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11 2013년 01월 09일
작성자 김기석

3.3 나의 길과 세례자 요한의 길은 어떻게 다른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의 옛 도성 근처에는 무슬림들이 아주 신성하게 여기는 우마야드 모스크가 있다. 본래는 시리아의 최고신으로 비를 주관하고 땅을 비옥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진 하다드에게 바쳐진 신전 자리이다. 그 신전이 로마 시대에 와서 쥬피터 신전으로 개조되었고, 비잔틴제국 시대에는 예배당으로 개조되었다가 우마야드 할리파 왕조 시대의 알 왈리드 1세에 의해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놀랍게도 그 모스크 안에는 마케루스 산성에 감금되어 있다가 처형당한 세례자 요한을 기념하는 작은 예배당이 서있다. 초록빛이 감도는 돔형의 지붕 아래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모셔져 있다. 기독교 순례자들은 모스크 안에 안치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생각하며 생각에 잠긴다.

함석헌 선생은 일찍이 제도권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면서 자기 지조와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들사람'이라 일렀다. 그들은 부와 권력을 멀리하면서 정신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었다. 역사는 이런 이들에 조금이나마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들사람 얼'을 말하면서 그는 동양과 서양의 위대한 정신들을 열거한 후에 들 사람의 가장 좋은 예는 이스라엘에 있다고 말한다. 그 나라의 종교․정치․교의 터를 잡아놓은 모세부터가 야인이었다는 것이다.

"이집트 문명 속에서 40년을 자란 그건만 그것으로 민족 구원이 될 수 없음을 알자 그는 시내산에 가서 문화인의 때를 벗기고 명상 가운데 바탈을 찾아내기에 40년의 세월이 걸렸다. 완전히 들사람이 된 후 그는 지팡이 하나를 들고 이집트 문명에 맞서며 거기서 민족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그는 그 이집트 문명의 폐해에 중독이 된 민중을 훈련하여 새 역사를 짓는 정신을 길러주고 목적지인 가나안에 들어가 이미 있는 문명과 싸워 이기게 하기 위하여 빈들에서 또 40년을 야인생활을 시켰다."(함석헌, <<들 사람 얼>>, 함석헌 저작집1, 한길사, p.39)

예언자들은 다 야인이었다. 예언자의 계보를 잇는 세례자 요한도 빼어난 들 사람이었다. 낙타 털 옷을 입고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광야에서 살았던 그는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일컬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메시야가 아닐까 기대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나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했다. 그의 세례는 에세네파의 입회의식과 비슷했지만, 죄 씻음이라는 상징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브로커 체제로 변질되어 버린 성전에 절망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그는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을 보고 마치 천둥치듯 말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마3:7b-10)

그의 말은 거침이 없다. 그의 말은 가차 없는 도끼가 되어 사람들 속에 숨겨진 알량한 자존심을 찢고, 자부심의 뿌리를 잘라버린다. 그는 하나님의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그의 메시지는 군더더기가 없다. 우리가 회개의 징표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들에게 한 요한의 대답은 간결하기 이를 데 없다. 속옷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세리들은 정한 것보다 더 많이 징수하지 말아야 하고, 군인들은 아무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로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아야 한다. 어정쩡한 태도로 얼버무릴 수 없을 만큼 그의 가르침은 직설적이다.

예수도 이 들 사람의 존재에 매혹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성정이 불같고, 언어에 거침이 없던 세례자 요한의 길은 오랜 시련으로 인해 혼곤해진 그 시대 사람들에게 울려 퍼진 죽비소리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겸허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속으로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런 생각을 단칼에 도려내듯 명확하게 말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고.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오."(눅3:16-17) 나중에 예수는 사람들에게 요한은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라면서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다"(눅7:26, 28)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길은 세례자 요한의 길과 달랐다. 그들이 머물고 있던 공간 자체가 그 차이를 보여준다. 세례자 요한의 공간은 광야였다. 하나님 이외의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절연의 공간 말이다. 하지만 예수의 삶의 공간은 장삼이사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예수는 매일의 양식을 얻기 위해 고투하고 있는 민초들의 눈물겨운 삶을 눈여겨보았다. 죄의 유혹 앞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인간의 약함을 보았고,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비릿한 욕망도 보았다. 그들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거룩한 삶에 대한 열망도 보았다. 예수는 천둥처럼 몰아치는 사람이 아니라 미풍처럼 감싸는 사람이었다. 병든 이들과 귀신들린 이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자기 아픔으로 느꼈고, 방황하고 있는 이들의 흔들리는 마음 위에 자기 마음을 얹었다.

세례자 요한에게 있어 하나님이 자기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든 분으로 표상되는 반면 예수에게 있어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목자로 표상되고 있다. 요한이 꾸짖어 사람들을 깨웠다면 예수는 품어 안아 사람들 속에 잠들어 있던 거룩함의 씨가 발아되도록 도왔다. 만일 사람들이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을 요한에게 데려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요한과 예수는 공히 죄로부터 돌이킬 것을 요구했지만 예수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그들의 죄를 떠맡으려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조시마 장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여러분, 기가 죽어서는 안 됩니다! 그때에도 한 가지 구원의 길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악을 떠맡고 그 책임자가 되십시오. 벗이여, 바로 그것이 옳은 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에 대하여 만인에 대하여 진정으로 그 책임자로서 처신한다면 그때 여러분은 그것이 진정으로 사실이며, 당신이야말로 만인에 대해, 모든 죄에 대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도스토예프스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열린책들, p.714)

인간의 죄를 떠맡는다는 것은 마치 그 죄의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예수의 그런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세례자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고 증언했다.

요한은 임박한 종말에 대비하라고 가르쳤다. 그에 비해 예수는 지금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라고 가르쳤다.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속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경험되어야 할 현실이었던 것이다. 요한은 금욕적인 삶을 살았지만 예수는 사람들의 식탁에 앉는 것을 좋아했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행한 첫 번째 이적이 가나의 혼인잔칫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이라고 전하고 있다. 포도주가 떨어져 잔치의 흥이 떨어질 위기에 처했을 때 예수는 그런 변화의 사건을 통해 흥을 불어넣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가릴 일이 아니다. 각자 하늘이 품부해주신 고유한 역할이 있을 뿐이다. 세례자 요한을 생각할 때마다 정현종 선생의 시 <천둥을 기리는 노래> 1연이 떠오른다.

여름날의 저

천지 밑 빠지게 우르릉대는 천둥이 없었다면

어떻게 사람이 그 마음과 몸을

씻었겠느냐,

씻어

참 서늘하게는 씻어

문득 가볍기는 허공과 같고

움직임은 바람과 같아

왼통 새벽빛으로 물들었겠느냐 

길을 닦는 사람 세례자 요한이 있었기에 예수라는 정신이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막1:14)는 마가의 보도는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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