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14 2013년 02월 12일
작성자 김기석

4.2 사람은 신뢰를 통해 성장하는가? 나의 제자들이 과연 나의 뜻을 따를 수 있을까?

가룟 유다의 배신이 예견되는 상황에서도 예수는 그의 발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예수는 빵조각을 포도주에 적셔 그에게 건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유다의 비극은 굴절된 욕망으로 스승을 바라보고, 그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너무 쉽게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인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인간이 자기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이상의 것'이다. 인간은 일회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과정이다. 존속하는 것으로서 확인되어야 할 현존재일 뿐 아니라, 여기에는 자유에 의한 가능성이 있고, 이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 인간은 스스로 무엇이 될 것인가를 스스로의 사실적 행위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다."(칼 야스퍼스, <<인간론․비극론>>, 범우사, p. 143)

인간은 현존재일 뿐만 아니라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는 말일 것이다. 물론 그러한 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자유이다. 예수는 사람을 현재의 모습으로만 파악하지 않았다. 조각가가 돌 속에 숨겨진 형태를 드러내는 것처럼 예수는 사람들 속에 있는 가능성에 크게 주목하는 사람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는 가룟 유다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미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예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갈릴리의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그를 따라나섰다. 어떤 강한 끌림이 있었길래 그들은 그렇게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세상의 모든 회심 이야기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체험을 언어라는 기호로 번역하기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다마스커스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와 만난 바울은 삶의 방향을 철저히 바꿨다. 박해자에게 박해받는 자로. 그 전환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성 프란체스코의 회심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제자들은 예수에게서 어떤 빛을 보았던 것일까? 신학자 폴 틸리히는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 '받아들여짐의 체험'이란 말을 사용했다. 나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수용되는 경험이야말로 구원받음의 체험이라는 말이다. 적대적인 입장을 보였던 사람들은 예외로 하더라도 목마름을 가지고 예수와 만났던 이들은 모두 받아들여짐을 체험했던 것 같다. 병자든 귀신들린 자든 창녀라 손가락질을 당하던 여인이든 예수는 그들에게 어떤 윤리적․ 종교적 잣대도 들이밀지 않았다. 오직 그들 속에 깃든 하늘의 씨를 보았고, 그들의 내면에서 눌함訥喊으로 울려 퍼지던 피울음을 들었을 뿐이다. 예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았다. 시인 김지하가 지학순 주교의 일화를 <축복>이라는 시에 담아냈다.

원주역 바로 앞엔 해방촌

해방촌 바로 뒤엔 법원

법원 바로 옆엔 주교관

 

어느 그믐밤

은발의 주교님이 길을 가셨다

'할아버지 놀다 가세요'

'놀 틈 없다'

'틈 없으면 짬을 내세요'

'짬도 없다'

'짬 없으면 새를 내세요'

'새도 없다'

'새도 없으면 탈나세요'

'탈나도 할 수 없지

옜다 과자나 사 먹어라'

어느 보름밤

은발의 주교님이 말씀하셨다.

'일하라고 악쓰는 세상

놀다 가라니 이 무슨 축복!'

어떤 운명의 발길질에 채여 해방촌까지 몰려온 한 여인과 은발의 주교가 주고받은 대화가 비극적이지 않은 어조로 비교적 유쾌하게 그려지고 있다. 주교는 어쩌자고 그 여인의 수작을 받아준 것일까? 그 여인을 통념에 따라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있어야 할 자리를 잠시 벗어난 손녀처럼 누이처럼 여인을 대했다. 그 여인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주교의 그런 태도는 그 여인의 가슴에 어떤 빛을 던져주지 않았을까? 예수는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예수에게는 상처입은 이들을 또 다시 찌르거나 베는 날카로운 것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바다를 닮았다.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하여 바다라 하지 않던가?

예수는 또한 다른 이들 속에 잠재되어 있는 가장 아름다운 요소를 발견해내고 또 그것을 호명하는 사람이었다.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거친 뱃사람 시몬을 만났을 때 그의 심지가 굳건함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요1:42). 게바는 베드로 곧 바위라는 뜻이다. 예수가 시몬을 게바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시몬은 게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고,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늪에 빠질 때도 있었지만 그는 예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그가 떠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를 떠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의 약함을 알면서도, 그가 부인할 것을 알면서도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눅22:31-32)

예수가 죽음을 향해 행진하던 그 처절한 시간에 그를 홀로 버려두고 달아났던 제자들, 그들은 깊은 시름에 잠겨 옛 생활로 돌아갔다. 스승과의 첫 번째 만남을 상기시키는 그 고통의 자리, 어둠의 심연에서 절망만 건져 올리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는 그들을 위해 밥상을 차렸다. 그리고 식후에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떼를 먹여라"(요21:16) 하고 부탁하였다. 가없는 신뢰가 아닌가. 칼릴 지브란은 세베대의 아들의 입을 빌어 이렇게 증언한다.

"내 가슴 속에는 갈릴리의 예수, 곧 사람 중에 뛰어나신 사람, 우리 모두를 시인으로 만드시는 시인, 우리로 하여금 깨어 일어나 달려나와 가린 것이 없고 얽매인 것이 없는 것을 만나게 하기 위하여 우리 문밖에서 두드리고 계시는 영이 살아 계십니다."(칼릴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예언자>>, 함석헌 옮김, 한길사, )

한 존재를 끝까지 믿고 신뢰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안다. 하지만 예수는 신뢰야말로 그에 대한 책임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물론 그 신뢰는 '원망사고願望思考'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 신뢰이다. 그렇기에 낙심하지 않는다. 신뢰야말로 인간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생명 곧 조에zoe이다. 그 생명이야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총족에 대한 욕구를 넘어 자기 초월에 이르게 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꿈을 심었고, 한없는 신뢰로 그 꿈을 영글게 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도 은총이지만 예수가 우리를 신뢰한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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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05-15 11:05)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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