예수님께 사람을 보낸 것은 그만큼 나사로의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누이들은 나사로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예사로운 호칭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음에 틀림없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병약한 사람이었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기에 말이다. 성경에서 나사로는 자기 목소리가 없는 사람이다. 예수는 그런 그를 깊이 사랑하셨다. 그런데 주님은 나사로의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고 말씀하신다. 무슨 말씀일까? 아직은 성급하게 대답을 모색하지 말자.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앓는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그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셨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 지방으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11:6-7)

그 다급한 상황 가운데서 이틀이나 더 머무신 까닭이 무엇일까?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마도 아닐 것이다. 예수의 고의적인 지체는 납득하기 어렵다. 지금은 그저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셨다고만 말하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 지방으로 가자'고 하신다. 베다니라고 특정하지 않고 굳이 '유대 지방'이라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 그곳은 예수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이들이 있는 곳이다. 예수는 나사로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직감하고 계신 것이다. 제자들도 역시 그런 현실을 잘 알고 있다.그래서 그들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만류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가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고 말하자, 그렇다면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느냐고, 그냥 두면 시간이 해결해 줄 것 아니냐고 항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예수는 결국 '나사로가 죽었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고 말하였다.(11:16)

비장하기 이를 데 없다. 도마의 결기어린 말에서 젊은이의 치기가 읽힌다. 하지만 그런 열정조차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꿈꿀 수 있겠는가?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목숨을 걸 수 있는 열정이 있었기에 그는 나중에 순교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마의 미숙함을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 주와 함께 죽을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나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11:21-22)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다. 많은 유대 사람이 조문을 위해 그 자리에 와 있었다. 유대 사회에서 장례는 가족 구성원만의 일이 아니라 그가 속해 있던 공동체 전체의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장례를 돕는 일을 가장 큰 선행으로 여겼다. 망자로부터 보상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다는 동네 어귀까지 나가 예수를 영접했다. 예수가 선 자리는 마을과 마을 사이,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 그 사이이다. 예수의 운명을 예고해 주는 그 사이 공간.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마르다의 말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아쉬움에 대한 토로이다. '이제라도'라는 말은 나사로를 소생시킬 사건을 예기하는 말은 아니다. 마르다는 예수께 매달려 오라버니를 살려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이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그대로 이루어 주실 줄 안다고 말한다. 주님이 어떤 선택을 하시든 그 결과를 수용할 준비가 되었다는 말이다. 신뢰가 담긴 말이긴 하지만 자포자기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그 말 속에 담긴 여운이 아릿하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다가 예수께 다시 말하였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11:23-24)

예수는 '지금 여기서' 벌어질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마르다는 미래에 벌어질 수도 있는 불확정적인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마르다는 예수의 말을 통상적인 위로의 말로 들었을 뿐, 예수야말로 그 '마지막 날'에 속한 분임을 알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보거나 만질 수 있는 존재를 궁극적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일 테니 말이다. 우리 믿음은 이런 아스라하고 미묘한 엇갈림 속에 머물고 있다. 사건을 일으키는 말씀을 관습적으로 대할 때 신앙생활은 진부해지게 마련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삶의 변혁에 대한 기대 없이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11:26-27)

예수는 미래형 종결어미를 사용하여 '나는 부활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부활이다', '나는 생명이다'. 간결하지만 단호한 직설법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말이다. 예수 안에서 부활은 교리나 철학이 아닌 현실이 된다. 부활은 우리 삶이 다한 후에 기대할 수 있는 가상 현실(virtual reality)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실제 현실(actual reality)이 된다. 예수 안에서 죽음은 이미 초극되었다. 바울 사도의 말을 빌자면 '죽음의 쏘는 가시'는 제거되었다. 죽음의 지배는 끝났다. 강력한 선언이다.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육체적 죽음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영원과 잇대어 있는 사람에게 있어 '몸 나'의 죽음은 영원한 세계로의 귀환이다. 마르다는 엉겹결에 엄청난 고백을 했다. "내가 믿습니다." 이 고백은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에 상응한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함께 따라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다.(11:32-33)

주님이 오셨다는 전갈을 듣고 예수께 달려온 마리아가 울음을 터뜨렸다. 유대인들도 따라 울었다. 예수님의 부재 속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그 슬픔의 시간이 눈물의 강이 되어 흘렀다. 예수도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의 눈물을 보는가? 함석헌 선생은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이 보인다”고 말했다. 그대, 지금 예수의 눈물을 보는가?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하게 여기시면서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어귀는 돌로 막아 놓았다. 예수께서 "돌을 옮겨 놓아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다가 말하였다.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11:38-39)

