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말이 씨가 되게 하라 2012년 12월 06일
작성자 김기석

말이 씨가 되게 하라

--스님 목사 신부의 대화 다섯 마당 <잡설>

1.

종교宗敎라는 단어가 다양한 개별 종교들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종교라고 번역되는 영어 단어 religion의 어원은 라틴어 re-legere이다. 그것은 ‘다시 읽다’ 혹은 ‘다시 묶다’라고 새길 수 있는 단어이다. 아마도 신의 뜻을 깊이 읽음으로 잃어버렸던 관계를 회복한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동양의 번역자들은 아마도 고심 끝에 ‘religion’을 격의하여 ‘종교’라고 옮겼을 것이다. 회의 문자인 ‘종宗’은 집을 뜻하는 ‘갓머리宀’와 신을 뜻하는 ‘시示’로 구성되어 있다. 종宗은 애초에는 신을 모시는 집을 뜻했다. 종宗이 ‘으뜸, 근본, 마루’라는 뜻을 얻게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여기에 가르칠 ‘교敎’가 결합되어 ‘으뜸 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의 단어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종교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을 제시하고, 또 그 길로 사람들을 인도할 때 본연의 사명을 다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는 제도화되면서 범속화 과정을 겪지 않을 수 없었고, 내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다른 것들’이 많아졌다. 종교의 타락화가 진행된 것이다. 그런 종교가 다른 곳에서 탄생한 이웃 종교들을 만날 때마다 갈등이 빚어졌다. 배타적 진리 주장은 폭력을 부르게 마련이다. 우리는 종교간의 만남의 역사가 평화로운 공존보다 적대적인 상쟁으로 얼룩져왔음을 잘 알고 있다. 이슬람과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가 부딪쳤던 십자군 전쟁, 종교 개혁 이후에 가톨릭과 개신교가 벌인 참혹한 종교 전쟁, 그리고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족 간의 갈등에 종교가 배음으로 깔리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특별히 권력과 손을 잡는 순간 종교는 본래의 존재 이유에서 벗어나 탐욕을 정당화 해주는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일부 광신적인 개신교인들이 벌이는 이웃 종교 모독 행위 사례가 자주 매스컴에 오르내린다. 그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상상 하지만 실제로는 아닌 사람들이다. 감리교회 운동을 시작한 존 웨슬리 목사는 <광신의 본성>이라는 설교에서 광신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결코 사람들을 하나님의 길로 강제로 몰아넣는 것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들도 생각하게 하십시오. 종교에 관한 일에서는 조금도 강제를 쓰지 마십시오. 심지어 멀리 떨어져 나가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이성과 진리와 사랑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돌아오도록 강요하지 마십시오.” 종교에는 강제가 없어야 한다.

다종교사회라고 말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다행히도 종교간의 갈등이 폭력으로까지 비화하는 일이 드물다는 사실이 참 다행스럽다. 하지만 그런 불안한 평화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가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은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국가 간의 평화도 없다. 종교 간의 대화 없이는 종교 간의 평화도 없다. 종교에 대한 기초 연구 없이는 종교 간의 대화도 없다”(한스 큉, <한스 큉의 이슬람>, 손성현 옮김, 시와 진실, 9쪽)고 말했다. 이제는 종교인들이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세상을 ‘우리’과 ‘그들’로 가른 후, 우리는 ‘참’이고 그들은 ‘거짓’이라고 지레 규정하는 한 어떤 대화도 이해도 불가능하다. 그동안 종교간의 이해를 증진하기 위한 대화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대화가 거둔 결실은 많지 않았다. 학문적인 관심에 머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변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종교인들이 머리를 맞댈 것을 명령하고 있다. 민중의 삶이 거덜나고, 피조물의 신음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오고, 기후 변화의 문제가 심각한 인류 존망의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종교인들은 자기만의 골방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세상에 가득 찬 아픔을 보듬어 안지 않는 종교는 역사에 의해 버림을 받으리라는 위기의식도 깊어진 탓도 있을 것이다. 땅의 아픔과 민중의 아픔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종교인들이 광장으로 달려 나왔고, 고통 받는 이들 곁에 서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연대가 아닐 수 없다.

