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8 2012년 11월 21일
작성자 김기석

2.4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도래하는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1:15)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예수가 한 말이다. '때가 찼다'는 말은 역사가 변화의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말일 것이다. 가을이 되어 밤톨이 나무에서 툭 떨어지는 것 같은 그런 순간 말이다. 그런데 낯설지 않은가?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의 나라가 어딘가에 있고 우리가 '그 곳'에 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 나라는 가는 것이 아니고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요청되는 것은 삶의 돌이킴으로서의 회개이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수용하는 것으로서의 믿음이다.

이스라엘 민중의 가슴에 피어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은 그들이 겪어왔던 지속적인 역사적 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삶이 평안하고 안락했더라면 그런 꿈을 꾸지 않았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의 압제와 질곡에서 해방될 날을 학수고대했다. 그 질곡을 벗어버릴 힘이 자신들에게 없었기에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통한 궁극적 변화를 꿈꿨던 것이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 미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꿈을 이렇게 형상화하여 들려주었다.

"그 날이 오면,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주님의 산이 산들 가운데서 가장 높이 솟아서, 모든 언덕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우뚝 설 것이다. 민족들이 구름처럼 그리로 몰려올 것이다. 민족마다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미4:1-2)

산들 위에 높이 솟아 모든 언덕을 내려다보는 주님의 산, 모든 민족들이 구름처럼 그리로 몰려오는 광경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희열이 차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날'의 꿈은 언제나 미래에 속한 것이었고 현실은 참담하고 고달팠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를 기다렸지만 그들에게 도래한 것은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로 이어지는 제국 세력이었다. 전쟁과 공포, 억압과 착취, 모멸감 속에서도 숨죽여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그들은 지쳤다. 계속해서 유보되는 하나님 나라의 꿈, 그 꿈을 유지하는 것은 약자들의 슬픈 자기 위안이 아닐까?

예수도 유대교의 전통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와 있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막9:1)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예수를 종말론적 예언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는 다르다. 그 나라는 미래에 임할 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나라였다. 예수는 귀신을 쫓아내신 후에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에게 왔다"(마12:28)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다. 예수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관심이 하나님 나라라면, 그의 삶과 가르침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병자들을 치유하여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것,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사람들이 인격적 통합성을 유지한 채 살아가도록 하는 것, 식탁 공동체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 드리운 장벽들을 무너뜨리는 것, 자기 비하에 빠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자기 삶과 역사의 주체로 세우는 것,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들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서술하거나 묘사한 적이 없다. 다만 비유를 통해 넌지시 드러내 보였을 뿐이다. 비유를 뜻하는 헬라어 파라볼레parabole는 '옆에 던져 놓는다'는 뜻의 파라발로paraballo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다시 말해 비유란 어떤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을 빌려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말이다. 예수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 자라는 씨 비유(막4:26-29)는 하나님 나라가 눈에 띄지 않게 자라는 씨앗처럼 지금도 자라고 있음을 가르친다. 제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 해도 땅에 심긴 씨앗은 때가 되면 싹이 트고 자라서 마침내 열매를 맺는다. 그러니 더디다고 안달할 것도 없고, 발묘조장拔錨助長했던 송나라 사람처럼 서두를 것도 없다. 섣부른 희망을 버리고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보폭에 발을 맞추는 것이 지혜이다.

예수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나라는 백향목의 나라가 아니라 겨자풀의 나라이다.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겨자씨는 유대사회에서 '작은 것', '변변치 못한 것'의 동의어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겨자풀은 번식력이 좋아 급속히 퍼질 뿐만 아니라 토양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농부들에게 기피식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풀과 같다니? 히브리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대개 백향목으로 형상화 되곤 했다. 백향목은 기품있고 아름답고 귀했다. 성전이나 제단 혹은 궁전을 짓는 데만 사용하던 최고급 나무였다. 하나님 나라는 마땅히 그런 나무와 같아야 했다.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백향목이 아니라 겨자풀에 비유하고 있다. 왜 그럴까? 예수는 백향목과 같이 우뚝한 사람들과 나라의 폭력성을 보았던 것이다. 로마야말로 백향목과 같은 나라였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주변 세계를 복속시키고, 화려한 문화로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나라. 하지만 그 이면은 참혹하지 않던가.

피식민지 백성들의 삶은 가혹한 수탈로 인해 거덜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전락하였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 나라는 특권층에게만 천국일 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지옥이었다. 그런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서 예수는 겨자풀처럼 보잘 것 없는 이들을 통해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그리고 있다. 억센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겨자풀보다 더 좋은 예가 어디 있을까? 척박한 역사의 토양 속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꿈에 지펴 지금 여기서 사랑하고, 서로를 돌보고, 생명을 북돋고, 평화를 위해 땀 흘리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겠는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들의 마음과 관계를 양도한 사람들이 어울려 이룬 관계망(network)"(도널드 크레이빌, <<예수가 바라본 하나님 나라>>, 복 있는 사람, 김기철 역, p.29)이다. 예수는 백향목과 같이 우뚝한 존재가 가져오는 현실이 아니라 겨자풀 같은 사람들이 함께 이루어가는 현실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인류에게 제시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마13:24-30)를 통해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마음을 가르쳤다. 역사는 마치 밀밭에 누군가가 뿌려놓은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과 같다. 가라지가 돋아난 것을 본 일꾼들은 그 가라지를 뽑아내겠다고 주인에게 말한다. 하지만 주인은 그들을 만류한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현실이 선과 악, 빛과 어둠,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양분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악을 알지 못하는 선도 없고, 어둠과 무관한 빛도 없다. 아름다움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를 악으로 어둠으로 추함으로 규정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 마음 자체가 폭력이고 타자에 대한 부정 욕구이다. 예수는 악을 근절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추수 때가 되면 밀과 가라지는 갈라져 저마다의 운명을 맞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여 악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살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악에 저항하되 여전히 존재하는 악 때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가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제도적 종교에 속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최후의 심판 때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인자가 모든 민족을 자기 앞에 불러 모아 양과 염소를 가르듯 사람들을 가른다. 가름의 기준은 특정한 종교에 소속되었는지 여부가 아니다. 그들이 세상의 약자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이다.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든 사람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갔는지 여부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런 사회적 약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의미에서 벗들의 나라이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물로서 주어질 뿐이다. 사람은 다만 그 속에 들어가 기쁨을 누리면 된다.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삶이 요구된다. 밭을 가는 자라야 숨겨진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좋은 진주를 손에 넣고 싶으면 가진 것을 다 팔아야 한다(마13:44-46).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편의 노력과 응답이 없다면 경험될 수 없는 현실이다. 중국의 요 임금은 순 임금에게 나라를 넘기면서 '인심은 늘 위태롭고 도심은 흐릿해지니 오직 그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오직 그 중中을 잡으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고 가르쳤다. 중심이 하나일 때 삶은 건강하고 충실하지만(忠), 중심이 여럿일 때 삶은 병이 된다(患).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있나? 비본래적인 것들을 벗고 또 벗으면서 오로지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집중하는 사람이다.

백향목의 나라가 아니라 겨자풀의 나라, 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가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한 누룩처럼 서서히 세상을 바꾸어가는 나라, 예수는 그 나라의 도래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제비 한 마리가 봄을 가져오지는 않지만 긴 겨울에 지친 사람들에게 봄이 멀지 않았음을 일깨워주듯, 그는 하나님 나라의 봄 소식으로 지금 우리 가운데 있다. 그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자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눅17:20b-21)고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맺는 관계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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