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7 2012년 11월 21일
작성자 김기석

2.3 비폭력적인 저항은 역사 변혁의 길이 될 수 있을까?

겟세마네 동산, 어둔 밤, 칼과 몽둥이로 무장한 사람들이 예수를 잡기 위해 몰려 왔다. 유다는 예수를 입 맞추어 배신했다. 동원된 이들이 다가와 예수를 붙잡았다. 함께 있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 칼을 빼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서 그 귀를 잘랐다. 예수는 더 큰 폭력을 막으시며 말씀하셨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마26:52) 사람들은 예수의 비폭력을 말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하곤 한다. 예수는 정말 비폭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했을까?

우리는 폭력으로 폭력을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가인의 후예인 우리 속에는 폭력의 충동이 심겨져 있다. 우리 행동의 밑바탕에는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원리가 암암리에 작동하고 있다. 예수 시대의 팔레스타인은 로마 제국과 그 대리 통치자인 헤롯 가문에 맞선 반란이 거듭 일어나던 분쟁의 땅이었다. 파견 부대를 습격하는 게릴라 부대와 또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된 군인들로 인해 그 땅에서는 피가 마르지 않았다. 로마 제국에 부역했던 대제사장들을 향한 민중들의 시선도 고울 수 없었다.

압제에 항거하는 저항의 전통은 출애굽을 거쳐 예언운동에 이르기까지 유구하다 할 수 있다. 저항의 방식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들은 이방인들을 내몰기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주후 50년대에 등장한 시카리파(Sicarii)는 구부러진 단검을 들고 다니며 로마 제국의 지배에 협조하면서 동족들에 대해서 잔인하게 굴었던 요인들을 암살하기도 했다. 그들의 행동은 제국질서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제국에 협력하는 민족반역자들에 대한 경고의 뜻도 담고 있었다.

시카리파 뿐만 아니라 여러 저항단체들이 주도하여 벌어진 몇 차례에 걸친 유대 독립전쟁은 의기에 찬 것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더 큰 살상과 참화로 끝나곤 했다. 예수는 그러한 폭력의 세기 한 복판에서 살았다. 폭력 한 복판에서 평화를 꿈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는 비폭력적인 저항의 길을 택했다.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라는 가르침을 전복시킨다. 도무지 보복하지 말라면서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엄중하게 일렀다. 여기서 '맞서지 말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안티스테나이antistenai'는 소극적으로 대처하라는 말이 아니라, '악에 대해 똑같은 식으로 맞받아 치지 말아라' 혹은 '악한 자에게 맞서서 폭력적으로 대응하지 말아라'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월터 윙크, <<예수와 비폭력 저항>>, 한국기독교연구소, 김준우 옮김, p.29). 우리는 정의를 위해서라면 폭력이 사용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런 폭력적 수간을 사용하는 순간 우리 또한 악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이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마5:39b-42)

이 구절은 예수의 절대적 평화주의의 장전처럼 인용되곤 한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무골호인처럼 불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교훈처럼 들리기도 한다. 정말 그런가? 폭력에 반대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불의를 용납하거나 묵인하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월터 윙크는 예수가 지향한 길을 전투적인 비폭력(militant nonviolence)이라 명명한다.

위의 구절에 대한 월터 윙크의 해석은 흥미롭다. 그는 오른손잡이가 오른쪽 뺨을 치기 위해서는 손등으로 치는 방법 밖에 없다면서, 손등으로 치는 것은 하급자들을 훈계하는 통상적인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결국 손등으로 상대방을 친다는 것은 굴욕감을 주기 위한 행동이다. 그에게 왼쪽 뺨을 돌려댄다는 것은 '나도 너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선언이며, 압제자에게서 모욕할 수 있는 힘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율법은 겉옷을 담보물로 잡은 채권자에게 해지기 전에 그것을 채무자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이 덮고 잘 수 있는 것이 겉옷뿐이었기 때문이다. 속옷까지 요구하는 이들은 얼마나 가혹한 이들인가. 그들에게 겉옷까지 주어버림으로써 벌거벗게 되면 그도 수치스럽지만 그를 벌거벗도록 만든 이도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다.

억지로 오리를 가자는 사람과 십 리를 가주라는 말은 로마 군인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로마 군인들은 일반인에게 강제노역을 부과할 수 있었다. 군인은 민간인에게 자기의 배낭을 지고 오 리를 가게 할 수 있었는데, 그 이상은 군법에 의해 엄격이 금지되어 있었다. 강제징발의 상황에서 십 리를 가주겠다고 함으로써 군인들로 하여금 자기 행동을 돌아보게 만들라는 것이다(앞의 책, p. 32-44 간추림).

이런 해석이 타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예수가 따라는 이들에게 비폭력을 권고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예수는 압제자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상징적인 저항행위만 권고하고 있는 게 아니다. 상징적 저항행위가 그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헐뜯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곧 이어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예수는 우리가 수동적인 저항자에 머물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가족에게 끔찍한 일을 자행한 사람, 나 자신을 모욕하고 박해한 사람, 인간이 어찌 저럴 수 있나 싶은 일을 자행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요구는 그런 이들의 가슴에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수 사랑은 우리의 인간적 감정을 거스르라는 요구라기보다는 그를 악마 혹은 절대악으로 간주하지는 말라는 뜻일 것이다. 그들 속에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능력과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간 존재는 인간 되어감'이라고 말했다. 변화의 가능성이야말로 인간의 으뜸가는 특징이라는 말일 것이다. 원수 사랑에 대한 요구 앞에서 우리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흔들림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사랑 없음, 증오, 무능력을 정직하게 대면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마음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이의 변화 가능성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신앙이란 어쩌면 자기 속에 깃든 폭력의 충동을 평화의 계기로 바꾸는 연금술인지도 모르겠다. 십자가 위에서조차 폭력의 현실을 평화로운 용서로 전환시켰던 예수를 보고 십자가 아래 있던 백부장은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막15:39b)고 고백했다. 불교의 승려였다가 환속한 시인 김달진은 예수의 십자가의 의의를 이렇게 간추렸다.

"십자가 위의 예수의 사형!

이때처럼 인간의 잔학성을 보인 일은 아직 인류의 역사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이때처럼 인간의 깊은 사랑과 신뢰를 세상에 보인 일은 역사의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으리라."(김달진, <<山居日記>>, 세계사, 98쪽)

예수의 비폭력이 무능력하지 않았던 것은 다른 이들의 가슴에 깃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런 신뢰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전하면서 로마의 평화라는 허구의 신화가 사람들의 의식을 옥죄고 있던 때에 그리스도를 통해 유입되는 땅의 평화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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