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15 2013년 02월 26일
작성자 김기석

4.3 부자는 정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가?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막10:23)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묻던 젊은이에게 예수는 참 가혹한 요구를 했다.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던 것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쓸쓸한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던진 말씀이 바로 위의 구절이다. 제자들은 당황스러웠다. 예수의 말씀이 자기들의 에토스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유대사회는 오랫동안 가족과 부富와 명예와 정체성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종교를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겼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거룩한 삶으로 표상되는 종교였다. 그것은 다른 모든 가치를 누릴 수 있는 바탕이었기 때문이다. 그 비극의 날이 찾아오기 전까지 욥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가장 복된 삶의 모델이었다. 사탄은 욥을 무너뜨리기 위해 먼저 그의 재산을 쳤고 이어 자식들을 쳤다. 그리고 욥이 겪고 있는 불행은 그의 숨겨진 죄 때문임을 인정하라고 다그치던 친구들을 통해 명예에도 손상을 입혔다. 견디다 못한 욥은 경외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던 하나님을 자신의 법정에 소환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하여 욥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어둠의 심연에까지 내려갔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부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부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복이라 여겼다. 부유함은 삶의 안전을 보장해줄 뿐만 아니라, 그가 외롭게 살았다는 징표로 간직되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예수는 자기 시대의 인습적인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부유함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그가 살던 세계의 현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로마에 부역하거나 성전 체제에 기생해서 사는 이들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구차한 생존이나마 이어가려고 아득바득 노력하는 이들이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세상이었다. 예수는 정결예식을 위해 겨우 비둘기 두 마리를 바칠 수밖에 없었던 집안에서 자랐다. 그렇기에 가난한 이들의 신산스러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토라의 말씀이 지켜지는 사회를 지향했을 것이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 추수 때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두라는 교훈은 아름답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약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는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좌절되곤 했다.

"너희 동족 가운데, 아주 가난해서, 도저히 자기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너희의 곁에 살면, 너희는 그를 돌보아 주어야 한다. 너희는 그를, 나그네나 임시 거주자처럼, 너희와 함께 살도록 하여야 한다. 그에게서는 이자를 받아도 안 되고, 어떤 이익을 남기려고 해서도 안 된다. 너희가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안다면, 너희의 동족을 너희의 곁에 데리고 함께 살아야 한다. 너희는 그런 사람에게, 이자를 받을 목적으로 돈을 꾸어 주거나, 이익을 볼 셈으로 먹거리를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레위25:35-37)

이것은 비단 예수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 아모스는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고,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는 강자들의 횡포를 고발했다(암2:6-7). 같은 8세기 예언자 미가는 권력자들의 만행을 신랄하게 고발했다. 그들은 "탐나는 밭을 빼앗고, 탐나는 집을 제 것으로 만든다. 집 임자를 속여서 집을 빼앗고, 주인에게 딸린 사람들과 유산으로 밭을 제 것으로 만든다"(미2:2). 그들에게 있어 사람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마르틴 부버가 말하는 '나-너'의 관계는 사라지고 '나-그것'의 관계만 작동할 때 샬롬의 세상은 무너진다. 샬롬의 세상을 무너뜨리는 작은 여우는 경계를 모르는 욕심, 과도한 욕심이다.

예수는 재물을 말할 때 일쑤 '불의한'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인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눅16:9)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눅16:11) 예수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눅16:13)고도 말했다. 여기서 재물은 아람어로 부유함을 뜻하는 맘몬(mammon)을 번역한 것인데, 놀라운 것은 예수가 맘몬을 인간의 섬김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경쟁하는 신격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돈으로 치환될 수 있는 맘몬은 인간의 가치서열에서 맨 윗자리를 차지하기까지는 만족하는 법이 없다. 예수는 그것을 꿰뚫어보셨던 것이다. 인간의 물욕은 한계가 없다. 이사야가 그려 보이는 주전 8세기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사5:8)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마6:11-12)라는 구절을 넣었다. 오늘 필요한 양식을 오늘 청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알지 못했더라면 이런 기도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학자들은 '죄'로 번역된 단어가 '빚'을 뜻하기도 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빚의 탕감'이야말로 샬롬 세상을 여는 열쇠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빚의 탕감은 예수가 창안한 사회적 비전이 아니다. 그것은 안식년과 희년의 이상 속에 이미 배태되어 있는 것이다. 공평함이 없는 세상은 산마루와 계곡을 만들고, 처해 있는 삶의 자리에 따라 양지와 음지가 나뉜다. 하나님은 주기적으로 사회를 갱신하여 음지에 사는 이들에게도 기회를 주라고 명령하신다. 희년이 되면 빚에 몰려 남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던 땅이 원주인에게 돌아가고, 종으로 팔려갔던 이들은 자유를 되찾게 된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 늘 시행되지는 않았다 해도, 이런 비전을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으로 선언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가.

