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16 2013년 02월 26일
작성자 김기석

4.4 어떻게 손쉬운 해결책에 대한 유혹을 이겨낼 것인가?

어떤 이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일을 선험적으로a priori 알고 있다고 믿는다. 자신의 죽음도 또 사흘 후의 부활도. 정말 그러한가? 인간적인 고뇌도 아픔도 알지 못하는 예수, 그분을 정말 구세주라고 믿을 수 있는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DNA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객관적 사실로 입증될 수 없다. 기독교 역사는 예수가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분인지 유사한 분인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주교들의 모임인 공의회에서 어렵게 결론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것이 보편타당한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오류 가능성,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다. 예수는 그와 만나(부활절 이전이든 이후이든) 삶이 변화되고 하나님 나라를 맛본 이들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은 그야말로 맹목적인 믿음일 뿐이다. 간단히 말하자. 예수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어린이는 절대적 순진무구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도 형체 모를 불안과 혼돈을 경험한다.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은 모든 것이 생성 중인 역동적인 때이다. 시행착오는 필연적이다.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1976)의 그림 중에 <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아기 예수를 체벌하는 마리아>라는 작품이 있다. 무엇 때문인지 몹시 화가 난 듯 보이는 마리아는 벌거벗기운 예수를 자기 무릎에 엎드리게 한 후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내리치려 하고 있다. 아기 예수의 엉덩이에는 벌써 벌건 자국이 나 있다. 창 밖에는 세 사람이 서서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지 못한 체하며 다른 데를 바라보고 있다. 소위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는 분노를 자아낼만한 그림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우리를 인간 예수에 대한 친밀함을 느끼도록 해준다. 예수조차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묘한 안도감을 주지 않는가.

탄식도 하고, 부르짖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성을 내기도 하고, 때로는 욕도 사양치 않고, 풍랑에 온통 들까불리는 배에서도 혼곤한 잠에 빠지셨던 예수, 참으로 인간적이지 않은가? 장터에서 잘 놀다가도 토라지고 또 토라졌다가는 이내 다시 놀이에 빠져드는 아이들을 정답게 바라보고, 일거리를 찾아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날품팔이 노동자들을 측은히 바라보고, 빵을 만들기 위해 반죽에 누룩을 넣는 여인의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짐승에 쟁기를 지워 밭을 갈고 또 씨를 뿌리느라 땀 흘리는 농부들을 경탄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그물에 걸린 고기를 고르고 있는 어부들을 모습을 애잔한 눈길로 바라보는 예수, 그는 공중을 나는 새 한 마리, 들에 핀 꽃 한 송이 무심히 보아 넘기지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 나라를 가리켜 보이는 손가락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예수도 평생토록 극복해야만 할 내적 유혹이 있었을 것이다. 공관 복음서에 다 등장하는 광야 시험 이야기(마가복음은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는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어보아야 할 사건이다. 광야 시험 이야기는 늘 유혹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예수의 인간적 고뇌를 가장 인상 깊게 압축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첫 번째는 빵의 유혹이었다. 사탄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마4:3)라고 도전한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빵의 문제쯤은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경제 문제에 무능하면 안 된다. 하지만 예수는 사탄에게 말한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4:4) 유의해서 보아야 할 점은 예수가 빵의 문제를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수도 그게 참 중요한 문제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경제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여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육체로서의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하지만 영으로서의 사람은 보람을 먹고 산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신 예수는 음식을 구해와 드시라고 권하는 제자들에게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 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요4:34)라고 말했다.

