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10 2012년 12월 12일
작성자 김기석

3.2 성전(성전 제의)이라는 가시적 매개 없이도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는가?

유대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솔로몬은 여기저기에 많은 궁궐과 성을 지었지만 아직 성전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성전을 지을만한 땅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해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어느 날 밤 그는 '성전을 짓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가 어딘지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슬그머니 궁궐을 빠져 나와 언덕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혹시 좋은 생각이 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어느 덧 그는 모리아 산에 이르게 되었고, 거기에 있는 커다란 올리브 나무에 기대 눈을 감았다.

그동안 둘러보았던 아름다운 땅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는데 문득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무슨 일이 벌어지나 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어떤 사람이 나타나더니 이쪽 밭에서 저쪽 밭으로 밀 짚단을 옮겨놓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도둑이구나 싶어 그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 하나가 나타나더니 저쪽 밭에서 이쪽 밭으로 밀 짚단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둑이 다른 도둑의 것을 훔치는 격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 밭의 주인들을 부른 솔로몬은 그들이 친형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은 먼저 동생을 불러내 어찌된 일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형님과 저는 아버지로부터 똑같은 재산을 상속받았는데 형님은 아내와 세 명의 자식도 있고 저는 혼자 몸입니다. 그러니 형님은 저보다 식량이 더 많이 필요한데도 저한테서는 단 한 톨도 가져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밤중에 밀 짚단을 옮겼던 것입니다." 왕은 동생을 내보내고 형을 불렀다. 형의 말은 이랬다. "나는 가족들이 여럿 있기에 농사를 짓는 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동생은 혼자 몸이라 농사를 지으려면 많은 사람을 고용해야 하니 곡식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통 나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를 않아서 할 수 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놀라운 우애였다. 왕은 두 형제를 함께 불러 그들을 껴안고는 말했다. "그 밭을 나에게 팔지 않겠느냐. 너희들이 이미 돈독한 형제애로 그 땅을 신성하게 했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다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구나.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곳은 없을 것이며, 그보다 더 건전한 초석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과 우애 그리고 배려가 있는 땅이야말로 가장 신성한 땅이라는 메시지를 유대인들은 이런 이야기에 담아 후세에게 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솔로몬 성전 건축의 실상에 직면하는 순간 색이 바랜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백향목과 잣나무를 얻기 위해 두로의 히람 왕에게 매해 밀 이만 섬과 짜낸 기름 스무 섬을 보내주었다. 그것은 물론 백성들의 고혈이었다. 게다가 솔로몬은 레바논에 파견하는 벌목꾼 삼만 명, 짐을 운반하는 사람 칠만 명, 산에서 돌을 떠내는 사람 팔만 명을 징발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조세 부담은 물론이고 노역에까지 시달렸으니 어느 가정인들 온전했을 리가 없다. 어사 이몽룡이 변 사또의 생일잔치 자리에서 읊었던 시가 절로 떠오른다. "금잔의 좋은 술은 만백성의 피요, 옥쟁반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다.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이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드높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출애굽의 완성으로 보았지만, 스스로 '새로운 바로'가 되어 평등의 공동체를 '새로운 애굽'으로 만들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했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했지만, 그것이 그의 사후 남북 분단의 빌미가 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거듭 파괴되었던 성전은 스룹바벨과 헤롯 대왕에 의해 두 번씩이나 재건축되었지만, 성전과 성전체제는 사람들을 자유와 해방의 길로 인도하지 못했다. 이방인, 여성, 유대 남성, 제사장, 대제사장의 위계에 따라 머무는 공간이 따로 획정된 그곳은 차별의 공간이었다. 성전은 사람들에게 암암리에 차별을 내면화하도록 구조화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성전을 신성시했지만 사실 그곳은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대면을 가로막는 권부였던 것이다. 성전체제에 기대 살아가는 이들은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한다면서 사실상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브로커였다.

예수는 이런 성전 체제에 분노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둘러보고 떠날 때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하고 찬탄하자 예수는 아주 싸늘하게 응대했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막13:1-2). 억압의 권부로 변한 성전은 무너져야만 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는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는 말씀하셨다. "기록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막11:17)

그렇다면 성전을 떠나서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사실은 이런 질문 자체가 불경이다. 시편 기자는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시19:2-4)고 노래했다. 하나님은 성전에 갇힐 수 없다. 솔로몬조차 봉헌 기도문에서 "하나님, 하나님께서 땅 위에 계시기를, 우리가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성전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왕상8:27) 하고 고백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자리는 온 세상이어야 한다. 토라도 이 대목을 분명히 하고 있다. "너희가 사는 땅, 곧 내가 머물러 있는 이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나 주가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함께 머물고 있다"(민35:34). 우리가 사는 현실이야말로 신이 도래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비근한 일상 속에서 거룩한 빛을 보는 이가 진정한 영성가이다. 예수는 그런 의미에서 깊은 영성가였다. 이런저런 염려로 여일이 없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면서 예수는 공중의 새를 보라고,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라고 말했다. 이때 '보라'는 말은 단순히 관찰하라는 말이 아니라 꿰뚫어보라는 말이다. 유심히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텍스트가 된다.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무구無垢의 전조>라는 시의 첫 연은 바로 그런 사실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세상에 가득 찬 초월자의 암호(칼 야스퍼스)를 해독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카리스마를 제도화한 종교에만 의존한다. 우리를 신의 현존 앞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경탄'과 '놀람'이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비극은 이 놀라운 선물을 누릴 줄 모른다는 것이다. 영연방 유대교 최고 지도자인 조나단 색스는 하나님이 흙으로 빚은 동물들을 아담에게 이끌어 오신 까닭은 인상깊게 설명하고 있다. '함께 기뻐하자고.' 놀람과 기쁨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만큼 신으로부터 멀어진다는 뜻이 된다.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를 가르치셨다. 바로 고통받는 이들의 삶의 자리이다. 오랜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 생의 가장자리로 내몰린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깊은 관심의 대상이다.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히브리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직접 역사 속에 개입하셨던 야훼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이들 곁에 오고 계신다. 예수는 그들 속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음으로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냈다. 일본 작가인 엔도 슈사꾸(遠藤周作)의 <<死海의 호반>>(청노루)에는 '성전이나 제사나 신에게 바치는 제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냐?'는 사두개파 사람의 질문에 예수가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웃을 위해 울어주는 일, 죽어가는 자의 손을 하룻밤 잡아주는 일, 나 자신의 슬픔을 참아내는 일, 이것만도…다윗의 성전보다도 과월절보다도 위에 있다."(p.81)

오늘의 기독교가 무기력증에 빠진 것은 바로 그런 하나님 현존의 자리를 한사코 외면하기 때문이 아닐까? 마더 테레사는 병든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리스도로 보았고 그들을 돌보는 거룩한 사역에 불러주신 은혜에 감격하며 살았다. 그런 고통의 자리로 외면한 채 수백 억, 수천 억 원을 들여 예배당을 짓는 것을 하나님은 정말 기뻐하실까? <<교회로부터 예수를 구하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썼던 로빈 마이어스(Robin Meyers)는 2012년에 출간한 책 <> 프롤로그에서 오늘의 교회가 얼마나 무기력해졌는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교회에 가는 것은 안전하다. 전복적이지 않다. 어쩌면 우리의 품성을 가꿔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상 질서를 위협하지는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신이 '진리를 피하면서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현존 체험을 갈망하면서도, 그 길은 한사코 피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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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03-19 08:03)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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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13 08-01 09:08)
늘 생각하던 문제들,밝히 보이시니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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