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13 2012년 11월 21일
작성자 김기석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이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양들의 목자이다.(10:1-2)

문으로 들어가느냐 다른 데로 넘어 가느냐에 따라 도둑과 목자가 갈린다. 문이 아닌 다른 데로 넘어가는 것은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것이고, 눈에 띄기를 꺼리는 까닭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어떤 경우에도 편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그의 행동에는 숨겨진 동기가 없다. 맑은 하늘처럼 명명백백하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자기 양들을 다 불러낸 다음에, 그는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10:3-4)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 음성을 알아듣기 까지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할 수 있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여우는 왕자에게 ‘길들인다’는 말을 가르쳐준다. 친구를 가지고 싶다면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면서, 말은 오해의 근원이 되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조금씩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앉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서로를 길들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설명한다. ‘다른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더 깊은 곳으로 숨어버리겠지만, 네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반가워서 뛰어 나올 거야.’ ‘밀밭을 일렁이며 지나가는 바람소리도 사랑하게 될 거야.’ 목자와 양의 관계도 이러하다. 또한 목자는 양보다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상호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삶으로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어리석은 목자들이 많다. 그들은 자기를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 양들만 탓한다. 진리를 가르치면서도 삶으로는 자기 가르침을 부정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그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10:9-11)

예수의 표현이 자꾸 바뀐다. 앞에서는 자신을 일러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라고 하더니 여기서는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말하고, 급기야는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한다. 조금은 당황스럽다. 모순 어법이 아닌가? 하지만 당황할 이유가 없다. 이 셋은 모순이 아니다. 하나의 현실을 가리키는 다양한 은유일 뿐이다. 예수는 진리의 길을 걷는 분이지만, 동시에 길이기도 하다. 진리를 가리키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진리 자체이기도 하다. 예수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온 까닭을 아주 간명하게 밝힌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누구를 만나든 그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을 자기 소명으로 여기는 사람 예수, 그는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자기 존재를 긍정할 힘을 잃은 사람들에게 살맛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들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을 호명해냈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삶도 똑같다. 온갖 생명이 제 몫을 온전히 누리며 살도록 보살피고 북돋는 것이야말로 성도로 부름받은 이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

생명을 억압하거나 주눅 들게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무관하다. 그런데 종교는 때때로 사람들의 삶에 부당한 제한을 가함으로 그들을 위축시킨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 기득권자들의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목자는 양떼를 먹이는 사람이지, 양을 먹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본분을 잃은 목자는 많고도 많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겔34:4). 예수는 이런 이들을 삯꾼이라 이른다. 그들은 이해의 언어․공감의 언어보다는 판단의 언어․정죄의 언어를 사용하는 데 익숙하다. 사람들의 영적 성장이나 내적 자유에는 무관심한 반면, 교인 수나 경상비 예산의 증감에는 매우 민감하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10:16)

놀라운 말이다. 선한 목자는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선한 목자는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산을 넘고 물을 넘는다. 가장 작고 연약한 양이라 해도, 혹은 우리에 갇혀 살기에는 피가 너무 뜨거운 불온한 양조차 마음에서 걸러내지 않는다. 우리(we) 의식이 타자를 배제하는 우리(fold)로 작용할 때 공동체는 병들기 시작한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에게는 ‘다른 양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 한국 교회는 병이 들었다. 우리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감사의 조건이지 특권이 아니다. 신앙이 특권으로 인식되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율법주의에 빠지게 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기꺼이 버리기 때문이다.(10:17)

온전히 바치지 않는 한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누가 바칠 수 있는가? 하나님으로 가득 찬 사람만 자기 생명을 바칠 수 있다. 하나님으로 가득 찬 사람 예수, 그는 자기 생명을 온전히 비움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누릴 수 있었다. 비우지 않고는 채울 수 없는 법이다. 채움에 대한 갈망은 넘치지만 비움을 위한 노력은 보기 어려운 시대이다. 비우고 또 비운 마음에 하나님의 숨결이 스며든다. “여전히 당신은 부어주시고/여전히 내 속에는 채울 자리가 있습니다”. 타고르의 노래가 이명증처럼 귀에 맴돈다.

