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6 2012년 11월 13일
작성자 김기석

2.2 "권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인간을 움직여가는 심층적인 힘은 무엇일까? 프로이트는 쾌락에의 의지라고 말했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에 주목했다. 그가 말하는 권력에의 의지가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부과하여 행동하도록 만드는 힘을 뜻하는 것인지, 짜라투스트라가 보여주듯이 자기를 초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일컫는 것인지는 논의가 필요하다. 아들러는 우월한 존재가 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바로 권력에의 의지라고 설명했다. 어느 경우이든 터무니없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전적으로 옳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런가 하면 나찌가 만든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겼던 빅터 프랭클은 의미에의 의지야말로 극한의 상황에선 인간을 살게 하는 힘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는 '의미 없음'이다. 삶의 권태로움에서 빚어지는 무의미성도 문제이지만, 자기 결정권을 갖지 못한 이들이 느끼는 무의미성은 매우 심각하다.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자기의 경험을 담아 <죽음의 집의 기록>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강제 노동의 어려움은 "고달픔과 끝없음 때문이 아니라 몽둥이 밑에서 의무적으로, 강제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도스토예프스키, <죽음의 집의 기록>, 열린책들, p.50)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어떤 합리적 목적도 성취할 수 없는 무의미한 일을 반복적으로 강요당하는 것이다.

불의한 권력에 의해 무고한 이들이 희생당하고, 정의 회복을 부르짖는 약자들의 음성이 속절없이 무지름 당할 때,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요구가 조소거리로 희화화 될 때, 그러나 자기의 무기력함을 절감할 수 밖에 없을 때 불쑥 권력에 대한 욕구가 치솟아 오른다. 이때 권력욕 속에는 처벌에 대한 욕구 혹은 복수심이 도사리고 있다. 절망이 깊어지면 신조차 정의의 법정에 소환되기도 한다. 예수는 애당초 이런 욕구와 무관한 사람이었을까? 고향인 나사렛에서 멀지 않은 도시 세포리스가 로마군인들에 의해 어떻게 유린되었는지를 들었을 때, 그날의 기억에 붙들린 채 모진 목숨을 겨우 부지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트라우마에 접했을 때, 남의 나라 남의 땅을 주인처럼 활보하는 점령군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종교 권력자들에 의해 착하고 순한 백성들이 죄인으로 규정되는 광경을 보았을 때, 어쩌면 예수도 힘을 갖고 싶은 유혹에 살짝 흔들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예수는 권력을 가진 이들이 노정하는 삶을 직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스코트 니어링의 말은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옳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다양한 관계와 현실을 가늠한다. 내적으로 자기를 통제할 수 없는 사람에게 주어진 권력이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바뀌는 것을 우리는 자주 목격하고 있다. 애굽의 전제정치 아래 신음하던 히브리들은 야훼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분할되는 세상을 넘어 모두가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평등공동체의 이상을 꼭 붙들었다. 출애굽 공동체의 지향점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비옥한 땅을 가리키는 은유라기보다는 모두가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 사는 나라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가나안 땅에 틈입해 들어간 출애굽 공동체는 주변세계와는 달리 왕정체제를 거부했다. 그들의 왕은 야훼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등공동체의 이상은 삶의 조건이 달라지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사사인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했다.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사무엘은 왕정체제 속에 내재된 모순을 지적하면서 결국에는 백성들이 왕의 종이 될 것이고, 왕 때문에 울부짖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백성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지상의 권력자는 자기보다 위에 있는 권위를 견디지 못한다. 초월적 심판 앞에 무릎을 꿇을 줄 모른다. 이런 자만심과 경직성 속에 자기 파멸이 잉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사야는 자신을 전능한 존재로 인식하는 바빌론 왕의 운명을 이렇게 예고한 바 있다.

"네가 평소에 늘 장담하더니 '내가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겠다. 하나님의 별들보다 더 높은 곳에 나의 보좌를 두고, 저 멀리 북쪽 끝에 있는 산 위에, 산들이 모여 있는 그 산 위에 자리잡고 앉겠다. 내가 저 구름 위에 올라가서, 가장 높으신 분과 같아지겠다' 하더니 그렇게 말하던 네가 스올로, 땅 밑 구덩이에서도 맨 밑바닥으로 떨어졌구나."(사14:13-14)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혹은 논리가 해체되지 않는 한 사회적․신분적 갈등은 해소되지 않는다. 예수는 지중해 세계를 제압한 로마 제국의 변방에서 살았다. 제국은 어떻게 작동되던가? 권력은 한 곳으로 집중되게 마련이고, 사회․경제․군사적 통제를 통해 안전을 도모하고, 제국의 이미지를 전파하기 위한 장치들을 고안하고, 무엇보다도 자기들의 권력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제국의 신화를 창조한다. 로마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개선문, 자연 조건을 극복해낸 도로, 제국의 이미지를 유포하기 위해 만든 원형 극장, 다양한 신들에게 봉헌된 신전들은 로마의 지배가 영속하리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보여주는 징표들이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예수는 권력을 장악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을 때의 이야기가 전형적이다. 악마가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마4:9)고 했을 때 예수는 단호히 말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마4:10) 요한복음은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6:15)고 기록했다.

지배자를 바꾸는 것으로 세상이 새로워지지 않는다.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은 선거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을 뽑아야 하고, 우리 삶을 부당하게 간섭하고 병들게 하는 것들에 저항하고, 건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궁극적인 새로움은 새로운 존재와 더불어 도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예수의 판단이다. 예수는 누구를 가장 큰 사람으로 칠 것이냐는 놓고 말다툼을 벌였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뭇 민족들의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밥상에 앉은 사람이냐, 시중드는 사람이냐? 밥상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눅22:25-27)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는 이 말이야말로 예수 정신의 핵심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대야에 물을 떠온 후 허리에 수건을 동이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예수는 제자들을 둘러보며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요13:14)고 말했다. 예수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면서도 자기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보며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 기도했다. 피해자의 마음에는 가해자에 대한 노여움과 복수심이 남게 마련이건만 예수는 어떻게 그런 기도를 바칠 수 있었나?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치 속에서 바라보니 저들의 무지한 폭력이 가여웠던 것이다. 자기가 받은 고통을 폭력으로 되돌려주는 사람은 약자이다. 하지만 그것을 창조적인 삶의 계기로 전환시키는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다.

예수와 깊이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변화를 경험했다. 어부들은 하나님의 꿈에 지펴 새로운 세상의 초석이 되었고, 행실이 나쁘다 하여 지탄 받던 여인은 거룩한 존재가 되었고, 오직 살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았던 세리장 삭개오는 자기 재산 절반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았다. 하지만 예수의 길은 너무 느린 것 같기도 하다. 난폭한 현실 앞에서 너무 무기력해 보이기도 한다. 예수의 길은 한 마디로 좁은 길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 길을 통하지 않고는 생명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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