돌로 막아놓은 무덤, 어떤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예수는 지금 비통한 마음이다. 생의 유한함에 대한 존재론적인 슬픔일까? 믿음 없는 세대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까? 그런데 엉뚱하게도 비통해하는 예수의 모습에서 오히려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도 또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살과 피를 가진 분임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을 수습한 예수는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 놓아라" 하고 지시하신다. 마르다는 깜짝 놀란다. '도대체 어찌 하시려고…' 마르다는 나사로의 시신에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안타깝지만 부질없는 미련을 내려놓고 쿨하게 현실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예수는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믿음은 몰상식과 무관하지만 가끔은 상식을 뛰어넘기도 한다. 믿음은 계산이 아니다. '불가능의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 돌을 옮겨 놓았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11:41-42)

거역하기 어려운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그들은 예수의 말을 수행한다. 마치 돌항아리에 물을 채웠던 가나 혼인 잔칫집의 하인들처럼. 인류의 보편적인 언어는 경청이라고 말한 이가 있다. 예수의 마음과 접속되었던 것일까? 그들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내려놓았다. 예수는 하늘 아버지께 기도를 올린다. 하지만 그것은 '어떠어떠한 일'을 이루어달라는 청원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오롯이 일치된 채 살아가기에 그의 뜻은 곧 아버지의 뜻이다. 새삼스럽게 청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는 둘러선 무리들의 연약한 믿음을 돕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바친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외치시니, 죽었던 사람이 나왔다.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11:43-44)

조근조근 말씀하시던 예수의 음성이 높아졌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던 예수가 지금은 죽음과 맞서고 있다. 에덴 이후 모든 생명을 사로잡고 있던 궁극적 어둠인 죽음의 세력에 맞서 예수는 생명을 깨운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세상에서 빛을 불러내던 창조의 그 첫 순간처럼 황홀한 순간이다. 연약함과 유한함에 사로잡혀 있던 모든 나사로를 향해 예수님은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나오라'고 외치신다. 골짜기에서 뒹굴던 해골들이 하늘 바람과 만나 하늘 군대가 되었던 것처럼 죽음의 휘장을 찢고 나사로가 걸어나왔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 하고 지시하신다. 나병환자의 몸에 직접 손을 대서 고쳐주시던 예수가 아니신가? 부정에 능동적으로 접촉해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드시던 그 사랑은 어디로 간 것일까? 복잡한 신학적 논의를 뒤로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예수는 우리가 당신의 손과 발이 되기를 원하신다. 손과 발이 묶여 있고, 얼굴이 가리워진 채 죽음의 세계, 망각의 세계, 절망의 세계에 유폐된 모든 나사로를 풀어주는 일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라는 말이다.

나사로를 보면서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믿음은 자기 한계를 넘어 타인의 세계로 나아갈 때 깊어진다. 그런데 몇몇 사람이 바리새파 사람에게 가서 예수를 통해 나타난 일을 고했다. 나사로가 소생한 사건은 성전체제의 한 복판에 던져진 폭탄이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공의회를 소집하고 대책을 숙의했다.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11:47b-50)

이들의 마음이 참 복잡하다. 표징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목격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이 염려하는 것은 둘이다. 첫째는 모든 사람이 그를 믿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둘째는 그런 믿음이 초래할 사회적 혼란과 그를 진압하기 위해 로마가 개입하리라는 예측이다. 이 둘을 매개하고 있는 '그렇게 되면'이라는 단어는 과연 타당한 것일까? 전혀 타당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직면하기를 꺼리는 진실이 있다. 지도자를 자처하는 그들은 민중들의 시선이 다른 이에게 쏠리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애국심으로 포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시기심'이다. 그들은 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인색'의 죄에 빠져 있다. 믿음이 좋다는 이들이 빠지기 쉬운 영적 함정이다.

곤경에서 그들을 구한 것은 가야바였다. 과연 대제사장답다. 로마와 유대교 전통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그 자리를 지켜온 노회한 사람답지 않은가. 그는 '민족 전체'와 '한 사람'을 마주 세워놓고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게 현실적인 것이냐는 것이다. 공교한 말이다. 하지만 그의 말은 신앙인의 말은 아니다. 모두를 위해 무고한 한 사람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말이 통용되는 세상은 사탄의 지배에 들어간 세상이다. 이익 혹은 유익이 모든 판단의 척도로 작동하는 사회는 강자들의 편익에 의해 약자들이 유린될 수밖에 없는 사회이다. 가야바의 말은 사탄의 말이다.

예수를 죽이려는 모의가 진행될 때 예수는 광야에서 가까운 지방 에브라임으로 물러나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다. 아직은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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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05-19 03:05)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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