예루살렘은 성전 봉헌절이 되었는데,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께서는 성전 경내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 그 때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10:22-24)

예수께서 주랑 사이를 거닐고 계시는 모습을 그려본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미구에 닥쳐올 당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셨을까? 아니면 온 땅에 가득 찬 슬픔에 대해 생각하셨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단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요한은 그때가 ‘성전 봉헌절’(하누카)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축제는 유다 마카비를 중심으로 한 저항세력이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4세에 의해 더럽혀졌던 성전을 재탈환하여 그것을 정화한 후 하나님께 봉헌했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하누카 축제 때면 유대인들은 가운데 있는 큰 가지를 중심으로 좌우 각각 네 개씩 도합 여덟 개의 가지를 가진 촛대(메노라)에 매일 하나씩 불을 붙여나간다. 불이 하나씩 더해질 때마다 그들의 종교적 감정은 더욱 고조되었을 것이고, 사람들이 부르는 ‘할렐 송’으로 인해 촛불은 더욱 흥겹게 일렁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흔연할 수 없었다. 인위적으로 밝혀놓은 빛 너머의 어둠을 홀로 응시하고 계셨을 테니 말이다. 성전이 성전 구실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의 의식을 옥죄는 올무가 되고 있는 현실을 대체 어떻게 타개해 나가야 한단 말인가? 그런 예수에게 사람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시선으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고, 그렇다고 전적으로 부정하자니 그 또한 꺼림칙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았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10:25-26)

말처럼 부질없는 게 또 있을까? 듣지 않으려고 작정한 이들에게는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 법이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뜻’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정문일침의 말이라 해도 둔감한 이의 마음을 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어떤 사람의 존재가 어떠한지는 그의 자기 진술이 아니라 그가 하는 일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다. 예수가 하는 일이 곧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생명을 귀히 여기고, 이런저런 억압으로 인해 질식상태에 있는 생명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어려움을 무릅쓰는 이들은 누구나 하나님께 속한 존재이다. 이것은 교회가 참 교회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시금석이기도 하다.

예수를 통해 드러나는 일을 보면서도 믿지 않는 것은 다른 주인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 주인의 이름은 다양하다. ‘돈, 자아, 체면, 이념, 가족, 성공…’.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의 뜻에 순명하며 살기보다는,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를 동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볼 일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10:27-28)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이 말이 통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주어와 술어의 불일치 때문이다. ‘내 양’이라는 주어가 참이 되기 위해서는 ‘알아듣는다’라는 술어와 호응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한 호응관계가 망가진 지 이미 오래다. 예수의 말은 오늘의 교회에서 경청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예수에게 금관을 씌워 그의 입을 봉인했다. 입 맞추어 예수를 배신하고 예수에게 침묵을 명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심문관은 도처에 있다.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 그리고 그 양들을 하나하나 아는 목자, 그들이 맺는 상호신뢰와 사랑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이 따름이다. 목자가 그들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할지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목자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신뢰의 기초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낭만적 낙관주의가 아니다. 진정한 신뢰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고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 할 수 있는 마음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확언하고 있다. 누구도 당신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말한다. 아, 이 말을 우리가 진정으로 믿기만 한다면 우리 삶이 이처럼 누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도 더 크시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10:29-30)

아, 가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그저 제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주신 자로 보고 있지 않은가? ‘주신 자’라는 말 앞에 생략된 것은 미루어 생각해보건대 ‘잘 돌보라고’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 어찌 한 사람이라도 소홀히 대할 수 있겠는가. 예수의 말을 경청하고 또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이미 하늘 아버지께 속한 존재이다. 그러니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께 속한 것을 빼앗아 갈 자가 누구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롬8:31) 바울 사도의 이런 일매진 선언도 같은 경험의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는 말이 문제이다. 예수는 이 말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시비의 빌미가 될 것임을 몰랐을까? 이 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당신을 동일시한다(identify)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안팎 없이 일치됨(unity)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 말을 빌미로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규정해 없애려 한다. 아, 성전 봉헌절에 그들은 스스로 성전이신 분을 죽이려 한다. 겨울이었다.

목록편집삭제

정병철(13 03-08 03:03)
감사합니다 목사님.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