다시 한번 원래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부자는 정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가? 어렵다. 부를 획득한 수단이 정당하지 못했다든지, 자기가 누리는 부유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든지, 부유함이 주는 자족감 때문에 지금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이웃을 외면한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에 속했다 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나라이고 사랑의 나라이고 벗들의 나라이다. 그런데 돈이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한다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불가능하다. 만지는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청했던 미다스 왕은 생명과 접촉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과일도 꽃도 사랑하는 딸도 금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재물이 섬김의 대상이 될 때 하나님 나라는 가뭇없이 사라지게 마련이다. 지금 여기서 구체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재물을 통해 추상적인 행복을 확보하려 한다.

돈의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지방이다. 돈의 중독에서 벗어날 길은 무엇인가? 예수의 말에 대답이 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꼭 필요한 사람에게 주기 시작할 때 돈의 지배력은 줄어들고,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의 능력은 증대한다. 하지만 어떻게 줄 수 있단 말인가? 울상을 짓고 근심하며 떠나갔던 젊은 부자의 마음이 충분히 공감되지 않는가? 예수는 마치 마침표를 찍듯이 말하였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막10:25) 너무 지나친 과장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말은 재물의 지배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우리에게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의문을 제기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단적으로 말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막10:27)

예수는 자기를 보기 위해 뽕나무 위에 올라갔던 세관장 삭개오를 호명하였고, 기꺼이 그의 집에 손님이 되어 들어가셨다. 삭개오는 자기를 민족 반역자로 단죄하지도 않고, 종교적 잣대를 들이대며 그를 몰아붙이지도 않는 예수, 그를 마치 벗처럼 허물없이 대하시는 예수의 눈길을 통해 자기 속에 있던 얼음이 다 녹아내림을 느꼈다. 그 가없는 받아들임 앞에서 지금껏 집착해왔던 모든 것들이 신기루에 지나지 않음을 절감했다. 그래서 그는 예수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그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주겠다고 하였다. 예수는 그런 그를 보며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눅19:9)고 선언했다.

돈을 매개로 하지 않는 관계가 늘어날수록 세상은 좀 더 따뜻해진다. 때로는 어떤 정교한 이론보다 짧은 시가 우리 삶의 진실을 확연히 드러내 보여줄 때가 많다. 평화 노래꾼 홍순관의 <낙타를 따라>도 그중의 하나이다.

낙타를 따라 바늘구멍으로 들어가 봅니다.

따라 들어가 보니 그렇게 넓을 수가 없습니다.

들어가고도 남음이 있어 춤을 추고도 넉넉합니다.

 

낙타를 따라 바늘구멍으로 들어가 봅니다.

좁을 줄 알았던 바늘구멍은 좁은 곳이 아니라

보지 못하였던 신비였습니다.

너무 넓어, 보이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낙타를 따라 바늘구멍으로 들어가 봅니다.

바늘구멍은 좁은 곳이 아니라

들어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닫힌 문이었습니다.

들어가려는 사람에겐

낙타 수천 마리가 쉽게 드러나는 자유의 문이었습니다.

 

내가 열리니 우주의 문이 열립니다.

바늘구멍은 동서남북사방팔방으로 열립니다.

 

낙타를 따라 바늘구멍으로 들어갑니다.

천국의 춤을 추며 덩실덩실 들어갑니다.

-홍순관, <<네가 걸으면 하나님도 걸어>>, 살림, P.118-119

들어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바늘구멍은 닫힌 문이지만, 들어가려는 이들에게는 자유의 문이다. 낙타를 따라 바늘구멍으로 들어갈 때, 그것도 억지로가 아니라 덩실덩실 춤을 추며 들어갈 때 천국의 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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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05-15 12:05)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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