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9 2012년 12월 12일
작성자 김기석

3.1 일상을 떠난 거룩한 삶은 가능한가?

'거룩함'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대개의 사람들은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거룩함에 대한 언설 자체가 우리의 일상적 삶에 대한 부정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은 '거룩하다'를 '성스럽고 위대하다'고 새겨놓았다. Collins 사전은 뭔가에 대해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신이나 특정한 종교와 관련되었기 때문에 특별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뜻이라고 정의한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거룩함'이란 비일상적인 경험임에 틀림없다.

도대체 거룩의 체험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미디안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살아가던 모세는 어느 날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호렙산에 이르렀을 때 분명히 불이 붙었는 데도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매혹과 두려움 사이에서 쭈뼛대고 있는 그에게 음성이 들려왔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출3:5). 물론 땅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현존한 곳이기에 그곳은 거룩하게 된 것이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다. 그분 위에 서 있던 스랍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사6:3) 그 광경을 본 이사야는 놀라 부르짖는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사6:5)

신적 거룩함에 직면할 때 인간은 두려움을 느낀다. 거룩함은 우리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과 죄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의 말씀에 응했다가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된 베드로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서 말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5:8b). 언표되지는 않았지만 베드로는 그 이적을 통해 거룩함과 대면했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을 만난 바울은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딤전1:15b)라고 말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한 겸양의 표현이 아니다. 빛에 가까이 다가간 이가 아니면 누가 자신의 어둠을 알겠는가.

히브리 성경에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함부로 대했다가 죽음을 맞이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아론의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는 자기 향로에 주님께서 명하신 것과는 다른 금지된 불을 가지고 갔다고 죽임을 당했다(레10:1-3). 다윗 시대의 제사장인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는 수레에 실려 가던 하나님의 궤가 떨어지려 하자 황급히 손을 댔다가 죽임을 당했다(삼하6:1-8). 성전의 성소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구별된 제사장들뿐이었고, 일 년에 한 차례 지성소 출입을 허락받는 것은 오로지 대제사장뿐이었다.

거룩함은 이처럼 신과 관련된 것이다. '거룩'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도쉬'는 다양한 의미망을 거느리고 있다. 기본적인 뜻은 '정결하게 되다', '구별하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카도쉬'에는 그런 뜻 이외에도 '봉헌되다'는 뜻도 있다. 출애굽 공동체는 자기들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런 고백이야말로 여러 차례 나라를 잃고 이산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들이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토대였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이 거룩하심과 같이 이스라엘도 거룩해야 했다. 거룩함은 일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식이어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거룩이 삶의 에토스가 아니라 정치학으로 변할 때 발생했다. 선민이라는 자부심은 다른 민족에 대한 부정 혹은 멸시로 귀결되었다. 거룩에 대한 담론이 구별짓기의 기제로 작동할 때 거룩은 폭력을 내포하게 된다. 그러한 구별짓기는 외부세계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구별짓기를 통해 자기를 강화라는 과실을 맛본 이들은 내부 집단 가운데서도 자기들과 다른 이들을 찾게 마련이다. 찾을 수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그들을 배제한다. 정결과 부정, 성스러움과 속됨, 유대인과 이방인, 의인과 죄인, 남자와 여자…. 거룩의 생생한 경험이 사라지고 거룩에 대한 신학이 제도화될 때 위계적 서열이 마련된다. 하지만 그 위계는 얼마나 인위적이고 권위적인가?

예수는 거룩의 정치학이 작동하는 자기 세계가 얼마나 비인간적인가를 절감했다. 직업상 혹은 삶의 형편상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킬 수 없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죄인'으로 규정되었다. 613개에 이르는 율법의 조문을 지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수는 거룩의 정치학을 수호하는 이들이 만들어놓은 경계선을 마구 넘나들었다. 죄인으로 규정된 이들과 스스럼없이 사귀었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죄인과 세리의 친구',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였을까. 그렇다면 예수는 속된 존재인가?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거룩은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이어야 했다. 율법 조문을 지키면서도 마음속에는 온갖 더러운 욕망이 가득 차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가 가장 미워했던 것은 바로 그런 위선이었다. 예수는 거룩한 삶의 내용이 자비일 수밖에 없음을 자각한 분이다. 자비란 사랑하는 마음이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다. 시인 정현종은 <한 그루 나무와도 같은 꿈이>라는 시에서 방이 많은 집 하나를 짓고 세상의 그악스럽지 못한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그가 적시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 눈길이 가는 것은 "끌어안을 때는 팔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는 사람"이다. 예수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예수에게 타인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분은 모두의 품이 되었다.

일상의 삶 속에서 구현되지 않는 거룩함이란 얼마나 공허한가? 물론 일상은 권태롭고 진부하다. 삶은 먹고, 자고, 일하고, 공부하고, 놀고, 쉬는 일의 반복이다. 그렇다면 그런 일상의 삶과 무관한 거룩함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날들을 구별하고, 음식을 가려먹고,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여 거룩한 삶을 산다 할 수 없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빛을 우리의 눅진눅진한 일상 속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19:2).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성결법전의 대헌장이다. 그런데 거룩함의 예로 적시하고 있는 내용 중에 종교적인 내용은 많지 않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과 희생 제물에 대한 규정 이외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적 삶에 대한 지시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추수할 때 밭 구석구석까지 거두거나 포도를 수확할 때 모조리 따지 말라고 지시한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도둑질, 사기, 거짓 맹세도 하지 말아야 한다. 품꾼을 쓰면 품값을 다음날 아침까지 미루지 말고 지급하여야 한다.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하면 안 된다. 눈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 재판을 공정하게 해야 하고, 남을 헐뜯는 말을 퍼뜨려서도 안 된다. 이런 지시와 규정은 그 후로도 계속된다. 성서 기자는 거룩한 삶을 요약하는 한 마디를 중간에 끼어 넣는다.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레18b).

예수는 거룩한 삶이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안식일을 제대로 지킨다는 것은 특정한 날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온전케 하는 일임을 그는 보여주었다. 고통을 당하는 형제자매를 보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찬미하는 것은 거짓 경건이다. 우리의 구체적 일상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건은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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