2.

그 현장을 자기 집으로 여기며 살고 있는 스님, 신부, 목사 세 사람이 모여 머리를 맞댔다. 그저 만나 흐드러진 말의 난장을 펼쳐보자는 취지였다. 대화의 주제를 정하지 않았으니 질문지도 없고, 질문지가 없으니 예상된 질문에 대한 답을 궁리할 수도 없다. 살아오는 동안 가슴에 그리고 온 몸에 온축되어온 말들을 해방시키기만 하면 되었다. 의도한 지향조차 없기에 이야기는 지리산가리산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한 사람이 앞서 말문을 열면 이야기는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려 나간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어떤 신명에 취한 듯 이야기에 막힘이 없다. 논의의 수위는 아슬아슬하다. 한 사람이 ‘덩’ 하고 장단을 치면 다른 사람은 ‘더꿍’ 하고 받는다. 하지만 이야기에 맛을 더하는 것은 ‘엇’을 만드는 데 있지 않던가? 맞장구를 치기도 하지만 때로는 딴죽을 걸기도 한다. 애초에 '잡설'이라 했으니 점잖을 뺄 까닭이 없다. 그럴싸하게 포장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멋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는데, 흐름이 만들어지고 그 흐름이 어느 지점에서 소를 이루고, 또 그 소를 채운 후 또 흘러간다.

그 말들이 흘러가는 곳은 어김없이 아픔의 자리이다. 그게 종교의 본래 자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노동자들의 아픔이든, 땅의 아픔이든 마찬가지이다. 아픔을 야기하고 강요하는 자본의 악마성에 대해 그들은 누구보다 깊이 분노한다. 이 대목에 이를 때면 그들의 언어는 거침이 없어진다. 기득권을 조금이라도 누리고 있는 이들은 그들의 말이 불편할 것이다. 그래도 교양으로 무장을 하고 나름 괜찮은 신자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왔는데, 왠지 되게 얻어맞은 것 같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열린 마음으로 자기를 성찰하는 이들이라면 그 아픔을 불편하게 느낄 수는 있겠지만 불쾌하게 받아들이진 않을 것이다.

고난의 현장을 자기 집인 줄 알고 살아온 김인국 신부의 말은 촌철살인의 광선검이 되어 우리의 위선과 나태를 베고 또 찌른다. 사뭇 날카로운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말이 출발한 현장성 때문이고, 가르치려하기 보다는 듣고 경청하려는 태도 때문일 것이고, 그의 영혼이 발산시키는 유쾌함 때문일 것이다. 갈등의 현장에서 늘 치열한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도법스님은 벗들의 현실인식을 수긍하면서도 현실에 대한 해법에 대해서는 다른 입장을 보이곤 했다. 투쟁보다는 화쟁和諍이 그가 추구하는 길이다. 그는 아무리 못된 제도 혹은 사람이라 해도 마주 앉아보면 소통의 길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정치학자이면서 신학자이기도 한 김민웅 목사는 자칫하면 산만하게 흘러갈 수 있는 이야기에 슬쩍 방향을 잡아주고, 논리적인 언어로 이야기의 종지를 간추린다. 그리고 때로는 밋밋해지기 쉬운 순간에 긴장을 불어넣기도 한다.

3.

