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12 2013년 01월 09일
작성자 김기석

3.4 토라의 말씀을 뒤집는 것이 독신(瀆神)이 아닐까?

괴테의 <파우스트>에는 세상의 지식을 섭렵하였으나 마음의 공허를 메울 길 없어 방황하는 파우스트 박사가 등장한다. 그는 하늘의 계시라도 받아볼 양으로 성스러운 원문(요한복음)을 펼쳐놓고 그것을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첫 대목부터 막히기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씀'을 '뜻'으로도 바꾸어 보고 '힘'으로도 바꾸어보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로 옮겨놓고는 만족해한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1>>, 민음사, p. 74 간추림) 이 대목이야말로 사색적 인간인 동시에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괴테의 진면목을 잘 드러내준다.

'태초에 ~이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 '~'에 적합한 단어를 결합시킨다. '권태'(키에르케고르), '관계'(부버), 그리움(채희동)…. 그렇다면 태초는 세상의 시작점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삶을 추동하는 근원적인 현실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수많은 패러디의 원형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언설이다. 말씀이 대체 무엇일까? 그냥 말이 아니라 굳이 말씀으로 표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말씀을 '말숨'이라 표기하면서 그 말 속에 하나님의 숨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고백한다. 말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다바르'는 능동적이고 상상력과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말이다. 다바르는 늘 어떤 사건을 일으킨다. 신학자들은 그래서 '말씀-사건'이라는 조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도 같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체코의 대통령을 역임한 바 있는 작가 바츨라프 하벨은 1989년 10월 서독 평화상을 받으며 '말의 힘'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그 가운데 나오는 한 대목은 말의 운명을 아주 인상깊게 그리고 있다.

"똑같은 말이 한 순간엔 큰 희망을 방출하다가도, 다른 순간에는 살인 광선을 내뿜기도 한다. 똑같은 말이 한 순간엔 참이었다가 다음 번엔 거짓으로, 그리고 사태를 명확하게 조명해주다가도 또 다른 순간엔 기만적으로 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는 찬란한 지평을 열어주다가, 다음 번엔 수용소 군도에 이르는 통로를 세우기도 한다. 같은 말이 한 시점에서는 평화의 주춧돌이었다가, 다음 순간엔 그 음절 하나하나마다 기관총 소리가 울려 퍼질 수도 있다."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계곡이 되기도 한다. 자기 앞에 등장한 하와를 보고 아담이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창2:23) 하고 찬탄했을 때 말은 다리였다. 하지만 선악과를 따먹은 후 책망하는 하나님에게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창3:12)라고 말했을 때 말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었다. 말은 신뢰의 토대가 되기도 하고, 토대를 허무는 여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성서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꼭 지켜가야 '말' 혹은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특정했다. 성서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는 말의 종교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엄중한 신의 명령으로 인해 이미지보다는 말씀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 속에 십계명 돌판이 보관되어 있다고 믿었다. 유대인들의 자부심의 근원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의 '말씀'을 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누군가에 의해 독점될 때 말씀은 해방과 살림의 도구가 아니라 억압과 배제의 도구가 되기 쉽다. 중세 사제들의 권위는 말씀에 대한 독점권에서 비롯되었다. 말씀이 특정 계층에 의해 독점되는 순간 말씀은 권력으로 변하고, 권력은 억압을 통해 유지되었다. 중세에 성경 번역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존 위클리프나 요한 후스, 마르틴 루터 등 종교개혁자들은 한결같이 말씀을 일반인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성경을 번역하다가 박해를 받았다.

예수 시대의 회당에서는 늘 말씀이 낭독되었으니 랍비나 제사장들이 그 말씀을 독점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말씀에 대한 해석권은 늘 그들에게 귀속되곤 했다. 해석에 대한 권한은 다른 형태의 억압이었다. 성전체제와 맞섰던 예수는 말씀 해석을 독점하는 종교 특권층과 해석학적 투쟁을 벌였다. 갈등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승리하는 것이었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지 않던가? 예수는 특정한 맥락 속에서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시대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재맥락화 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예수는 율법의 자구에 집착하기보다는 그 속에 담긴 속뜻을 헤아렸고, 그것을 서슴없이 사람들과 나눴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역할이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적시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5:17)

그리고는 율법에 집착하는 이들에게 충격을 줄 만한 말을 한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 조금씩 어구는 다르지만 이런 도식으로 예수는 여섯 가지 새로운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30대 초반의 젊은이가 수십 세기 동안 그들의 삶을 견인해왔던 말씀을 자유자재로 재해석하고 있다. 물리적인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형제나 자매에게 성 내거나, 그들을 모욕하는 것도 또 다른 형태의 살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화해하기를 바라신다. 구체적인 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다면, 다시 말해 그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했다면 이미 간음을 한 것이다. 이혼 증서를 써주었다고 해서 부부 관계가 청산되었다고 생각하고 상대의 삶이 어떠하든 방치하는 것도 간음이다. 거짓 맹세를 하지 않았다 해도 '예' 할 때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 '아니오' 라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을 덧붙이는 것은 결국 악한 일이다. 해를 입었을 때 상대방에게 지나칠 정도의 앙갚음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를 인간화의 길로 이끌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웃은 사랑하되 원수를 미워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마5:21-48절의 자유로운 요약).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이 율법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뜻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안식일법이 사람들의 생명을 옥죄고 있음을 보았을 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막2:27)라고 선언했다. 스스로 말씀의 전승자를 자처하는 이들에게는 불경스러운 말일지 모르겠지만 율법을 질곡으로 경험하는 이들에게는 해방의 말이 아닐 수 없다. 공자는 이런 것을 일러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했다. 어쩌면 온고지신溫故知新이나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도 여기에 해당할지 모르겠다. 문자에 집착하는 이들에게는 불경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텍스트에 대한 재맥락화를 시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그 텍스트를 죽이는 것이다. 새로운 의미는 늘 맥락의 어우러짐 속에서 빚어지게 마련이다. '앞물결을 뒷물결이 싸악 지워내고 또다시 뒷물결이 앞물결을 싸악 지워내'(정진규, <밥詩고․4) 중에서)면서 싱싱하게 다시 채워지는 바다처럼, 말씀은 새로운 해석을 통해 현실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닫혀 있지 않다. 언제든 새롭게 해석되면서 스스로를 풍요롭게 만들어간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는 말씀의 속뜻을 발견하고 드러낸 분이라기보다는 삶을 통해 말씀의 깊은 뜻을 빚어낸 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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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04-29 09:04)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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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13 08-01 09:08)
말씀을 액자속에 두고 바라만 보는 우리.꺼내서 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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