종교학자인 정진홍 선생은 청계천이 피난민들의 거주지였던 때의 한 일화를 들려준다. 환경은 열악했고 삶은 각박했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의지는 대단했다. 너나없이 가난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얇은 널빤지를 얼기설기 엮어 바닥을 만들고 두꺼운 종이상자로 벽을 세우고 그 한 부분을 잘라 창을 만든 허름한 집에 들어섰다. 옷을 수선하기 위해서였다. 엉성한 마룻바닥 밑으로 청계천의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남루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그의 눈에 띈 것은 창턱에 놓인 녹슨 깡통이었다. 깡통에는 채송화가 노란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저는 그 아주머니께서 길거리에서 깡통을 주워 거기 구멍들을 뚫고 흙을 담고, 어디서 얻으신 것인지 채송화 씨를 뿌리고, 그것을 정성스레 양지 볕에 놓고 물을 주고 키워 마침내 노란 꽃이 피었을 때, 그때 당신이 그 꽃에 담았을 온갖 삶의 애환과 그 꽃에서 피어났을 당신 삶의 추억과 꿈을 어떻게 숨 쉬셨을까 하는 것을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습니다."(정진홍,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청년사, p.412-413)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삶의 보람과 아울러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탄은 지금도 우리에게 돌을 떡으로 바꾸어보라고 유혹한다. 사람들은 떡, 곧 물질적 풍요를 얻기 위해 자기의 자유와 양심을 대가로 지불하기도 한다. 예수는 그런 교환을 단호히 거절했다.

사탄은 예수를 거룩한 도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마4:6a) 이것이 두 번째 시험이다. 계속되는 사탄의 말은 달콤하다. 하나님이 자기 천사를 보내셔서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사탄은 예수에게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임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예루살렘 성전에서 과시하라고 유혹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편에서 이반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당신은 인간이 기적을 거부하자마자 곧 하느님도 거부할 거란 사실을 몰랐던 거요.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을 찾는다기보다는 기적을 찾고 있기 때문이오. 그래서 인간은 기적이 없는 한 무력한 존재이므로 수없이 반역자, 이교도, 무신론자가 되어가면서까지도 자신들만의 새로운 기적을 창조해내고, 또 심지어는 마법적인 기적, 황당무계한 기적에 매료되는 것이오."(<<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권>>, 열린책들, p. 570-571)

아,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이 이 두 번째 유혹에 속절없이 넘어가고 있는지! 삶의 곤고함을 견디기 어려운 이들의 영혼을 그릇된 신비로 도둑질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하지만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는 말로 유혹을 물리친다. 예수의 삶에는 일체의 자기 과시가 없다. 기적을 행하고도 그것을 알리지 말라고 했다. 사람들의 세속적 열망이 자신에게 집중될 때면 늘 한적한 곳으로 물러갔다. 기적으로는 자기 과시를 통한 세 불리기로는 새로운 세상을 이룰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사탄은 이제 최후의 유혹으로 예수를 옭아매려 한다. 그는 예수를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고는 말하였다.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마4:9)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이라는 말은 얼마나 근사한가? 그것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영웅들에게 요구되는 극한의 시련 극복이 아니다. 눈 딱 감고 절 한 번만 하면 된다. 일단 그런 세속적인 권력을 갖게 되면 그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겠는가? 많은 교회들이 맘몬에게 절을 하는 까닭은 '큰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큰 일을 하라고 한 적이 없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모양으로 꽃을 피우면 된다. '큰 일'을 꿈꾸는 것은 자신을 '큰 자'로 여기고 싶은 허영심 때문이다.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명한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여 사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친다. 사탄에게 절하는 순간 그의 소속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악마와 계약을 맺은 순간부터 파우스트의 영혼은 악마의 수중에 있었다. 예수는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탄과의 치열한 대결을 통해 예수는 분명한 입장과 지향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런 시험이 사그라든 것은 아닐 것이다. 고통의 현실을 보며 아파할 때마다, 역사가 퇴보하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불의한 세상에 지칠 때마다, 사탄은 슬그머니 찾아와 '이제 생각을 바꿀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물곤 한다. 그러나 예수가 받았던 시험 이야기는 손쉬운 해결책, 곧 성숙을 위해 거쳐 가야 할 길을 생략하도록 하는 해결책이 오히려 함정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하나님의 일은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런 희망은 조촐하지만 강력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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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05-19 03:05)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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