우리 사회에 대한 스님, 목사, 신부의 진단은 거의 동일하다. 생명을 경시하는 문화가 도를 넘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가 가져온 살풍경이다.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된 사람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어지러움을 느낀다.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율을 보이는 나라가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다. 삶을 구성할 힘과 비전을 잃은 이들은 급격히 죽음의 유혹에 직면하거나 범죄에 빠져들기도 한다. 사회 구성원들을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 아니라 잠재적 경쟁자로 보도록 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휘뚝거린다. 우리는 너나없이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는 가인의 후예가 되었다. 안식 없음, 뿌리 뽑힘, 고향 상실이라는 말처럼 우리 삶을 적실하게 표현해 줄 단어가 또 있을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욕망의 미로에 빠져 마땅히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길에서 만나는 이들을 적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현실이 미로 같다 해도 해결의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려울수록 근본에 충실해야 한다. 종교는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에게 초월의 빛을 비출 책임이 있다. 인간다운 삶의 길이 무엇인지 일깨워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이웃의 요구에 응답함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삶이 힘겹다는 이유로 우리는 한사코 고통받는 이웃들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는다. 이웃들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참된 인간의 가능성으로부터도 멀어지게 된다.

스님, 신부, 목사 세 사람은 오늘날 종교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도 타자의 얼굴을 보게 하는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죽음의 낯선 얼굴 앞에서 전율하고 있는 노인들과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귀에 들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몰린 이들의 죽음을 통계숫자로 환원시키는 순간 그 죽음의 날카로움은 두루뭉수리해지고, 그들의 비통한 죽음은 그렇게 허비되고 만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고, 어떤 단계를 거쳐서 죽음에까지 갔는지,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자살을 선택했는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현실에 우리 사회가 얼굴을 마주 대하듯이 직면해야 합니다. 죽음의 얼굴을 직시하는 것이죠.”(20-21쪽, 김민웅). 마치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 있는 이들을 불투명하게 만들어서 그들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들을 드러내는 순간 자본과 권력의 맨 얼굴이 폭로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를 사로잡고 있는 욕망을 드러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드러냄은 물론 소중하지만 그 다음이 더 중요하다. 그들이 사람들의 기본권을 제한하거나 침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세 사람은 조금씩 다른 입장을 개진한다. 도법 스님은 압박과 투쟁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는 열고 들어갈 문이 있다. 그 사람이 악마라고 하더라도 열고 들어갈 문이 있다. 인내심을 갖고 찾아내어 문을 잘 열고 들어가야 하는데 성질이 급해서 벽을 부수고 들어가려는 게 문제”(58쪽)라는 비노바 바베의 말을 인용한다. 정치인이든 경제인이든 그들을 적으로만 규정하지 말고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인내심을 갖고 자꾸 마주 앉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인국 신부는 도법 스님의 말을 일견 수긍하면서도, 자본과 권력의 질주를 멈추게 하기 위한 어떤 강제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멸망의 질주를 중단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53쪽). 그것은 “돈에는 우리가 잡고 들어갈 문고리가 없”(78쪽)기 때문이다. 김신부는 자본은 대화를 모른다면서 결국 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자본의 탐욕을 야단치고 혼을 내주는 것이고(72쪽), 정의가 강제력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103쪽).

4.

스님, 신부, 목사 세 사람은 안철수 현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정치권에 대한 기대가 많이 무너지고 진보정당 자체가 와해된 상황에서 만들어진 정치공간을 안철수라는 인물이 독점하게 된 것이 안철수 현상(97쪽)이라는 것이다.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 말고 그를 불러낸 사람들의 내밀한 욕망은 무엇일까? 세 사람은 ‘가장 성공한 사람에 대한 동경’, ‘사람다운 사람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 ‘선한 사람, 소통할 수 있는 사람, 인품이 착해서 이야기를 하면 들어줄 것 같은 사람’을 꼽는다. 그리고 안철수 현상이 우리 정치 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국민의 기본권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을 풀어갈 지혜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뽑을 것인가에 집중하기보다는 우리가 함께 지향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더욱 절실한 시대이다.

5.

