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13 2013년 02월 12일
작성자 김기석

4.1 문명의 정상성을 넘는 참된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진짜 행복은 무엇일까? 사실 이 질문은 너무 막연하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행복이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언제 행복하냐?'고 물었다. 답은 제각각이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하고 있는 일이 누군가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일에 도움이 되었을 때, 시간을 들여 추구하던 일에 결실이 있을 때, 자기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를 잊고 우주적 평화 속에 오롯이 젖어들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이야기를 듣고 보니 삶의 행복이란 본능이나 욕구의 충족과 관련된 것이거나, '보람'과 관련된 것이거나, 존재 자체로부터 오는 느낌임을 알 수 있었다. 정리해보면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고,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 있고, 자기 존재를 영원에 잇댈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

예수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이다. 불행은 제각각이지만 불행의 뿌리는 서로 뒤엉켜 있는 경우가 많다. 로마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혹한 수탈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요, 자기 삶의 의사결정권을 일정 부분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는 것이다.

과도한 조세 부담으로 인해 자유로운 소농은 소작인으로 전락하고, 소작인은 날품팔이로 전락하고, 그것조차 여의치 않은 이들은 거지가 되거나 강도가 되었다. 예수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목자 잃은 양'과 같다고 탄식했던 것도 그런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로마가 세리들을 통해 거둬들이는 토지세와 인두세는 물론이고 유대인들은 성전세와 제사장들을 위한 세금까지도 납부해야 했다. 그 돈은 성전에서 매일 드리는 희생 제사에 드는 비용,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계비,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의 유지와 개보수 비용, 구휼 사업에 사용되었다. 예수가 광야에서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굶주린 이들을 먹이셨다는 이야기는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기적이야기가 아니다.

스위스 태생의 사회학자인 장 지글러(Jean Zigler, 1934~)는 "한 나라의 국민들을 노예 상태로 만들어 복종시키기 위해서 기관총이나 네이팜탄, 탱크 따위는 필요 없다. 부채가 그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때문이다"(<<탐욕의 시대>>, 갈라파고스, p.79-80)라고 말했다. 가난은 기아를 낳고, 기아는 영양실조를 낳고, 영양실조는 정신적 신체적 기능 약화를 낳는다. 이런 악순환은 삶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누군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의 숙주가 된다. 결국 세상은 위험한 곳이 된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은 남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 시대 민중들의 상황이 그러했다.

삶이 곤고해지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조차 지속하기 어려웠다. 예수는 날마다 행복의 가능성조차 차단당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 상황이 호전되지 않으면 행복은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삶이 너무 신산스럽지 않은가? 어쩌면 버트런드 러셀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만일 인간의 모든 행복이 개인적인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 비록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인생이 제공할 수 있는 행복보다 더 많은 행복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적은 것을 얻게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이승희 옮김, 사회평론, p.170)

물론 예수 시대의 가난한 이들은 행복을 위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했을 리가 없다. 행복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조차 마련할 길이 없었으니 말이다. 행복에 접근할 길이 막힌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 대한 원한감정을 품게 마련이고, 남을 인정하거나 칭찬하는 데도 인색한 사람이 되기 쉽다. 특정 계층의 불행을 영속화하고 있는 불의의 체제는 변혁되어야 하지만, 삶은 그 자체로 긍정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예수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면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이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마6:33)라고 말씀하셨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힘겹기는 해도 자기 존재와 삶을 긍정할 수 있는 내적 힘이 생길 때 불행은 조금씩 물러간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팔복은 예수의 행복론이 집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는 세상이 제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행복의 길을 제시한다. 부유함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한다. 나는 마음의 가난을 "'숭고함'에 스쳐서 세상의 모든 것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마음"(김기석, <<삶이 메시지다>>, 포이에마, p.27)이라고 생각한다. 과도한 욕망에 휘둘리던 삶에서 벗어나 하늘 뜻으로 가득 채워진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가급적이면 슬픔을 자아내는 일체의 현실로부터 멀어지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한다. 자기의 한계를 직시하며 슬퍼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의 모습을 보며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는 참 사람의 길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모질지 않으면 사람들의 이용거리가 된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예수는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한다. 자기와 자기의 것을 지키기 위해 갈라내고 차단하면서 사는 사람보다, 마음의 문을 열어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고통까지도 품어 안아 녹여내려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편하게 살려면 세상에 적당히 동화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세상에서 예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세상에 만연한 폭력에 대해 분노할 줄 알고,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손해를 무릅쓸 줄 아는 사람이다. 두루 원만하여 사람들과 각을 만들지 않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에게 현실의 부정성을 지양하기 위한 열정이 없다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반지빠르고 이악스러워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이익을 챙길 줄 아는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세상에서 예수는 자비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자비慈悲라는 단어에서 자慈는 '사랑'이라는 뜻도 있고 '어머니'라는 뜻도 있다. 그렇다면 자비는 어머니의 사랑의 사랑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식이 아파할 때 그 머리맡을 지키며 '차라리 내가 아팠더라면…'이라고 탄식하는 어머니의 사랑, 함께 아파하는 사랑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야 진짜 행복한 사람이다.

각 사람의 욕망이 착종되어 있는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악과도 적당히 손을 잡을 수 있는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세상에서, 예수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안정 욕구와 인정 욕구와 지배 욕구와 자기실현 욕구 같은 것들이 더께로 앉아 불투명해진 마음을 씻고 또 씻어 하늘을 반영할 수 있을 만큼 맑아진 사람이 진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경쟁과 갈등이 삶의 원리가 되고 갈등과 폭력과 전쟁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절대로 사람들에게 만만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세상에서 예수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한다. 너의 행복 없이는 나의 행복도 없다. 홀로 행복함은 거짓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굶주려 피골이 상접한 사람을 창을 통해 바라보며 먹는 진수성찬이 맛있을 리 없다. 평화를 이루는 삶은 섬김과 나눔과 돌봄과 존중일 수밖에 없다. 행복은 그런 삶의 나무에 열리는 열매이다.

덧거친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려면 눈을 딱 감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세상에서, 예수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전보다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면서도 우리 삶이 공허하고 비루해진 까닭은 불의에 대한 분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행여 외톨이가 되는 것은 아닐까, 미움을 받는 것은 아닐까 저어되어 마땅히 해야 할 말을 속으로 삼키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미루는 동안 우리 삶은 남루해진다. 예수는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참된 행복의 길이라고 말한다.

물론 언급되고 있는 모든 행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 꼭 세속적인 행복과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이 대립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삶의 지향을 어떻게 잡고 사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이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규정적으로 제시한다. 끊임없이 불만족을 만들어냄으로써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새로운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유혹한다.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서'라고 외치며 질주를 계속한다. 삶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주변 세계와 친밀하게 접촉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든다. 외로움은 깊어가고, 숨은 가빠지고, 행복은 분주함의 파도에 떠밀려 해안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져간다.

예수는 저마다 불행한 사람들 앞에 남들과 경쟁하지 않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땅의 현실에만 붙들리면 자기가 본래 누구인지, 왜 이 세상에 왔는지를 묻지 않게 된다. 예수는 불의한 현상 질서를 체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사람들을 북돋우면서도,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는 행복에 눈을 뜨라고 사람들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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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04-29 12:04)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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