종교인들의 대화인 만큼 이 책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진 주제는 종교이다. 스님, 신부, 목사 세 사람 모두 종교가 세상을 염려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염려하는 세태에 대해 분노한다. 종교를 주제로 한 이야기 마당에 동참했던 오강남 박사는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를 나누어 설명한다. "표층 종교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 하고, 심층 종교는 욕망을 극복하고 초월해서 진정한 나와 공동체를 추구"(126-7)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종교는 심층종교의 장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현세적 욕망을 부추기거나, 탈세계적인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현실 변혁의 힘을 잃고 말았다. 신앙은 우리에게 ‘다른 삶을 상상하는 능력’을 부여한다. 종교는 자본주의 세계가 말하는 행복을 위해 질주하지 않으면서도 행복을 구성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야 한다. “종교의 가르침과 실천이 현실과 긴장감을 일으키면서 현실을 해체하고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동력을 가져야 되는데”(128쪽)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김인국 신부는 표층 종교를 넘어 심층으로 가는 길은 의외로 쉽다고 말한다. 현실을 정의롭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가장 깊은 자기실현의 길이고 행복의 길임을 몸으로 경험하도록 도우면 된다는 것이다. 도법 스님은 불교가 현실과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대치하지 않는 까닭을 ‘깨달음병’에 걸려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168쪽). 깨닫기 전에는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스님 세계에 암암리에 퍼져 있기에 고난의 현장으로 선뜻 달려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아니라 교회성장이 목표가 되는 순간부터 교회는 뒷걸음질 쳐 예수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백향목처럼 우뚝 솟은 이들만 존중받는 세상이 아니라, 겨자풀처럼 보잘 것 없는 민중들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그 나라의 꿈은 가뭇없이 스러지고 있다. 교회 회중 가운데 있는 유력한 이들과 불화하거나 갈등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복음을 침묵시킴으로 교회는 점점 속물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종교보다 일반 사회가 훨씬 거룩해졌다는 도법 스님의 일침은 참 예리하다. 이미 세상에서 상식이 된 가치들, 즉 만민평등이나 남녀평등이 종교체제 안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당신들의 천국’이 아닌가.

희망은 없는 것인가? 스님과 신부와 목사 세 사람은 공히 제도화된 종교, 특히 대형화된 종교집단에 대해 비관적이다. 개선과 개혁을 통해 새로워질 가능성에 대해 그들은 큰 신뢰를 두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은 종교를 구원해야 할 때라고 단언한다. 이런 인식 때문인지 그들이 내놓는 해법은 다소 과격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된 종교집단에서 탈주를 감행하도록 도움으로써 주류를 흔들고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진단이요 해법이다.

그렇다면 탈주와 해체를 넘어 새로운 종교를 탄생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종교 세계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언어를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작동하는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번역이라고는 말했지만 그것은 종교 언어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모든 종교의 언어는 지금 여기의 존재 자체, 일상적 존재 자체, 그런 삶 자체에서 신비, 불가사의, 기적, 거룩함을 발견해 내고 그 거룩함을 삶이 되도록 만들어 내기 위한 언어들”(225쪽)이 아니던가.

6.

스님, 목사, 신부 세 사람이 나눈 잡설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어느덧 가로변에 있는 은행나무 잎이 거의 다 떨어졌다. 무성하던 잎을 다 떨군 채 졸가리로만 남은 나무들은 이제 차가운 겨울바람을 맨 몸으로 견디며 생명을 지키고 키워갈 것이다. ‘체로금풍體路金風’의 세월이다. 어둡다고, 춥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약자의 버릇이다. 정치인들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하고, 종교가 정의와 평화의 길에 접어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사람들이 아름답고 선한 말을 가져가 타락시켰다고 투덜거려 왔다. 그런데 도법 스님은 적극적으로 제안한다. 그 말을 덥석 받아서 ‘말이 씨가 되게 하자’는 것이다. 여운이 많이 남는 말이다. 스님, 신부, 목사가 나눈 ‘잡설’이 또 다른 ‘잡설’을 불러냄으로 삶의 이야기가 풍성해지고, 그 이야기가 우리 삶을 든든하게 세워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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